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Nov 11. 2024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愚行錄>

영화 <우행록:어리석은 자의 기록>  2016년

젊은 부부와 아이까지, 일가족을 살해한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년 후, 범인도 잡히지 않은 채 조금씩 잊혀가던 사건을 취재하는 주간지 기자 '다나카'(츠마부키 사토시)의 행적을 다룬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은 2006년 출간한 누쿠이 도쿠로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작품을 통해 언론의 생태도 간접적으로 꼬집어가고자 했다.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대한 취재 열기는 급속도로 올라가지만, 이내 식어진다. 그리고 보도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선동에 가까운 내용이 포함되기 일수다.     

아, 그야 범인 옷은 당연히 현장에 없었죠. 피범벅이었을 텐데 그런 걸 놔두고 가면 엄청난 증거가 되겠죠. 요새 범죄자가 그런 멍청한 실수를 할 리가 없죠. 지문도 안 남겼다고 하던 걸.

말고도 별다른 증거는 없었다고 들었어요. 댁은 뭐 좀 알아요? 알 리가 없죠. 경찰에서도 다른 증거가 나왔으면 이렇게 시간 끌 것 없이 얼른 범인을 잡았을 테니. 요샌 형사 드라마 같은 것만 봐도 경찰이 어떤 식으로 수사하는지 다 알게 되잖아요. 범인도 경찰이 어떻게 나올지를 빤히 꿰뚫어보고 행동했겠지. 그러니까 뭐라 말하기 힘들다니까. 우리야 그런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지만, 범죄자들은 그걸 보면서 배우니까 말이에요.             (P16)     


만약 원한이라면 뭔가 일그러진 원한이겠죠. 애당초 일반적인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살벌한 짓을 할 리가 없죠. 부부뿐만 아니라 아직 어린 애들까지 그런 식으로 끔찍하게 죽였으니까요. 아, 그럼 정신병자의 짓이겠다. 역시 그런 것 같아요.

예? 아, 그러게요. 돈도 없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눈속임이겠죠. 최근 외국인 절도단이 늘어서 깡그리 털어간다는 뉴스가 자주 나오잖아요. 그런 놈들의 범행으로 보이게 하려고 그랬겠죠. 하지만 뉴스만 봐도 범인이 여럿이 아니라 혼자일 가능성이 높다면서요? 그렇다면 돈을 들고 간 건 눈속임이고, 역시 원한 관계로 일어난 사건이겠죠. 그야 그렇죠. 아직 모르는 일이죠. 진짜 경찰은 뭘 하는지 몰라. 요샌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니까.          (P19)      

제가 드리는 얘기가 참고는 되나요? 다코 본인에 관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는 게 나을까요? 다코에 대한 에피소드야 무지 많죠. 만난 세월이 세월이니까요.

음, 흐믓한 얘기야 잔뜩 있지만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흐믓한 얘기로는 재미가 없지 않겠어요? 누가 뭐래도 다코는 일류 대학을 나와서 일류 회사에 들어가, 물론 회사에서는 이러저러한 좌절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큰 허물없이 회사 생활을 보내면서 가족을 꾸리고 삼십대 중반에 도쿄 23구 안에 자기 집을 가진, 누가 봐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전형적인 인생이잖아요. 일반 독자가 보기에 그런 얘기는 재미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반감을 살지도 모르죠. 그런 인간은 무참하게 죽어도 싸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지나친 생각이 아니냐고요? 아뇨,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인간이란 말이죠. 항상 자신과 주위를 비교하면서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를 졸렬하리만치 의식하고 판단하는 생물이니까요. 자기보다 위에 선 인간이 있으면 재수 없어하고, 자기보다 밑에 있는 인간은 무시하는 것, 그게 인간이죠.      (P90-91)     

그나저나, 어떻게 저를 알고 찾아오셨나요? 누가 제 이름을 말하던가요? 예? 몇 명이나 절 거명했다고요? 제가 그렇게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을 텐데. 아, 그 일 때문에 좀 유명해졌나. 그런 가십은 잘들 기억하더라고요. 당사자는 까맣게 잊고 지내는데 말이죠.

아뇨, 전혀 몰랐어요. 결혼해서 성이 바뀌었잖아요. 서로 이름을 막 부를 정도로 친했던 건 아니라서, 뉴스는 봤지만 설마 그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어떻게 알았냐고요? 사진을 봤어요. 솔직히 피해자 얼굴 사진을 왜 보도하는지 예전부터 이해를 못했었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으니 역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됐죠. 얼굴 사진을 못 봤으면 그렇게 잔인한 사건의 피해자가 지인이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지냈을 거예요. 대학시절 지인들과는 거의 연락을 끊고 지내서 아무런 소식도 못 듣거든요.

깜짝 놀랐죠. 뭐라고 해야 할까요, 느닷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더라고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렇잖아요. 내가 아는 얼굴이 갑자기 텔레비전에 나왔으니까요. 게다가 일가족 몰살 사건의 피해자라고 하니 머리가 새하얘졌죠. ‘이름이 유키에였나’, ‘나이는 저게 맞나’ 하는 등의 인식은 한참 뒤에 떠오르더군요. 얼굴 사진을 본 순간 내가 아는 나쓰하라 씨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어요. 나쓰하라 씨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고, 저는 사진을 보는 순간 알았어요.

으음, 이유를 설명하기는 좀 어려운데..... 어찌됐건 직감이니까요. 직감에 이유를 달아 봐야 별 의미가 없죠. 그래도 굳이 말해 보자면, 그렇게 죽는 게 나쓰하라 씨에게 어울린다고 느껴져서가 아닌가 싶어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나이를 먹다가 손자손녀에게 둘러싸여 안락했던 인생을 마감하는 방식은 나쓰하라 씨답지 않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살해당한 사람이 나쓰하라 씨라는 사실을 바로 납득한 거죠. 아뇨, 그런 것과는 좀 달라요. 저하고는 애당초 종이 다른 사람이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게이오 출신 여성들은 아등바등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하여튼 툭 튀어나와서 눈에 띄게 사는 사람이 없어요. 아, 남성들도 그런가? 물론 예외야 무수히 많겠죠. 나쓰하라 씨가 비범한 인생을 살아갈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실제로도 결혼하고 나서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았다면서요? 그것도 나쓰하라 씨답다 싶어요. 다들 그럴걸요. 안정된 생활을 요령 있게 거머쥐고는 별 고생 없이 살아가죠. 게이오 출신 여성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죠.               (P134-135)     

게이오에 부속학교가 있는 건 아시죠? 예,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듯 쭉 진학할 수 있죠. 물론 중학교부터 입학하는 사람도 있고 고등학교부터 입학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다 똑같았어요. 전 대학부터 들어간 처지니까요.

‘내부’, ‘외부’라는 표현이 있어요. ‘내부’란 부속고교에서 대학에 들어온 사람을 말하죠. ‘외부’는 반대로, 그러니까 저처럼 대학부터 들어온 사람을 말해요. 어감이 어떤가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단적으로 ‘그들’의 의식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느껴져요. ‘그들’이라고 하면 물론 ‘내부생’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저처럼 대학부터 들어온 자들이 ‘외부’의 인간인 거죠. 자기들 ‘외부’의 인간.

내부생의 결속력은 단단하죠. 경우에 따라서는 12년 동안 내내 함께 다녔을 수도 있으니까요. 애당초 여자의 경우는 유치부 모집 인원이 얼마 안 돼서, 초등학교부터 계속 게이오에 다닌 학생은 서른 명 남짓일 거예요. 그 서른 명이 대학에 들어와서는 각 학부별로 나뉘니까 숫자로만 따지면 정말 미약한 세력이죠. 실제로는 중학교부터 들어온 학생들이 가장 결속력이 강한 모양이더라고요.               (P136-137)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참 듣기 싫네요. 어중간하기는 해도 어쨌든 일본에 신분제도 같은 건 사라졌는데 말이에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전 부모가 부자인 것과 본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어디까지나 현실, 그러니까 다나카 씨와 내부생 사이에 일어났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헤아려보고 드리는 말씀이란 걸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네요. 서로가 살아가는 세계 사이에 놓인 수렁이 너무 깊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얘기가 안 통했겠죠. 내부생과 외부생 말이에요. 내부생들은 어릴 때부터 비슷한 세계를 공유하며 자라왔죠. 비슷한 가치관이라고 바꿔 말해도 괜찮겠죠. 상식, 금전감각, 행동반경까지 일반인과는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요. 그런 세계에 다나카 씨가 중간에 툭 끼어들어간 꼴이니 얘기가 통할 리가 없죠. 다나카 씨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 테니까요.

연애란 게 참 어려워요. 마음의 추가 서로 평행을 이루면 좋겠는데 그게 좀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서로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어느 한쪽으로 추가 기울기 마련이죠. 감정의 무게가 덜한 쪽은 결국엔 상대방에 질리기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함께 대화를 나누고 거리를 걷는 게 귀찮게 느껴지는 거죠. 그런 온도차를 서로의 노력으로 메워나가면서 연애를 이어나가는 건데, 젊을 때는 그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어요. 그러다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죠.   (P160-161)     

그래서 나쓰하라 씨는 다나카 씨를 능멸한 거죠. 내부생에 대한 다나카 씨의 집착을 이용해서 그녀를 끔찍한 상황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요. 표면적으로는 친구에게 지인을 소개한 것이지만, 실제로 한 일은 천박한 뚜쟁이 짓이었죠. 나쓰하라 씨는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었어요.

다나카 씨가 나쓰하라 씨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어요. 알았다면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면 나쓰하라 씨를 죽이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 않았겠어요? 이런 저급한 표현까지는 쓰고 싶지 않지만, 내부생 남자들 사이에서는 ‘공중변소’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렸다니까요. 다나카 씨가 그걸 알게 되었다면 충분히 살의가 생길 만도 하죠.

...... 아, 그렇군요. 나쓰하라 씨 일가를 죽인 사람이 다나카 씨라고 해도 전 전혀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동시는 충분하고도 남으니까요. 어떤 식으로 살해당했는지는 뉴스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요. 엄청난 원한이 있지 않고서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기 힘들지 않을까요. 나쓰하라 씨답다고 한 건 그런 뜻에서 한 말이에요.            (P166)   

  

오빠도 하여튼 괜한 걱정이 많다니까? 그런 여자는 그냥 놔두면 되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입막음을 했어? 증거도 없잖아. 그 여자가 경찰에 가서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응, 오빠가 날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맙게 생각해. 오빠밖에 없다니까. 옛날부터 날 위해 준 사람은 오빠뿐이야. 그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봐준 것도 혹시 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까봐 그랬던 거지? 남편분의 친구들까지 만났어? 듣다보니 얘기가 재미있어서 그랬던 거야? 하긴 남의 얘기가 재미있기는 해, 어, 아냐? 죽어도 싼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고? 고마워. 그렇지만 나 자신이 아무 죄의식이 없었는걸.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됐는데. 울 오빠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어떻게 하지?             (P317)   

  

인생이란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걸까. 인간은 바보니까, 남자도 여자도 모두 바보니까, 어리석은 짓만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그럼 나도 바보인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결국 어리석은 짓이란 건가? 오빠, 어떻게 생각해? 대답해줘, 응? 오빠.          (P320)


매거진의 이전글 니콜라이 레스크프의 <레이디 맥베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