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2006년
대만계 미국인 영화감독 이안의 2005년작 영화. 미국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인 애니 프루가 쓴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이크 질렌할, 히스 레저 주연. 이 외에도 앤 해서웨이, 미셸 윌리엄스 등 조연진도 연기력 좋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다섯 시도 채 안 되어 에니스 델 마가 잠에서 갠다. 바람이 트레일러를 뒤흔들며 알루미늄 문과 창틀 틈새로 윙윙 거린다. 그 외풍에 못에 걸린 셔츠가 살짝 몸을 떤다. 에니스는 배에서 음부까지 이어진 회색 털을 긁으며 발을 질질 끌고 가스버너로 가서, 마시다 둔 커피를 금이 간 법랑냄비에 붓는다. 불꽃이 푸른색으로 냄비를 감싼다.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어 오줌을 눈 뒤,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해진 부츠에 발을 집어넣은 다음 부츠 앞 축을 바닥에 탕탕 쳐 발을 쑥 밀어 넣는다. 온통 흔들어대며 포효하듯 지나가는 바람의 길 아래, 자갈과 모래가 트레일러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말 트레일러가 고속도로를 타다니, 나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날이 밝으면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나야 한다. 목장은 또다시 처분되려 나와 있고 마지막 남은 말들도 실어 내보냈으며 그 전날 임금도 모두 지불되었다. 목장 주인은 “이것들을 그 부동산 아귀한테 줘버려. 난 지금 당장 뜨니까”라며 열쇠 몇 개를 에니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결혼한 딸의 집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데도 그는 아직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잭 트위스트가 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P316-317)
두 사람은 각기 그 주의 반대쪽 구석에 자리한 작고 가난한 목장에서 자랐다. 잭 트위스트는 몬태나 주 경계 라이트닝 플랫에서, 에니스 델 마는 유타 주 경계선 근처 세이지 주변에서 고된 노동과 궁핍 속에 컸는데, 둘 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시골 청년으로 아무 전망도 없었고 예절에 서툴고 말도 거칠었으며 금욕적인 삶에 익숙했다. (P317)
1963년 잭 트위스트를 만났을 때 에니스는 알마 비어스와 약혼한 사이였다. 잭과 에니스는 둘 다 작은 목장을 갖기 위해 저축하고 있다고 우겼는데, 에니스의 경우 그 저축이란 담배깡통에 넣어둔 오 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의미했다. 그해 봄, 일이라면 뭐가 됐든 절실했던 두 사람은 팜 앤드 랜치 직업소개소에 각자 등록했고, 시그널 북부에 있는 한 목양 회사의 양치기와 야영지 감시인 고용 계약서에 함께 서명했다. 여름 방목지는 브로크백 산 국유림의 수목 한계선 위에 있었다. 잭 트위스트는 그 산에서 여름을 난 적이 한 번 있었고, 에니스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P318)
두 사람은 술집을 찾아 오후 내내 맥주를 마셨다. 잭은 작년 산에서 뇌우로 양 마흔두 마리가 죽은 것, 그 양에서 나던 괴상한 악취와 양이 익사한 모양새에 대해 들려주고는 그 위에서는 위스키가 많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독수리도 하나 쏘았다며, 고개를 돌려 모자에 꽂은 독수리 꼬리 깃털을 보여주기도 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금세 터져 나오는 웃음, 잭은 첫눈에 반반해 보였지만 작은 키에 비해 엉덩이에는 살이 붙었고 입을 벌려 웃자 뻐드렁니가 드러났다. 이빨은 항아리에 담긴 팝콘을 앞니로 긁어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눈에는 띄었다. 그는 로데오에 홀딱 빠져 있었고 작은 대회에서 탄 버클을 벨트에 차고 있었다. 하지만 부츠는 속살이 보일 정도로 닳아빠진 데다 손볼 수도 없을 지경으로 구멍이 나 있었으며, 라이트닝 플랫이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 다른 곳에 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좁은 얼굴에 높은 메부리코인 에니스는 추레하고 가슴도 약간 안으로 굽었으나 작은 상체가 컴퍼스 같은 길고 가는 다리 위에 균형을 잡고 있었고, 말 타기와 싸움에 타고난 듯한 강단 있고 유연한 몸매였다. 반사 신경은 예사롭지 않게 빨랐고, 햄리 표 말안장 카탈로그 말고는 그 무엇도 읽기 싫어할 정도로 지독한 원시였다. (P319-320)
둘은 산림청이 정한 구역에서 큰 텐트를 치고 조리 도구와 식량을 챙겼다. 두 사람은 첫날 밤 야영지에서 잤는데, 잭은 ‘양 떼 옆에서 불 피우지 말고 자라’는 조 아귀레의 명령에 욕을 퍼부으면서도 어둑한 새벽부터 별 군소리 없이 밤색 암말에 안장을 얹었다. 여명이 흐릿한 오렌지색으로 변하며 아래로부터 젤리 같은 옅은 녹색 띠가 번져왔다. 검댕처럼 검은 거대한 산이 서서히 어슴푸레해지더니 에니스가 아침을 하려 피운 불에서 나온 연기와 같은 색이 되었다. 차갑던 공기가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줄무늬 조약돌과 보드라운 흙가루에 느닷없이 연필처럼 길쭉한 그림자가 깃들었다. 그 아래 병풍처럼 둘러쳐진 로지폴 소나무들은 거무스름한 석녹생으로 두툼하게 무리를 이루었다.
낮 동안 에니스는 커다란 깊은 골짜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잭이 식탁보 위를 기어가는 벌레처럼 초지를 가로지르는 작은 점으로 보였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붉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에니스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P321)
잭은 돈이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했고, 에니스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견해를 존중했고,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에 동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취해 비틀거리는 등불을 들고 바람을 맞으며 말을 타고 양 떼에게 돌아가면서, 에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발을 뻗으면 달에라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었다.
여름이 계속되자 새 목초지를 찾아 양 떼를 이동시키고 야영지를 옮겼다. 양과 새 야영지 사이는 더 멀어졌고 밤에 말 타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졌다. 에니스는 말도 수월하게 타고 잠도 눈을 뜬 채로 잤지만 양 떼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P324)
“이런 젠장, 이빨로 망치질 그만하고 이리 와. 침낭이 크다구.”
잠을 뺏긴 잭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침낭은 충분히 크고 충분히 따뜻했으나 두 사람은 이내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에니스는 담장 수리라든가 돈 쓸 곳이라든가 무엇에든 생각을 다 쏟으려 했지만, 잭이 그의 왼손을 잡아 발기한 자기 성기에 갖다대자 그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에니스는 불에 덴 듯 손을 확 돌렸다. 무릎을 꿇었다. 벨트를 풀었다. 바지를 끌어내렸다. 잭을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이미 나온 투명한 윤활액과 약간의 침의 도움으로 잭에게 삽입했다.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으나 설명서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둘이 행위는 침묵 속에서 계속됐다.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오로지 거친 들숨 소리와 잭의 “쌀 것 같아.”하는 갈라진 소리뿐, 그리고 사정했고, 쓰러졌고, 잠들었다. (P325)
8월 13일, 첫눈이 일찌감치 내려 삼십 센티미터가 쌓이더니 금방 녹아버렸다. 그 다음주에 조 아귀레가 태평양에서 더 큰 폭풍이 또 오고 있으니 내려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들은 모두 다 접고서 양 떼와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돌멩이가 굴러 떨어져 신발 뒤축에 부딪혀댔고, 서쪽에서 몰려드는 진홍빛 구름과 눈을 예고하는 쇳내는 두 사람을 짓눌렀다. 산은 악마 같은 기운으로 들끓다가 구름 틈새에서 명멸하는 빛으로 흐릿해졌고, 바람은 풀을 누이고 상처 입은 크롬홀츠와 깨진 바위틈에서 불어나오며 흉포하게 윙윙거렸다. 내려오면서 에니스는 자신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듯한, 그러면서도 되돌릴 수 없이 곤두박이치는 기분이 들었다. (P327)
“내년 여름에도 할 거야?” 잭이 자기 녹색 픽업에 한쪽 다리를 올린 채 에니스에게 물었다. 바람이 갑자기 차갑고 세게 불었다.
“아마 안 할 거다.” 흙먼지가 일어 주위가 뿌옇게 흐려지자 에니스는 먼지를 피해 눈을 가늘게 떴다. “말했지만, 십이월에 알마랑 결혼해. 어디 목장에서 일을 구해야지, 넌?” 그는 잭의 턱에서 시선을 피했다. 전날 자기가 주먹을 세게 날리는 바람에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더 좋은 일이 없으면, 뭐. 아버지 집에 갈까도 생각 중이야. 겨울에 아버지를 돕고 봄에 텍사스로 갈지도 모르겠다. 징집되지 않으면 말이지.”
“그러면, 언제 또 보겠지.” 길 위쪽에서 빈 사료 봉지가 바람에 굴러오다가 잭의 트럭 아래에서 멈췄다.
“그래.” 둘은 악수를 하고 서로 어깨를 툭 쳤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십 미터로 멀어졌고 반대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일 킬로미터도 채 못 가 에니스는 누군가가 내장을 손으로 한 번에 일 미터씩 끄집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는 길 옆에 멈춰 섰다. 눈송이가 소용돌이치는 속에 토하려 들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태 이렇게 기분이 더러웠던 적은 없었고, 다시 기운을 차리기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P327-328)
십이월에 에니스는 알마 비어스와 결혼했고 일월 중순에 알마가 임신을 했다. 그는 임시 목장 일 몇 가지를 고른 뒤, 워셔키 카운티에 있는 로스트 캐빈 북쪽의 오래된 목장 엘우드 하이탑에 카우보이로 취직했다. 구월, 딸 알마 주니어가 태어났을 때도 여전히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부부 침실이 산혈과 우유와 아기 똥 냄새로 가득 찼고, 들리는 것이라곤 보채고 젖 빠는 소리, 졸린다고 투덜대는 알마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가축과 함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생식력과 삶의 연속성을 확인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P328)
브로크백 산에서 보낸 이후 네 번째 여름이 다가왔고, 그해 6월 에니스는 잭 트위스트로부터 처음으로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치 우편 한 통을 받았다.
‘친구, 편지 아주 오래갓만이지. 제대로 가면 좋겠다. 리버톤에 있다고 들었다. 24일 그쪽에 지나가는데 들러서 맥주 한잔 할까 시프다. 할 수 있으면 편지 한 줄 써서 거기 사는지 알려주라.’
외신지는 텍사스 차일드리스였다. 에니스는 ‘물론’이라고 쓴 답장을 보내 리버톤의 주소를 알렸다. (P329-330)
“염병할, 아니지.” 잭은 황소보다 사람에게 더 많이 올라탔으나 자위는 하지 않았다. “알아? 옛날 브로크백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줬고, 그건 끝나선 안 된다는 걸.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건지 해결책을 찾아야 돼.”
에니스가 말했다. “그해 여름, 우리가 돈을 받고 헤어질 때 복통이 너무 심해서 길옆으로 가 토하려고 했어. 뒤부아에서 먹은 게 잘못된 줄 알았거든. 일 년 뒤에야 깨달았지. 널 볼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걸 알았을 때는 한참, 아주 한참 지난 뒤였어. 너무 늦어버린 거지.”
잭이 말했다. “친구, 우리 지금 아주 좆같은 상황이야.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야 해.”
에니스가 말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잭, 내가 하려는 말은 말이지, 난 그동안 내 인생을 꾸려왔어. 딸들도 사랑해. 알마? 알마는 잘못 없어. 너도 애랑 마누라가 있잖아, 텍사스에.” 그는 아파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벌려놓은 일들이 우리를 이렇게 붙잡고 있는 한 너랑 나는 함께 잘 지낼 수 없어. 자칫 엉뚱한 곳에서 했다가는 우린 죽는 거야. 이런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구. 난 그게 너무 무서워.” (P334-335)
“와이오밍에서는 일어나지 않아. 그리고 일어난다 해도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나도 몰라. 아마 덴버로 가겠지.” 잭이 일어나 앉으며 에니스에게서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빈말로 개소리는 안 해. 에니스, 이 개자식아, 이틀만 일 때려치워, 지금 당장. 여길 뜨자. 네 짐을 내 트럭 뒤에 넣고 산에 올라가는 거야. 이틀만, 알마한테 전화해서 간다 그래. 얼른, 에니스, 네가 내 계획을 박살냈으니까 대신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나한테도 뭔가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별 거 아닌 걸로 보지 마.” (P337)
알마의 적의는 매년 조금씩 드러났다. 홀낏 보았던 그 포옹, 처자식과는 휴가 한 번 가지 않으면서 잭 트위스트와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가는 낚시 여행, 바깥에 놀러 나가기도 꺼리는 것, 급료도 낮고 일하는 시간도 긴 목장 일에 대한 집착, 벽을 향해 돌아눕고 침대에 눕자마자 자는 성향, 관청이나 전기회사에서 쓸 만한 영구직을 찾지 못하는 것,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알마는 서서히 깊은 나락에 빠졌다. 그리고 알마 주니어가 아홉 살, 프랜신이 일곱 살일 때 내가 왜 이사람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 하며 에니스와 이혼한 뒤 리버톤 식료품점 주인과 결혼했다. (P338)
그들의 진실과 거짓말이 불꽃과 함께 피어오르며 손과 얼굴에 내려앉았고, 그런 게 처음도 아니었다. 둘은 흙바닥 위에서 굴렀다. 한 가지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씩 함께할 뿐인데도 쏜살같은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 훙분이 너무도 눈부시다는 것. 시간은 늘 부족했다. 늘.
하루인지 이틀인지 뒤, 등산로 기점 주차장에서 말들을 트레일러에 부린 뒤 에니스는 시그널로, 잭은 라이트닝 플랫의 아버지 집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에니스는 잭의 차창에 기대어 그 주 내내 미루고 있던 말, 가축들을 실어 보낸 뒤 겨울 사육이 시작되기 전인 11월까지는 다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P344)
그들은 불 앞에서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은 붉은빛을 흔들며 둘의 그림자를 하나의 기둥으로 바위에 드리웠다.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것은 에니스의 주머니에 있는 회중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와 숯으로 변해가는 장작의 탁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모닥불 위에서 아른대는 아지랑이 사이로 별이 반짝였다. 에니스의 숨결이 느리고 고요하게 와 닿았다. 에니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몸을 흔들었고, 잭은 고른 심장박동, 희미한 전류 같은 콧노래의 진동에 기대서서 잠 아닌 잠에, 나른하고 꿈결 같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어머니가 죽기 전인 어린 시절에 들었던, 오래되었지만 아직 쓸 만한 말을 기억에서 캐낸 에니스가 “카우보이, 코 잘 시간이야. 난 가야 해. 자 어서, 말처럼 서서 자고 있네.”라고 말하며 잭을 한번 흔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에니스가 말에 올라탈 때 박차가 흔들이는 소리, ‘내일 봐’라는 말, 말이 몸을 털며 히힝거리는 소리, 돌에 구르는 말발굽 소리가 잭의 귀에 들려왔다. (P347)
여전히 십일월이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잭에게 쓴 엽서가 ‘수취인 사망’이라는 소인이 찍혀 반송되어 오기 전까지 몇 달 동안 에니스는 사고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알마와 이혼했을 때 걸었다가 잭이 전화한 이유를 달리 이해하고 이천 킬로미터를 헛되이 달려왔던 단 한 번의 전화 이후 처음으로, 에니스는 차이드리스의 잭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잭이 전화를 받겠지. 받아야해.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누구세요? 누구신가요? 루린이 받았다. 에니스가 재차 이름을 밝히자 그녀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타이어에 바람이 빠져 길옆에 트럭을 세우고 바람을 넣고 있었대요. 무엇 때문인지 타이어를 림에 고정시키는 부분에 이상이 생겨 타이어가 터졌는데 그때 림이 얼굴을 강타하면서 코와 턱이 으스러지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나 봐요. 누군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기 피에 질식해 죽은 뒤였죠.
이럴 수가, 사람들이 타이어 레버로 죽였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이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낚시 친구인가 사냥 친구인가 맞죠? 알고 있어요. 알려드리는 게 도리인데, 성함과 주소를 알 수 없어서요. 그이는 친구들 주소를 대부분 따로 적어놓지 않았거든요. 끔찍한 일이죠. 겨우 서른아홉이었는데.” (P348)
셔츠가 어쩐지 묵직했다. 그때 에니스는 잭의 셔츠 안에 셔츠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았다. 잭의 소매 안에 조심스레 끼워져 있던 또 다른 소매는 에니스의 체크무늬 셔츠였다. 오래전에 빌어먹을 어느 세탁소에서 잃어버렸겠거니 생각했던, 주머니는 뜯겨나가고 단추는 떨어진 더러운 셔츠, 잭의 셔츠와 그가 몰래 가져가 여기 그 셔츠 안에 숨겨둔 에니스의 셔츠가 두 겹의 피부처럼 한 쌍으로, 한 셔츠가 다른 셔츠 속에 안긴 채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옷에 얼굴을 누르고 입과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연기와 산 깨꽃과 잭의 땀 냄새를 기대했으나, 잔존하는 냄새는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 기억, 이제 손에 들고 있는 것말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마음속의 브로크백 산뿐이었다. (P353)
그즈음, 잭이 그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수머리, 웃으면 드러나는 뻐드렁니, 뒷돈 주고 통제구역에 들어가는 얘기를 하던 모습은 잭을 처음 만난 그대로였으나, 수저 손잡이 부분이 불쑥 튀어나온 채 장작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콩 통조림만큼은 음란 만화의 그림처럼 요란한 색깔로 두드러져 보였다. 숟가락 손잡이는 타이어 레버일 수도 있었다. 에니스는 때로는 비탄에 잠겨, 때로는 환희와 사정(射精)의 옛 감각에 휩싸여 깼고, 그래서 때로는 베개가 젖고, 때로는 시트가 젖었다.
그가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