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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9. 2024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렛미인>

영화 <렛미인>  2015년

영화 <렛미인>(2008), <렛미인>(2010)   

  

소설 '렛미인'의 원작자 욘 A. 린드크비스트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배경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뱀파이어 소설을 집필했다. 그가 이 책을 출판하려고 했을 때 소설 속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는 이유로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 당하는 '굴욕'을 경험했다.     

[1]

블라케베리.

그 이름을 들으면, 당신의 머릿속엔 코코넛가루를 뿌린 초콜릿볼이나 약물 같은 게 떠오를지도 모른다. 이른바 ‘품위 있는 삶’, 지하철역과 교외의 풍경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다른 곳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곳에도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다. 그 때문에 그곳이 생겨난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살 터전을 갖게 된다.

물론 블라케베리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곳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모든 것은 착수단계부터 면밀히 계획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한 곳으로 이주해왔다. 푸른 들판에 흙빛 콘크리트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곳.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블라케베리라는 교외지역이 존재한 지는 삼십 년째였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개척자 정신이 깃든 곳쯤으로 상상할 수도 있으리라. 미지의 땅을 향하는 메이플라워 호. 그렇다.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모든 텅 빈 건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기, 그들이 오고 있다!                (P13-14)  

   

학교를 떠난 후 누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알리스 텡네르였나? 좋은 노래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음을. 이제는 아무도 노래하지 않게 되었음을 생각하라. 마찬가지로, 좋았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음을 생각하라.

아름다움에 대한 존중의 말소. 그것이 오늘날 이 사회의 특징이었다. 위대한 장인들의 작품은 기껏해야 비꼬는 데 동원되거나 광고에 쓰일 뿐이었다. 미켈렌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이제 보이는 건, 불꽃이 튀는 자리를 차지한 청바지였다. 그 작품의 핵심은 (최소한 그가 보기에는) 서로의 집게손가락만 맞닿을 듯, 그러나 실은 닿지 않은 채 있는 전대미문의 두 육체였다. 그들 사이에 1밀리미터 남짓한 공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생명이 있었다. 작품의 조소적 크기와 풍성한 세부묘사는 그저 구도이자 배경막으로, 중심에 위치한 결정적 여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어 있는 그 공간에야말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런 자리를 누군가 청바지로 덮어버린 것이다. 

누군가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가운데 호칸은 쭈그리고 앉았다.                  (P37)     


“그럼 학교도 가지 말라고?”

“당연히 학교는 가야지. 하지만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오고,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면 안 돼.”

“너무해.”

엄마의 눈에 비친 고통에 분노가 더해졌다. 

“살해당하고 싶은 거니, 뭐니? 네가 숲에 갔다가 죽어버리면, 네가 숲속에 뻗어 있는 동안 엄마는 여기 앉아 걱정이나 하고 있고..... 내 아들이 짐승 만도 못한 놈의 손에 난도질 당하고 있는데.....”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오스카르는 엄마의 손을 감쌌다. 

“숲에 안 갈게, 엄마. 약속할게.”

엄마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 새끼, 엄마한텐 너밖에 없어. 너한테는 어떤 일도 일어나선 안 돼. 그랬다간 이 엄마도 죽어버릴 거야.”

“음, 근데 그 사람 정확히 어떻게 한 거야?”

“무슨 소리니?”

“그거. 살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웬 미친놈이 칼로 남자애를 찔렀단다. 애는 죽고, 그 아이 부모는 이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지.”

“신문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아?”

“차마 읽어볼 엄두도 안 나더라.”                     (P51)    

 

오스카르가 한 게임이 어떤 식으로든 그 살인을 조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가 읽은 책들은 온통 그런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한 장소에서 생각한 것이 다른 장소에서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것.

염력. 부두교.

그러나 정확히 어디서, 언제, 아니 무엇보다 어떤 식으로 살인을 저지른 걸까? 만약 쓰러진 몸뚱이가 칼자국투성이라면, 오스카르는 자신의 손이 가공할 능력을 갖추었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능력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터였다. 

아니면 혹시...... 그 ‘나무’ 때문일까..... 그게 연결고리인 거야.

그가 베어버린 썩은 나뭇가지. 거기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나무에 대고 무슨 짓을 했건 그 기운이..... 멀리 퍼져나간 걸지도 몰랐다.                (P53)  

   

오스카르는 멈춰 서서 칼을 칼집에 넣은 후 도로 재킷 안에 넣었다. 

“안녕.”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오스카르는 소녀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검은 머리칼, 작은 얼굴, 큰 눈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하얀 손은 철봉을 잡고 있었다. 

“안녕이라고 했는데.”

“들었어.”

“왜 대답 안 해?”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소녀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오스카르 또래의 목소리 같았다. 

소녀는 어딘지 이상했다.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 동그란 얼굴, 작은 코, <헴메츠 슈날> 어린이 페이지에 들어 있는 종이인형 같았다. 정말..... 예뻤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소녀는 모자도 쓰지 않았고 재킷도 걸치지 않았다. 모질게 추운 날씨에 얇은 분홍색 스웨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P63)  

   

오스카르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오직 두 개의 구멍과, 사라져버리는 한 번의 숨결만이 존재했다. 그들의 호흡이 뒤섞여 솟아올랐다 훝어졌다. 

“나한테 선물 주고 싶니?”

“응.”

그의 목소리는 속삭임이라고도 하기 힘들었다. 숨을 내쉬며 새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소녀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버터나이프 단면 같은 소녀의 뺨에 가 닿았다. 

그래서 그는 소녀의 눈이 변하는 것을, 눈초리가 가느다래지며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소녀의 윗입술이 올라가며 작고 칙칙한 흰색 송곳니 두 개가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만 그는 소녀의 뺨을 응시했고, 소녀가 그의 목에 입을 갖다대려는 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일순 몸이 굳더니 뒤로 물러섰다. 소녀의 눈은 아까 전의 모습을 되찾았고, 도시의 불빛도 다시 들어섰다. 

“왜 그런 거야?”

“미안해, 내가......”

“뭐 한 거야?”

“나는.......”

오스카르는 여전히 큐브를 쥐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리고는 손의 힘을 풀었다.        (P114)     

새로운 인생, 목하 계획중인 새 출발의 환상을 만끽하며 식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던 그는 문득 목에 통증을 느꼈다. 아 씨팔, 뭐야 이거? 벌에 쏘였나 싶어 그는 왼손으로 벌을 쫓아버리고 목을 만져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어리석게도 그는 고개를 돌려 목을 보려고 했다. 당연히 그 각도에서 자기 목을 본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소녀가 아래턱을 그의 목 위쪽에 눌러대고 있어서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목에 두른 소녀의 팔에 점점 힘이 가해지자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제야 그는 사태를 파악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소녀의 턱이 그의 턱과 목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목의 통증은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 따뜻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며 그의 가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만 해!”

요케는 소녀를 떼어버리려고 했다. 의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내 목에서 떼어버려야 한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사신경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찰거머리처럼 그의 목을 팔로 휘감고 --맙소사, 이 작은 소녀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두 다리로 그의 둔부를 감고 조였다. 

네 개의 팔다리가 인형을 휘감듯 그의 몸을 조이며 매달렸고, 그동안 그녀의 턱은 예의 그 상하운동을 계속했다. 

요케는 그녀의 머리를 붙잡아 자기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맨손으로 자작나무에서 뻗어나온 싱싱한 가지를 뜯어내려는 꼴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접착제로 붙인 듯 그의 몸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조이는 힘은 또 어찌나 센지, 폐가 눌려 절로 숨을 토해냈지만 다시 들이마실 수가 없었다. 

그는 산소 부족으로 비틀대며 뒷걸음질했다.               (P122-123)    

       

오스카르는 불을 켜고 방공호를 향해 걸어갔다. 만약 러시아인들이 쳐들어오면 자물쇠를 열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열쇠를 잃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오스카르는 거대한 철문 앞에 서서 문득 생각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누군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슬과 자물쇠까지 동원된 것이다. 괴물을 가둬놓으려고.

오스카르는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 거리에서, 아파트 위층에서 사람들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정말로 지하실이 좋았다. 원하면 언제든 올라갈 수 있는 세계가 저 위에 있음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 이곳 아래는 고요했고,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방공호 건너편은 클럽하우스였다. 금기의 장소.                  (P157)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의 상처를 쓰다듬었고,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피부 아래로 다른 누군가가, 훨씬 더 나이 먹고 강건해 보이는 사람이 보였다. 오스카르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배어물었을 때처럼 등줄기가 오싹하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스카르, 걔들이 그런 짓 하게 놔두지 마. 내 말 알아들어? 못 하게 하라고.”

“...... 안 돼.”

“맞받아쳐. 그런 적 한 번도 없지. 안 그래?”

“없어.”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해. 너도 맞받아쳐. 세게.”

“세 명이나 되는데.”

“그럼 더 세게 때려야겠네. 무기를 써.”

“그래.”

“돌, 작대기, 진짜 각오한 것보다 더 세게 때리는 거야. 그래야 걔들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

“그래도 계속 때리면?”

“너 칼 있잖아.”

오스카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엘리의 손을 잡고 그녀와 마주 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대들어서 그들이 더 못살게 군다면, 만약 그들이....

“그래, 하지만 만약에 걔들이......”

“그땐 내가 도와줄게.”

“네가? 하지만 넌......”

“나 할 수 있어. 오스카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엘리는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도 화답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엘 리가 더 꽉 잡았고, 그 힘이 너무 세서 약간 아플 정도였다. 

정말 힘이 세네.                  (P168-169)   

  

문과 벽 사이의 틈새로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마테는 몸을 돌렸다. 머리에 스키마스크를 쓴 거대하고 허연 알몸뚱이가 자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소년의 몸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기 전에 오직 하나의 생각, 단 한 마디의 말이 쏜살같이 그의 의식을 훑고 지나갔다.

죽음.

자신을 낚아채가려는 죽음 앞에서 소년은 뒷걸음치고 있었다. 죽음은 한 손에 검은 물체를 들고 있었다. 그 검은 물체가 허공을 날아 얼굴로 향하자 소년은 비명을 지르려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미처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검은 물체가 그를, 그의 입을, 그의 코를 덮쳤다. 한 손이 그의 뒤통수를 부여잡더니 그의 얼굴을 검고 부드러운 재질의 무언가로 덮었다. 숨이 막혀 비명은 코를 훌쩍이며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었고, 그런 와중에 소년은 토막토막 잘린 목울음이나 겨우 질러댈 수 있을 뿐이었다. 연기를 뿜어내는 기계에서 나는 듯한 쉿쉿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다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숨을 들이켜자 몸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느껴졌다. 사지가 마비되면서, 다시 비명을 질러봐도 새된 신음만 새어나올 뿐이었다. 또 한번 숨을 들이마시자 다리의 힘이 풀리고, 눈앞으로 색색의 베일들이 나부꼈다. 

더는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베일은 이제 온 시야를 뒤덮었다. 이제 그에게는 육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색색이 아롱졌다. 그는 무지개 속으로 녹아들었다.          (P189-190) 

    

스타판은 흘름베리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신호한 후, 몸뚱이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 말 들려요?”

갑자기 남자가 소리를 뚝 그쳤다. 그리고 남자의 온몸이 발작적으로 요동치더니 뒤집혔다. 

이 사람 얼굴이.

스타판은 뒤로 펄쩍 뛰다 균형을 잃는 바람에 꼬리뼈로 바닥을 찧으며 주저앉았다. 엉덩이 전체로 퍼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얼굴이 없잖아.

스타판은 환각중에 자신의 얼굴을 벽에 수십 번 짓찧은 마약중독자를 본 적이 있었다. 가스탱크를 비우지 않고 바로 옆에서 용접 작업을 한 남자를 본 적도 있었다. 탱크는 남자의 눈앞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그때도 이만큼은 아니었다. 

남자의 코는 완전히 타서 없어졌고, 두부(頭部)에 뚫린 두 개의 구멍만 남아 있었다. 입술은 한쪽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만 남긴 채 녹아 맞붙어버렸다. 한쪽 눈은 뺨이었던 곳 위로 녹아내렸지만 다른 쪽 눈은......  부릅뜨고 있었다. 

스타판은 그 눈, 곤죽이 되어버린 덩어리에서 아직 인간이라고 인식될 만한 그 유일한 것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시뻘겠고, 깜빡이려 할때마다 실낱같은 살쪼가리만 위아래로 팔락거렸다.         (P230-231)     

얼굴 전체에 강렬한 열기가 느껴졌다. 공포가 쏜살같이 배 속을 뚫고 지나갔다. 그의 얼굴을 뜨뜻하고 딱딱해져가는 물질에 뒤덮여 있었다. 파라핀 왁스. 얼굴이 왁스에 뒤덮인 채 그는 기계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었다.

생각의 가지가 오른손에 미쳤다. 그래, 그건 거기 있었다. 손을 벌렸다가 주먹을 쥐니 손끝이 손바닥에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촉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안도의 한숨을 상상했다. 그의 가슴은 이제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호칸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가슴과 어깨 쪽이 당기는 느낌이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손은 형체가 불분명한 혹 덩어리였다. 그는 손을 얼굴 가까이 들이대다 멈췄다. 옆에서 낮게 삑 소리가 났다. 가만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턱에 날카롭게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손을 턱 쪽으로 가져갔다. 

목에 금속 소켓이 심겨 있었고, 그 소켓에는 플라스틱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튜브를 따라 손을 뻗을 수 있는 데까지 뻗어내려가보니 끝부분에 홈이 팬 금속조각이 만져졌다. 그는 깨달았다. 죽고 싶다면 이것을 뽑아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위해 설치된 것이었다. 그는 튜브 끝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엘리. 수영장, 남자애. 염산.                 (P269)


문이 다시 열리더니, 예의 그 빨아들이는 듯한 생경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경찰이 침대 옆에 와 앉았다. 

“다시 왔습니다. 또다른 사체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블라카비리 호수 밑에서. 아무리 봐도 똑같은 밧줄이더군요.”

안 돼!

경찰이 블라케베리라는 말을 하자 호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나보군요. 잘됐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서쪽 교외지역에 산다고 봐도 되겠군요. 어디죠? 록스타? 벨링뷔? 블라케베리?”

병원 부근에서 남자의 시체를 처리했던 과정이 쏜살같이 호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그는 대충 넘어갔다. 일을 잡쳐버린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있을 시간을 주겠습니다. 협조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협조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죠?”

경찰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떠난 자리를 간호사가 대신해 계속 감시했다. 

호칸은 거부의 뜻으로 고개를 좌우로 홱홱 흔들어 보였다. 손을 뻗어 인공호흡장치에 달린 튜브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튀어오르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그의 손을 잡아 내뿌렸다. 

“이러면 꽁꽁 묶어버릴 수밖에 없어요. 한 번만 더 이러면 몸을 꽁꽁 묶겠다고요. 알았어요? 살기 싫은 건 댁 사정이지만, 여기 있는 한 댁을 살려두는 게 우리의 의무예요. 댁이 무슨 짓을 했건 안 했건 간에. 알아들었어요? 그리고 설령 댁에게 구속을 가하는 것이라 해도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거예요. 내 말 알아들어요? 모쪼록 협조하는 쪽이 신상에 좋을 거예요.”

협조. 협조. 갑자기 다들 협조하라고 난리로군. 난 이제 인간도 아니야. 냐ᅟ간 프로젝트가 돼버렸어. 이런, 맙소사, 엘리, 엘리, 도와줘.                  (P306-307)    

 

“하지 마. 오스카르......”

“왜 그래?”

“오스카르, 안 돼.”

“정말 하나도 안 아파.”

엘리는 뒷걸음치다 멈췄고, 계속 도리질을 하면서도 그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스카르는 다른 손으로는 칼날을 잡고 그녀 쪽으로 칼자루를 내밀었다. 

“손가락이나 다른 데 대고 따끔하게 찌르기만 하면 돼. 그런 다음 서로 피를 섞는 거야. 그럼 우린 서약을 맺은 사이가 돼.”

엘리는 칼을 받지 않았다. 오스카르는 칼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처에서 흘러떨어지는 핏방울을 받으려고 했다. 

“이리 와, 왜, 싫어?”

“오스카르...... 우린 하면 안 돼. 넌 전염될 거야. 넌......”

“그런 거하곤 느낌이 다르다니까, 이건.......”

그때 유령이 엘리의 얼굴로 날아들더니, 그녀를 그가 알고 있던 소녀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틀어놓았다. 그 결에 오스카르는 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을 생각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엘리는 좀전에 그들이 놀던 놀이에서 그녀가 흉내내던 괴물처럼 보였다. 오스카르는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나다 주저앉았다. 손의 통증이 심해졌다. 

“엘리, 뭐야.......”

엘리는 윗몸을 일으키더니 두 다리를 아래로 끌어당겨 네발짐승처럼 웅크렸고, 피가 흐르는 오스카르의 손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멈칫하더니, 그녀가 이를 악다물고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가!”                       (P327)     


어느 날 저녁 호칸이 반쯤 발효된 와인이 든 병을 비닐봉지에 넣어 들고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있는데, 엘 리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거나하게 취해 있던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엘리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엘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고,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자기 쪽으로 돌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부터 나와 함께하는 거야.”

호칸은 눈앞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존재에게 돈을 줄 여력이 없다고, 하지만 사정이 허락하게 된다면..... 하고 주절거렸다. 

엘리는 제 허벅지에서 그의 손을 거두더니, 몸을 기울여 그의 와인병을 뺏어 땅에 쏟아붓고는 말했다. “못 알아듣네. 당신 이제부터 술을 끊는 거야. 나와 함께 살 거라고. 날 돕게 될 거야. 난 당신이 필요해. 나도 당신을 도울 거고.” 그렇게 말하고 엘리는 손을 내밀었고, 호칸은 그 손을 잡았고, 그렇게 그들은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는 술을 끊었고 엘리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 

엘리는 그에게 옷을 사고 다시 집을 얻을 수 있는 돈을 주었다. 그는 엘 리가 ‘악’인지 ‘선’인지, 혹은 다른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엘리는 아름다웠고, 엘리는 그에게 자존감을 되찾아 주었다. 그리고 극히 드물게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P331) 

    

사람을 가슴에 품으면 상처를 입게 되는 법.

비르기니아가 관계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가슴에 품지 마. 그들이 들어오면 상처받을 일도 많아져. 너 자신 외에 너를 위로해줄 사람은 없어. 너 자신만의 문제라면 고통스러워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야. 희망을 품지 않는 한 괜찮을 거야.

그러나 라케와 함께하면서 그녀는 희망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가 서서히 싹틀 거라고. 그래서 마침내는, 언젠가는, 무엇이? 그는 그녀가 주는 음식과 온정을 받아들였지만, 사실 그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르기니아는 슬픔에 겨워 몸을 움츠리고 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의 등은 잔뜩 굽어 있어 악마가 들어붙어 사악한 말을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그러지 마. 그 어떤 것도 허락해선 안 돼.

그 순간, 비르기니아가 악마의 모습을 막 상상하는 순간, 정말로 악마가 그녀 위에 내려앉았다. 

육중한 무언가가 그녀의 등을 덮쳐누르자, 그녀는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뺨에 눈(눈)이 닿았고, 뺨을 적시던 눈물은 얼음 막으로 변해버렸다. 여전히 무언가 내리누르고 있었다. 

잠시였지만 그녀는 슬픔의 악령이 육신을 빌려 자신을 내리덮쳤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리고 목덜미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날카로운 이빨이 살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다시 두 발로 섰고, 제자리를 빙빙 돌며 몸에 들러붙은 것을 떼어내려고 했다.          (P338-339)    

 

걘 뭐가 문제인 걸까?  

지하실에서 빈병들을 한데 모으고 쓰레기 더미에서 주운 천 쪼가리로 핏자국을 닦아 없애면서도 그는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엘리는 뱀파이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다. 

그녀가 낮에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도.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는 것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그녀의 말투, 루빅스 큐브, 유연한 몸놀림. 물론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진 그의 피를 핥아먹던 모습을, 그녀가 이렇게 말했을 때를 떠올리노라면 정말이지 몸서리가 쳐졌다. 

“나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엘리는 오스카르의 방에 들어가려면, 그의 침대로 다가서려면 초대를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초대해 안으로 들였다. 뱀파이어.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존재. 오스카르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P346-347)

[2]

눈송이가 눈으로 들어가 그는 눈꺼풀을 깜박였다. 지붕 위의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두 팔을 활짝 펴더니 머리 위로 쳐들었다. 팔과 몸 사이에 물갈퀴 같은...... 얇은 막이 달려 있었다. 노인은 기사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차 밖으로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섰다. 

노인의 어깨가 기사의 어깨에 닿는 바로 그 순간. 그 자그마한 사람...... 아이는....... 추락했다. 그는 다시금 손바닥을 파고드는 노인의 손가락을 느꼈다. 아이는 그들 위로 곧장 뛰어내렸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고개를 숙였고, 두 팔을 모아 머리를 가렸다. 

잠잠했다. 

그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가로등 붋빛 속에서 흩날리는 눈발뿐이었다. 노인이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죽음의 천사였어. 죽음의 천사. 살아서 여길 나오긴 다 틀렸구먼.”          (P32)  

   

“너 뱀파이어니?”

그녀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 피를 먹고 살긴 하지만..... 그건 아니야.”

“무슨 차이가 있는데?”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다소 힘주어 말했다.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

오스카르는 엘 리가 발가락에 힘을 줬다. 풀었다 다시 힘주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맨다리는 앙상했고, 티셔츠 밑으로 흰 팬티의 끝자락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다면 너..... 죽은 사람 같은 거야?”

엘리는 그가 온 후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네 눈엔 그렇게 보여?”

“아니, 그게...... 내 말뜻은...... 전에...... 한 번 죽은 거냐고. 아주 오래전에 말야.”

“아니, 근데 정말 오래 살긴 했어.”

“나이가 많아?”

“아니, 열두 살이야. 열두 살로 오래 산 거야.”                   (P42-43)     

전염체.

물론 진짜 두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지각력으로 알 수 있었다. 임신 후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화면으로 자신의 배 속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했다. 다만 이건 태아가 아니라 몸부림치는 커다란 뱀이었다. 내 몸에 이런 걸 품고 있다니.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그 전염체가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기 고유의 생명, 자기 고유의 힘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설령 그녀가 죽더라도 전염체는 계속 살아나갈 것이다. 어미가 될 사람은 초음파 검사 중에 쇼크사할 수도 있지만, 뱀이 대신 몸을 관장하게 될 테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자살한다고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P81)  

   

경찰은 일요일 저녁에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경찰서 내부의 마흔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을 골랐지만 곧 너무 협소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유럽 각지의 신문사와 티브이 방송국들에서 기자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그날 안에 용의자를 다시 검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뉴스는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 모든 상황이 이토록 관심을 끄는 이유에 대해 가장 그럴싸한 분석을 제시했다. 

“전형적인 ‘괴물’을 찾고 있는 겁니다. 용의자의 생김새와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괴물’, 모든 동화에서 볼 수 있는 골수까지 철저한 악(惡)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놈을 잡을 때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주장하고 싶어하죠.”               (P145)     


쓱싹.

톰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뺐다가 숨을 몰아쉬며 다른 손으로 지폐뭉치를 꽉 움켜쥐었다. 윗니와 아랫니를 악다물며 갈아대자 머릿속에서 빠지직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는 줄기를 이루며 흘러나오더니, 울컥울컥 솟아나왔다. 

면도날이 바닥으로 떨어져 팅 소리가 났고, 소녀는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부여잡더니 팔뚝 안쪽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톰미는 고개를 돌렸다. 오로지 그녀의 따뜻한 입술과 그의 살을 핥는 혀만 느껴지는 가운데, 다시금 머릿속의 그 도표와 피가 흐르는 경로들의 눈앞에 떠올랐다. 피는 그..... 열린 곳을 향해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한테서 뻐져나가고 있어. 

그랬다.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팔에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입술은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강력하게 빨리는 느낌. 그의 몸에서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 피가.....

흘러흘러 사라져버리는 느낌만이 존재했다. 

더럭 겁이 났다. 그만 끝내고 싶었다. 너무 아팠다. 눈물이 솟아올랐고, 톰미는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이 상황을 어찌해볼 수는...... 그는 다른 쪽 팔을 들어 곽 움켜쥔 주먹을 입에 쑤셔넣었다.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온 지폐가 입 안에 닿았다. 그것을 꽉 물었다.              (P194-195)     

오스카르는 얼굴을 베개에 묻은 채 숨을 쉬었고, 그러자 코와 입과 입술이 따뜻하고 촉촉해졌다.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얘기해야 했다. 베개에 대고 그는 말했다. “나전염.....”

“뭐라고 했니?”

“나 전염됐어요.”

엄마의 손이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다 목으로 내려왔고, 그렇게 계속 내려오던 손이 담요를 살짝 들췄다. 

“뭐가 어떻게 전염이..... 아니 옷을 전부 입고 있잖니!”

“어, 내가......”

“어디 좀 보자. 열나니?” 엄마는 차가운 뺨을 그의 이마에 가져다댔다. “열이 있네. 일어나봐. 옷 벗고 제대로 자여지.” 엄마는 일어서서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흔들었다. “자, 일어나.”

엄마의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한 것이다. 엄마의 말투가 사뭇 달라졌다. 

“아빠네 있을 때 따뜻하게 챙겨입지 않았구나?”

“잘 챙겨입었어요. 그래서가 아니야.”

“모자도 쓰고 있었어?”

“응,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오스카르는 다시 얼굴을 묻고 베개를 움켜쥐며 말했다. 

“.......나밤파이어가되꺼야......”

“오스카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나 뱀파이어가 될 거라고!”                    (P196-197)   

  

“하느님, 하느님? 전 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거죠? 왜 저는......”

전부터 수없이 거듭해왔다. 이 질문을.

왜 저는 살면 안 되는 건가요?

왜냐하면 넌 죽어야 하거든.

딱 한 번. 전염되고 난 후 엘리는 다른 전염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성인 여자였다. 가발 쓴 남자 못지않게 냉소적이고 내면이 공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리는 그녀에게서 당시 자신을 괴롭히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존재가 많나요?”

여자는 고개를 젓더니 연극적인 말투로 슬퍼하며 대답했다. 

“아니. 우린 정말 희귀한 존재야. 진짜 희귀해.”

“왜죠?”

“왜냐고?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까. 바로 그 때문이야. 너도 그건 알아야 해. 정말 무거운 짐이야. 아아, 정녕......” 그녀는 손을 파르르 떨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오오. 내 양심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건 도저히 감당 못 해요.”

“우리가 죽을 수도 있나요?”

“물론 죽을 수 있지. 그냥 몸에 불을 지르면 끝이야. 다른 사람들을 시키던가. 아마 기쁨에 겨워하며 해줄걸. 수세기 동안 해온 짓거리니까. 아니면......”                (P214)    

 

그는 라이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어쨌거나 불을 끄고 싶지 않았다. 이런 놈과 함께 어둠 속에 남겨지고 싶지 않았......

움직임.

괴물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톰미는 어떤 중요한 것. 자기 자신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그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코끼리가 작디작은 거미줄을 타고 있어요!

거미줄이 끊어졌다. 코끼리가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톰미는 다시 후려쳤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그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P244)    

 

그가 발끝을 들고 투명한 유리를 끼운 창문 밖을 내다보니 어린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들어와’라고 말해!”

“뭐...... 뭐?”

미케는 고개를 돌려 수영장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오스카르의 몸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지만 임미는 여전히 가장자리에서 몸을 수그린 채 오스카르의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미케는 침을 삼켰고, 목이 아팠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지금 당장 멈춰야 돼.

유리문이 또 한번. 아까보다 더 세게 쾅 울렸다. 미케는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소녀가 입을 벌리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을 때 그는 보았다...... 그녀의 이빨을...... 그녀의 팔에 매달려 있는 무언가를.

“들어와도 된다고 말해!”

무슨 일이든 일어나라지.

미케는 고개를 끄덕이고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게 말했다. 

“들어와도 돼......”

소녀는 문에서 물러서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팔에 매달려 있던 것이 한순간 희미한 빛을 발하는가 싶었지만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미케는 몸을 돌려 수영장 쪽을 보았다. 좀전에 임미가 오스카르의 머리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고, 욘니한테서 송곳칼을 다시 받아들고는 오스카르의 얼굴 가까이 겨누고 있었다. 

그때 가운데에 위치한 어두운 창문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하더니, 순식간에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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