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의 열쇠> 2011년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사라의 열쇠>는 2차 대전 중 일어났던 ‘벨디브 사건’을 소재로 역사적 비극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파리 경찰들이 파리와 근교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자전거 경주장 <벨로드롬 디베르>에 모았다가 아우슈비츠로 압송하여 모두 몰살된 사건이다. 영화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질스 파켓 브레너가 감독하고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와 멜루 신 메이얀스가 주연을 맡아 제23회 도쿄 영화제 감독상과 관객상을 거머쥐었고, 산세바스찬 국제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는 등 영화 역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어두컴컴한 벽장 안에서 밖을 빼꼼 내다보는 동생의 조그만 얼굴이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제는 겁에 질린 얼굴이 아니었다. 어쩌면 저 안에 숨어 있는 게 안전할지도 몰라. 물도 있고 손전등도 있으니까. 세귀르 백작부인이 쓴 책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되니까. 동생은 샤를의 멋진 복수극을 제일 좋아했다. 당분간은 그 안에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동생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면 그때 와서 꺼내주면 된다. 그리고 지하실에 있는 아빠가 나중에 올라오면 동생이 어디 숨었는지 알거야.
“무섭지 않아?” 남자들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소녀가 나지막이 물었다.
“응, 안 무서워. 밖에서 문 잠가줘. 저 사람들이 나 데리고 가지 못하게.”
소녀는 작고 새하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문을 닫고 열쇠로 잠갔다. 그런 다음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열쇠 구멍은 전등 스위치처럼 생긴 회전 장치에 가려져 있었다. 밖에서는 벽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저 안에 있으면 안전할 거야. 소녀는 확신했다.
소녀는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나무 벽판 위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와서 꺼내줄게. 꼭.” (P25-26)
소녀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람들에게 치이고 떠밀려가며 지붕이 달린 거대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한가운데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딱딱한 철제 의자가 놓인 관중석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마나 될까? 알 수 없었다. 수백 명은 될 것 같았다. 거기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돔 모양의 파랗고 거대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잔인한 햇살이 천장을 뚫고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가 앉을 자리를 찾아낸다. 소녀는 계속 사람들이 들어서면서 인원이 점점 늘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주변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웅얼거리는 소리, 아이들이 칭얼거리는 소리,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태양이 정점을 향해 움직이자 온도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 숨이 막혔다. 공간도 점점 좁아져 서로 꼭 붙어 있다시피 했다. 소녀는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의 초췌한 얼굴과 겁에 질린 눈빛을 바라보았다.
“아빠, 여기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모르겠다.”
“우리는 왜 여기에 끌려온 거예요?”
소녀는 블라우스 앞섶에 달린 노란 별 위에 손을 얹었다.
“이것 때문이죠? 끌려온 사람들은 모두 이걸 달고 있잖아요.”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서글프고 애처로운 미소였다. (P49-50)
“줄리아.” 죠수아가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자네한테 딱 맞는 기사인 것 같은데. 벨디브 60주년 기념식.”
나는 헛기침을 했다. 뭐라고? 꼭 ‘벨디프’처럼 들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알렉산드라가 거만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1942년 7월 16일. 이제 생각나죠?” 그녀가 가끔 콧소리를 내며 잘난 척하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죠수아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벨로드롬 디베르 일제 검거. 줄여서 벨디브라고 해. 사이클링 경기가 열리던 유명한 실내 경기장이야. 유대인 수천 명이 그곳에서 며칠을 처참하게 지내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돼 가스실로 직행했어.” (P54)
벨디브에 감금되었던 두 살부터 열두 살 사이의 유대인 아이들이 사천여 명이었다. 대부분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국적의 아이들이었다.
그중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P57-58)
무기력하게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던 천장 근처 높은 곳에서 갑자기 소동이 벌어졌다. 가슴을 찢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발코니에서 옷가지가 폭포처럼 쏟아지는가 싶더니 무언가가 딱딱한 바닥 위로 쿵하고 떨어졌다.
“아빠, 저게 뭐예요?” 소녀가 물었다.
아버지는 소녀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위에서 옷이 떨어진 거란다.”
“하지만 소녀는 보았다. 소녀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여자가 아이를 끌어안고 제일 꼭대기에 있는 난간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린 여자의 몸뚱이와 잘 익은 토마토처럼 갈라져 피범벅이 된 아이의 머리가 소녀가 앉은 자리에서도 보였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P63)
"소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악을 쓰고 발을 차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집으로, 노란 별을 달기 이전으로, 남자들이 대문을 두드리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P85)
“벨디브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인 게 뭔지 아세요? 암호명이었어요.” 기욤이 말했다.
나는 광범위한 자료 조사 덕분에 암호명이 뭔지 알고 있었다.
“봄바람 작전.” 내가 웅얼거렸다.
“그렇게 끔찍한 작전에 붙인 암호명치고는 참 예쁘죠?” 기욤이 말했다. “게슈타포에서 수를 정해놓고 16세부터 50세 사이 유대인들을 그만큼 ‘넘겨달라’고 프랑스 경찰에 협조를 요청했어요. 그런데 유대인을 최대한 이송하는데 혈안이 된 프랑스 경찰에서 명령을 확대 적용해 어린아이들까지 잡아간 겁니다. 프랑스에 태어난 프랑스 국적의 아이들까지 말입니다.”
“게슈타포에서 아이들까지 요구한 게 아니고요?” 내가 물었다.
“네. 처음에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어요. 어린아이들까지 이송했다가는 들통이 날 테니까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보내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게 목적이라는 것을요.” 그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이들까지 잡아간 이유가 뭐죠?” 내가 물었다.
기욤은 리몬첼로를 한 모금 마셨다.
“아마 경찰에서는 유대인 아이들은 프랑스에서 태어나도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팔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그중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몇천 명밖에 안 돼요. 아이들은 거의 없었고요.” (P89-90)
그레넬 대로 쪽으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뭔가가 보이기는 했다. 다소 초라해 보이는 자그마한 표지판이었다. 대충 훑어보기라도 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2년 7월 16일과 17일. 파리와 근교에서 체포된 13,152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돼 살해됐다. 비시 정부 치하의 경찰이 나치 점령군의 명령에 따라 체포한 1,129명의 남성과 1,916명의 여성, 4,115명의 어린이가 한때 이곳에 있었던 벨로드롬 디베르에 수용되어 참혹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들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전해지길. 지나가는 자여. 결코 잊지 말길!
“재미있네요.” 뱀버가 중얼거렸다. “어린이와 여자에 비해 남자들 숫자는 왜 그렇게 적었을까요?”
“대규모 일제 검거가 시작된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그 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고, 특히 1941년 8월에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는 남자들만 끌려갔어. 이때처럼 철두철미한 계획 아래 대규모로 검거가 이루어진 적은 없었지. 그래서 이 사건이 더욱 악랄한 거야. 7월 16일 밤에 남자들은 대부분 숨어 있었어. 여자와 아이들은 괜찮을 줄 알았던 거지. 오판한 거야.” 내가 설명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한 일인가요?”
“몇 개월 동안. 프랑스 정부는 체포할 유대인들 명단을 작성하는 등 1942년 4월부터 열심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 동원된 파리 경찰이 육천 명이 넘었어. 처음에 계획한 날짜는 7월 14일이었어. 하지만 그날이 국경일이라 며칠 뒤로 연기된 거고.”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황량한 거리였다. 황량하고 쓸쓸한 거리였다.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됐나요? 그들은 어디로 끌려갔어요?” 뱀버가 물었다.
“벨디브에 이삼 일 동안 갇혀 있었어. 나중에 허가를 받고 들어갔다 나온 몇몇 간호사와 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었대. 그들은 아우스터리츠 역으로 보내졌고, 그런 다음 파리 주변의 수용소들로 옮겨졌지. 그러고는 곧장 폴란드로 이송됐고.”
뱀버가 눈을 치켜떴다.
“수용소요? 프랑스에도 강제 수용소가 있었단 말이에요?”
“아우슈비츠로 가기 전에 들르는 대기실 역할을 한 게 프랑스 수용소였어. 드랑시, 이곳이 파리에서 가장 가까웠고, 피티비에, 본라롤앙드.....” (P104-106)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마침내 노파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나지막한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아이들이 보여.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던 그 아이들이. 그 아이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예감이 들었지. 끔찍한 예감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관심이 없었어. 당연하게 생각했지. 유대인들이 끌려가는 걸.”
“왜 그랬을까요?” 내가 물었다.
노파가 다시 끅끅거렸다.
“유대인들이 우리 프랑스의 원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내가 기억하기로 1941년인가 42년에는 이탈리엥 대로에 있는 팔레 베를리츠에서 ‘유대인과 프랑스’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어. 독일 주관으로 몇 개월 동안 계속됐는데, 파리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몰라. 어떤 전시회였는지 알아? 충격적인 반유대주의 전시회였지.”
노파는 울퉁불퉁한 손가락으로 치마 주름을 폈다.
“경찰들이 생각나. 훌륭한 우리 파리 경찰들이었지. 훌륭하고 성실한 우리 경찰들이었어. 그런 경찰들이 어린아이들을 버스 안으로 떠밀었어. 고함을 지르고 곤봉을 휘두르면서.”
노파는 턱을 숙여 가슴에 대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막지 않았던 우리들이 어찌나 부끄러운지”라는 말처럼 들렸다.
“몰라서 그러셨던 거잖아요.” 문득 촉촉해진 그녀의 눈을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어쩔 수가 없었잖아요.”
“아무도 벨디브의 아이들을 기억해주지 않아. 관심도 없고.”
“올해에는 기억해줄 거예요. 올해는 다를지 몰라요.” 내가 말했다.
노파는 쭈글쭈글한 입술을 오므렸다.
“아니. 알게 될 거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뭐하러 기억하겠어? 이 나라의 가장 어두운 과거인걸.” (P117-119)
내가 알기로 프랑크 레비는 육십대 중반이었다. 직접 만나보니 깊이와 기품이 있고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는 천장이 높고, 책, 파일, 컴퓨터, 사진들로 가득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시선은 벽에 붙어 있는 흑백사진들 위에서 멈추었다. 별을 달고 있는 갓난아이. 젖먹이. 어린아이.
“대부분 벨디브에 있었던 아이들입니다.” 그가 내 시선을 따라가다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어요. 프랑스에서 추방당한 아이들이 만 천 명이었으니까요.”
우리는 그의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인터뷰에 앞서 이메일로 보내놓은 질문이 몇 개 있었다.
“루아레 수용소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셨죠?” 그가 물었다.
“네. 본라롤랑드와 피티비에요. 파리하고 가까운 드랑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은데, 나머지 두 곳은 그렇지가 않네요.”
프랑크 레비가 한숨을 쉬었다.
“맞습니다. 드랑시에 비하면 루아레 수용소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는 편이죠. 직접 찾아가보면 아시겠지만,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증언하는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질 않아요. 그곳 주민들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해요. 이야기를 꺼리죠. 게다가 생존자도 몇 명 없고요.”
나는 줄줄이 붙어 있는 사진 속의 작고 연약한 얼굴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어떤 성격의 수용소였나요?” 내가 물었다.
“1939년에 독일군을 수감할 목적으로 건설된 전형적인 병영이었어요. 그런데 비시 정권으로 바뀌면서 1941년부터 유대인을 수용하는 용도로 쓰였죠. 본라롤랑드와 피티비에에서 아우슈비츠로 직행열차가 처음 출발한 게 1942년이에요.”
“벨디브에 갇혔던 사람들을 파리 근교라 할 수 있는 드랑시로 보내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프랑크 레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없는 유대인들은 검거된 후 드랑시로 이송됐어요. 드랑시는 파리하고 가깝죠. 다른 수용소들은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고요. 루아레의 조용한 시골 한복판에 지어졌으니까요. 독일에서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프랑스 경찰이 그곳에서 아이와 부모를 갈라놓았어요. 파리 같았으면 그런 식으로 쉽사리 처리할 수 없었겠죠. 그들의 처사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기자님도 읽어서 알고 계시겠죠?”
“읽을 만한 자료가 별로 없던데요.”
그의 얼굴에서 쓸쓸한 미소가 사라졌다.
“맞습니다. 자료가 별로 없죠.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책을 몇 권 빌려드릴게요.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아이와 엄마를 떼어냈는지 아십니까? 곤봉을 휘두르고 매질을 하고 찬물을 끼얹으면서 떼어냈어요.”
내 시선이 또다시 사진 속의 조그만 얼굴들로 향했다. 나와 베르트랑과 떨어져 혼자가 된 조에를 상상해보았다. 혼자 떨어져 굶주린 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조에를 상상해보았다. 몸서리가 처졌다.
“프랑스 정부로서는 벨디브에 있는 사천 명에 달하는 이 아이들이 큰 골칫거리였죠. 나치가 즉각 이송하라고 요구한 건 성인이었거든요. 아이들이 아니라. 열차 운행 시간표가 워낙 철저해서 변경은 어렵고..... 그래서 8월 초에 엄마와 아이들을 떼놓은 겁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들은 어떻게 했나요?” 내가 물었다.
“루아레 수용소에 있던 성인들은 곧장 아우슈비츠로 이송됐습니다. 아이들은 끔찍한 환경 속에 그대로 방치됐죠. 8월 중순이 되었을 때 베를린에서 내린 결론이 전달됐어요. 아이들도 이송하라고요. 하지만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게 아이들을 먼저 드랑시로 보낸 다음 드랑시 수용소에 있던 전혀 모르는 어른들과 섞어서 폴란드로 이송했죠. 그래야 가족들과 함께 유대인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는 것처러 포장할 수 있으니까요.”
프랑크 레비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나처럼 벽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아이들은 ‘엄선’ 과정을 거치지 않았어요. 어른들과 함께 줄을 서지 않았죠. 누가 튼튼하고, 누가 아프고, 누가 일을 할 수 있고, 누가 일을 할 수 없는지 검사받을 필요도 없이 곧장 가스실로 끌려갔죠.”
“프랑스 정부에서 보낸 프랑스 버스와 프랑스 기차를 타고 말이죠.” 내가 거들었다. (P184-187)
“수용소? 수용소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노인이 물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용소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로구먼,” 노인은 광주리에 담긴 리크를 고르며 시선을 피했다.
“어디 있었는지 아세요?” 내가 끈질기게 물었다. 노인은 헛기침을 했다.
“알다마다. 한평생 이 마을에서 살았는데. 어렸을 때는 그 수용소가 뭔지 몰랐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 우리는 그런 게 있다는 걸 모르는 척하고 살았지. 유대인하고 관계있는 시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무도 묻지 않았어. 무서웠거든. 그래서 우리 할 일이나 하면서 살았어.” (P227-228)
소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열쇠를 주워 더듬더듬 구멍에 끼웠다. 너무 불안하고 초조했다. 열쇠를 제대로 넣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열쇠 구멍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고, 소녀는 비밀의 문을 홱 열었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녀는 뒷걸음질쳤다. 옆에 있던 남자아이가 움찔했다.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고, 쥘과 주느비에브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손으로 눈과 코를 막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쥘이 다가와 사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벽장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쥘은 사라를 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서려고 애를 쓰며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가자, 사라. 나랑 같이 가자꾸나.”
소녀는 할퀴고 발로 차며 있는 힘을 다해 쥘의 품에서 벗어나 엉금엉금 벽장문 앞으로 다시 기어갔다.
벽장 뒤편에 몸을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시신이 보였다. 귀여웠던 얼굴은 이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소녀는 다시 주저앉아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부르며, 그리고 미셸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P250-251)
“그들이 떠난 뒤, 아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셨지. 한참 동안.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기도 했고, 그 정도로 강인하고 엄격한 양반이었는데. 나한테도 우리 집안 남자들은 절대 울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지. 감정을 드러내면 절대 안 된다고. 그러더니 그때까지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제 내가 알 만한 나이가 됐다면서. 아버지는 이사를 오면서 이 집의 전 주인이 누구였는지 루아예 부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고 하시더구나. 일제 검거 때 붙잡혀간 유대인인 줄 이미 알고 계셨다고. 그런데 모르는 척했다고. 그 끔찍했던 1942년에 수많은 파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모르는 척했다고. 일제 검거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실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데 모르는 척했다고. 아버지는 심지어 집이 왜 비어 있느냐고, 그 집 식구들이 쓰던 세간은 어떻게 됐느냐고 묻지도 않았다고 하셨지. 다른 사람들처럼 더 넓고 좋은 집으로 옮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거다. 모르는 척하면서. 그런데 이런 일이 터진 거였다. 여자아이는 돌아왔고, 남동생은 죽었고, 남자아이는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겠지만. 아버지는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절대 잊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줄리아, 아버지의 말씀이 맞더구나. 머릿속에서 잊히질 않더구나, 지난 육십 년 동안 잊히지가 않더구나.” (P255)
사라처럼 끔찍한 지옥을 견디고 살아남아, 사랑하는 사람들 없이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가끔 궁금해지곤 한단다. 얼마나 괴로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사라는 모든 걸 포기해야 했잖니. 가족도, 이름도, 종교도, 서로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그 공허감이 얼마나 깊을지, 그 상실감이 얼마나 지독할지 나는 알고 있단다. (P302)
“네, 그러고 보니 프랑스 경찰의 심정이 어땠을지, 그 부분을 다룬 자료는 한 건도 없었어요.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거겠죠.”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 일을 어떻게 견디며 살았을지 궁금해. 드랑시와 아우슈비츠를 오간 열차 기관사들은 어땠을까? 그 열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정말로 가축을 태운 줄 알고 있었을까?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고 있었을까? 버스 운전사들은 또 어땠을까? 그 사람들도 아무것도 몰랐을까?”
물론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계속 잠자코 있었다. 훌륭한 기자라면 이런 금기의 영역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법이다. 프랑스 경찰, 프랑스 철도, 프랑스 버스 체계까지.
하지만 나는 온통 벨디브 아이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아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P306)
"가슴 뭉클하고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여자 아이의 기억을 공유하는 노년의 세 남자. 나는 그들이 사라의 예전 사진과 편지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372~373)
미셸.
꿈속으로 찾아와 나를 데려가 주렴.
내 손을 잡고 멀리 데려가 주렴.
이 삶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나는 열쇠를 보며 너를, 그리고 과거를 그리워해.
전쟁 전의 순수하고 편안했던 날들을. (P397)
“1월에 마지막 일을 처리했죠. 파리를 다시 찾아갔거든요. 마레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새로 건립됐잖아요. 알고 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소식을 듣고, 다음번에 파리에 가면 찾아가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시라크도 참석한 준공식이 1월말에 열렸죠. 입구에 이름이 새겨진 벽이 있어요. 엄청나게 큰 회색 돌담에 칠만 육천 개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프랑스에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이름을 모두 적은 거죠.”
나는 커피잔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분들 이름을 찾으려고 간 거였는데, 있었어요. 블라디슬라프 스타르진스키와 리브카 스트라진스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우슈비츠에 찾아갔을 때처럼 마음이 평화로워지더군요. 그때처럼 괴롭기도 했고, 프랑스 국민들이 그분들을 이런 식으로라도 기억하고 기리고 있다는게 고마웠어요. 그 벽 앞에서 우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나이가 많은 사람, 젊은 사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울고 있었어요.”
그는 말을 멈추고 입으로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커피잔에, 그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의 기린이 삑삑거렸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시라크가 연설을 했죠. 나는 물론 알아듣지 못했죠.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 번역된 걸 읽었어요. 훌륭한 내용이었어요. 벨디브 일제 검거와 그 이후에 대해 프랑스가 져야 할 책임을 촉구하는, 어머니가 편지 말미에 적었던 그 문장을 시라크도 이야기했어요. 기억할지어다. 절대 잊지 말지어다. 그걸 히브리어로 이야기하더군요.” (P433-434)
“아이 이름은 사라예요.”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가 치즈케이크를 먹다 말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와 잠든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만졌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죄책감이 들었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아이 이름은 사라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딸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이의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름은 있을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사라였다. 나의 사라였다. 내 인생을 바꾸어놓은 그 소녀, 노란 별을 달고 있던 그 소녀의 메아리였다.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자 아름답게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극도의 슬픔. 감정이 북받친 눈. 그는 내가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써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새겨진 아름다움과 아픔을 내가 모두 봐주길 바라는 듯했다. 그의 고마움과 감사와 고통을 내가 모두 봐주길 바라는 듯했다. (P44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