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2022년
한 번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리셋되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소녀 히노 마오리와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 카미야 토루의 풋풋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
작작 좀 해라. 나는 조용히 화를 내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좋아, 그럼 네가 우리가 시키는 걸 하나라도 하면 그만두지.” 주범인 남학생이 대답했다.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각오는 어느 정도 돼 있었다. 녀석은 “1반 히노 마오리한테 고백해. 오늘 중으로.”라는, 중학생 같은 일을 시켰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복도에서 그 애를 불러 세웠다.
녀석들이 시킨 대로 건물 뒤로 데려가 감시를 받으며 명령을 실행했다.
그 애에겐 나중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할 생각이었다.
“너랑 사귀어도 되지만 조건이 세 개 있어.”
설마 고백을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앞에서 그 애가 손가락을 하나씩 들며 사귀기 위한 조건을 제시했다.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숨어서 지켜보던 녀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이 애를 잘 알지 못했다.
특별반인 1반에 소속된 그 애. 히노 마오리. (P13)
나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스터 콤플렉스라, 어머니처럼 따르던 누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버지와 둘이 살아갈 줄 알았다.
그게 내 인생이라고 믿었다.
가정 사정으로 대학에는 가지 않고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반에 배정된 것도 이런 진로 희망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걸어갈 인생이 다르다는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도 같은 학년 여자애를 의식해본 적이 없다. 그건 히노 마오리라는 아까 그 여자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애를 쫓아가 가짜로 고백한 사정을 설명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뚜렷하게 ‘그래’라고 조건을 받아들여 놓고 이제 와서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히노는 내일 방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오해를 푸는 것은 그때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생각도 조금은 정리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아직 불타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게 나와 그 애의 첫 만남이었다. (P16-17)
결심이 선 나는 어제 고백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분이 상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히노는 딱히 놀라지도 않고 마지막에 가서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저런. 그런 거였구나. 벌칙 게임이나 뭐 그런 거겠지. 생각은 했지만, 반에서 괴롭힘당하는 애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단 말이지. 멋있네.”
“아니,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고. 그저 나 같은 인간하고도 친구해주는 좋은 녀석이거든. 불쾌한 일을 당해서 고개를 푹 숙이지 않았으면 했어. 좀 있으면 전학 갈 거고 말이지.”
“전학 가는구나. 아쉽네.”
“응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한 건데. 뭐랄까. 나도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잘 모르겠지 뭐야.”
할 말을 고르다가 히노가 나를 꼼짝 않고 쳐다보는 것을 깨달았다.
“도루 넌 나랑 사귀는 거 싫어?”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이름으로 불러준 것은 오랜만이었다. (P34)
“뭐?” 와타야의 얼굴에 놀란 빛이 번졌다. “니시카와 게이코? 왠 마니악?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잡지, <문예계>지? 가미야, 문학 소년이니?”
그러고는 내가 펴놓고 있던 잡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문예계>는 일본을 대표하는 순수문학 잡지 중 하나인데, 여기에 실린 신인 작가의 작품은 유명한 아쿠타가와상의 심사 대상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한다고 한 니시카와 게이코의 작품도 이 잡지에 실리곤 하는데, 설마 니시카와 게이코나 이 잡지를 아는 동급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건..... 문학 소년은 아니고, 그보다 와타야는 어떻게 니시카와 게이코랑 이 잡지를 아는 거지?”
정기적으로 받는 용돈이 없는 내게는 매달 생활비를 절약해 남는 돈으로 잡지나 책을 사는 게 낙이었다. 이 잡지는 아버지도 읽기 때문에 돈은 반씩 부담하지만. (P53)
“히노, 사진은 왜 찍는 건데?”
히노가 스마트폰으로 나와 와타야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다. 내가 따지자 히노는 장난치다가 들킨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가미야, 그렇게 멋대가리 없는 소리는 하는 거 아니야. 남자친구 사진을 찍는데 무슨 의미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는 와타야는 나와 히노가 유사 연애 관계라는 사실을 모른다. (P54)
그 짧은 시간 속에 뭔가 말하려 했다.
연애를 거짓으로 할 수 없게 된 나 자신을 깨달았다.
“널 좋아해도 될까.”
그렇게 물었을 때는 이미 바람이 그쳐 있었다.
지금을 다 말하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지금 이 순간을 생각했다.
그래, 좋아하는구나. 말로 하고는 실감했다. 나는 너를.......
히노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를 돌아봤다.
“안 돼.”
그 애가 말했다.
“왜?”
나는 물었다.
망설임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처럼 히노가 고개를 수그렸다.
“나 말이지......”
또 바람이 불었다. 히노의 긴 머리를 바람이 채가려 했다.
“병이 있어.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건데.
밤에 자고 나면 잊어버리거든.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바람에 뒤섞여서 그런지 그 애의 목소리가 내게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P84~85)
사귀기 위한 조건이 세 개 있었다.
첫째, 학교 끝날 때까지 서로 말 걸지 말 것.
둘째, 연락은 짧게 할 것.
마지막으로 섯째, 정말로 좋아하지 말 것.
대략 그런 조건으로, 이유도 쓰여 있었다.
첫째는, 비록 상태는 이래도 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수첩과 일기를 읽어 나에 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둘째는, 연락이 빈번히 와도 시간 관계상 답신을 할 수 없는데다, 메시지로 전날의 나와 관련된 화제를 꺼내면 곤란하니까.
셋째는, 상태가 이래서야 어차피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연애 감정은 갖지 말자, 유사 연애 관계로 하자, 라는 이유에서다.
이어서 가미야의 프로필을 읽었다.
생일, 가족 구성, 혈액형, 좋아하는 작가 같은 정보 그리고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
몰락 귀족, 엄마, 위생감을 중시하는 사람. 위생감이 뭘까 했는데 그 설명도 있었다. 청결감은 얼마든지 가짜로 꾸밀 수 있지만 위생감은 꾸밀 수 없다고 한다.
조금 감탄했다. 내가 그 애에게 살짝 관심이 생긴 것을 알아챘다. (P96-97)
선행성 기억상실증. 히노는 귀에 선 장애의 증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기억을 축적하지 못하는 장애인 모양이다. 사고로 뇌에 충격을 받은 결과 기억을 축적하는 시스템이 다운되어 기능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는 기억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잠이 들어 뇌가 기억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그날 하루치의 기억의 삭제된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루 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기억의 리셋. 그게 히노가 갖게 된 장애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 히노가 보인 모습을 떠올렸다. 종종 스마트폰으로 메모했던 것. 사진을 찍었던 것, 그날 처음 나를 만나면 관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던 것.
그게 모두 기억장애와 상관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세 가지 조건도 마찬가지였다.
수첩과 일기를 써서 기억을 짜 맞추고 있다는 설명을 마쳤을 때 히노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그 애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봤다. (P105-106)
“우리 아버지가 그러더라. 잘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게 훨씬 쉽지 않다고. 그러니까 가미야 넌 남들이 말하는 잘난 사람보다 훨씬 훌륭해.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고생하는데도 비뚤어지지 않았어. 이것도 아버지가 한 말인데, 고생한 사람은 대개 비굴해지거나 성격이 나빠진대. 그런데 넌 다정하거든. 아주 많이. 아주아주 많이.”
그 말이 어제 헤어질 때 히노가 한 말과 겹쳤다.
‘역시 넌 참 다정한 사람이구나.’ (P117)
그렇다면 내일의 히노가 조금이라도 일상을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히노가 쓰는 일기를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 채워주자.
그것을 읽고 내일의 히노들이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한 공포를 덜어줄 수 있도록.
새롭고 즐거운 일상을 시작하자. 그게 바로 희망일 것이다.
안 그래, 히노? (P128)
이번 달 <문예계>에는 아무 이야기가 없었는데 인터넷으로 발표한 걸까.
니시카와 게이코가 있는 곳까지 서점 안을 우회해서 못 갈 것도 없었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멀리 돌아갔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지 사인회 줄과는 별도로 사람이 북적였다. 인파를 헤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짐을 든 나를 귀찮은 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안하기는 해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씩 확실하게 나아가 원하는 곳에 차츰 다다랐다.
사인회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노란 테이프를 둘러친 게 언뜻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드디어 노란 테이프 바로 앞까지 왔다. 그곳에서 나는 봤다.
작가 니시카와 게이코가, 내 누나가, 그곳에 있었다.
목이 바싹 말랐다. 누나는 긴 테이블 뒤에 놓인 접이식 의자에 앉아 줄 선 사람들이 내미는 책에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검정 정장을 입은 여자가 곁에 있다. (P140-141)
그중 한 동영상을 재생했다. 월요일 날짜다.
내 환성이 들리고 영상은 흔들렸다. 석양빛 풍경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일기에 쓰인 대로 둘이 자전거를 타며 찍었을 것이다.
페달을 밟는 남자친구님이 카메라를 잠깐 돌아봤다. 내가 뭐라 말했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즐거움이 느껴졌다. 더없이 단순하고 바보스러운 동영상이다.
나는 그 동영상을 몇 번씩 반복해서 봤다. 삐뚤빼뚤 서툴게 만든 추억에 미소가 지어졌다. (P152~153)
재능이 있어도 그 때문에 가족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누나의 뒷모습이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고개를 수그리고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모든 것에 절망한 듯한..... 그런 뒷모습이었다.
“소설 써.”
내가 말하자 누나의 가녀린 등이 움찔했다. 누나가 천천히 돌아봤다.
“도루...... 아냐, 이제 됐어.”
누나는 포기하려고 했지만 포기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되긴 뭐가 돼. 집안일은 내가 거들게. 조금씩 배울게.”
“정말로 이젠 됐어.”
“그렇지 않아.”
“너 왜 그래, 도루.”
“누나는 내가 나쁜 짓을 하면 야단쳤지. 그러니까 나도 야단칠게.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돼. 제발 부탁이야. 소설가가 되는 게 누나 꿈이었잖아?”
누나는 잠자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기를 쓰고 말했다.
“이 집에 꼭 계속 있을 필요도 없어. 아버지는 내가 보살펴드릴게.”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에 뭔가 칭찬할 점이 있다면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나는 아직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어린애였다는 것이다.
애써 참아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P169-170)
기억장애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억에는 크게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기 기억’은 가령 전화를 거는 잠깐 동안 번호를 기억하는 것 같은, 단기간 유지되는 기억을 말한다.
한편 ‘장기 기억’은, 시험공부를 할 때처럼 어떤 것을 잊지 않도록 몇 번씩 상기시켜 기억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장기 기억’을 새로 정착시키지 못하는 증상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장기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장기 기억은 두 종류가 있다.
‘서술 기억’과 ‘절차 기억’이다.
‘서술 기억’은 말 그대로 서술할 수 있는 타입의 기억, 다시 말해 지식 등이 해당한다. 어제 뭘 했는지 같은 사실 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억은 대체로 ‘서술 기억’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후자인 ‘절차 기억’이다.
서술할 수 없는 타입의 기억을 가리키는데 쉬운 예로 자전거 운전을 들 수 있다.
자전거 운전은 대부분 감각에 의존한다. 이건 하루치 기억을 잃어도 뇌가 아니라 감각에 뿌리내린, 몸이 익힌 기억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P183-184)
기묘하게도 모르는 사람일 그 애를 보고 마음이 약간 간질거렸다.
축적되지 않는 정보와 남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 정서와 마음.
혹시 나는 그 애를 좋아하기 시작한 걸까.
아무리. 설마 그럴 리 없어. 아니, 하지만…….
쇼핑 중에 꼼짝 않고 쳐다봤더니 남자친구님은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P212)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쿠타가와상 상반기 발표하는 날이었거든. 아까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결과를 찾아봤더니 니시카와 게이코가 수상했다더라. 20대 젊은 애가 말이야. 이름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기자회견 사진을 봤더니 아무리 봐도 사나에인 거야. 알고 있었냐? 넌 알고 있었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히노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그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있었다.
십중팔구 그때가 우리 부자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리라는 생각도.
“응, 알고 있었어. 아버지한테는 말 안 했지만 누나는 옛날부터 소설을 썼거든. 필명이 니시카와 게이코야.”
“그래..... 그랬냐. 사나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이 집에서 나간 거냐. 우리를 두고 도망친 거냐.”
“도망친 게 아니야. 누나는 도전한 거야.”
“그게 그거지.”
“의미가 전혀 달라. 자기 인생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라 자기 인생에 도전한 거니까.”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아버지 특유의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사나에하고 보고 지냈냐.”
못 만든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시곗바늘만이 현실을 세었다.
“정기적으로 만난 것도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도 아니야. 얼마 전에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었는데 그때 우연히 마주쳐서 이야기는 했어.”
“그래서 사나에는 돌아오는 거냐.”
“누나한테는 이제 누나 인생이 있으니까.” (P233-234)
“정말이야. 난 정말로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그런 인생을 계획하고 지금도.....”
“아버지. 이제 거짓말이라면 지긋지긋해. 상처 입기 싫어서 응모 안 하는 거잖아?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면서? 그럼, 그럼 상처 입는 걸 겁내지 마!”
“도루!”
아버지가 멱살을 잡았다.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쳐다봤다.
나는 혹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하는 걸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려면 상처를 입어야 한다. 도망쳐선 안 된다. 자기도취에 빠져 상처 입기를 피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드디어 때가 됐구나하고 각오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은 노여움이 아니라 애수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알고 있었냐. 내가 이제 응모하지 않는 걸. 원고를 보내지 않는다는 걸.” (P240)
누구나 그렇다. 좋은 사람이 되기 싫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와 나는 내내 도망만 쳤지만 나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저 빛을 잃었던 것뿐이다. 히노에게서 빛을 받은 지금의 나는 알 수 있다. (P244~245)
“잊어버리기..... 싫어.”
어느새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시야가 부옇게 번졌다.
어라? 어째서? 왜 이러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잊어버리다니. 일기에만 남길 수 있다니. 그런 건 싫었다. 그렇지 않나. 인생은 언제나 한 번뿐이다. 어떤 순간도 돌이킬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걸 소중히 한다. 보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 걸 기억할 수 없다니 너무 한다. 너무 슬프다.
반대편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나를 남자친구님이 보고 있었다.
“잊지 않을 거야, 난 이날을.”
그 목소리는 폭죽 터지는 소리에 묻히지 않고 또렷이 내 귀에 들렸다.
“나, 나도 잊지 않을 거야. 잊을 리 없는데..... 이상하다. 너무 즐거워서 그런가? 눈물이 그치질 않네.”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내 손을 남자친구님이 꼭 쥐었다.
“사람은 원래 잊어버리게 마련이야. 하지만 괜찮아.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믿어.” (P266-267)
‘좋아한다’는 감각에 기인하는 말이다. 오기로 곁에 있어 준다든지 논리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나중에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건 좋아한다는 직감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은 ‘어떠어떠하니까 좋아한다’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근거가 없는, 진정한 의미로 감각에 기인하는 감정이다. (P282)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만..... 마오리 양은 회복되고 있는 것 같군요.”
의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얼굴을 돌렸다.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전화해서 의사가 한 말을 전했다. 수화기 저편에서 “그거 봐라, 내 말이 맞았지”라며 웃던 아버지는 끝에 가서는 울먹였다.
현 내 국립대학 2학년인 이즈미에게도 알리자 바로 집으로 찾아왔다.
“마오리, 진짜 그렇구나. 기억장애가 나았구나.”
“응! 잘됐지. 이즈미, 진짜 잘됐지. 실감은 하나도 안 나지만. 다 같이 짜고 날 놀래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잖아. 바로 며칠 전까지 나 고2였는걸. 그렇지만 시간은 분명히 지났으니까. 하지만 회복 중이라고 해서.”
흥분해서 말을 잇자 이즈미는 잠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분 탓이었을지 모른다. 다음 순간에는 웃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도 기억을 잃는 일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P297-298)
“나, 심장이 별로 안 좋을 수도 있어서, 그래서......”
가미야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 한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정신을 차린 뒤 가미야는 그런 농담을 할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문이 막혔다.
“그, 그래..... 그렇지만 뭐랄까. 지금 당장 어떻게 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심각함을 떨쳐버리려다가 실패한 듯한 어조로 대답하자 가미야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응, 어디가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실은 어제 좀 피곤했는지 쓰러졌지 뭐야.”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어제도 가미야는 도서관에서 마오리를 만났다. 그 뒤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자전거를 인도 곁에 세우고 진정하려 했는데 다리 힘이 풀렸다. 자전거 짐받이를 손으로 짚으려다 자전거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가미야는 병원에 있었다. (P302-303)
여자친구의 기억에서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가미야는 나를 보며 웃었다. 슬프게 웃었다.
“난 괜찮아. 헤어졌다고 해도 되지만 히노가 찾으려 할지도 몰라. 그러다가 내가 죽은 걸 알면 정신적으로도 좋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럼 좀 번거롭기는 해도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않을까. 나하고의 관계를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어.”
가미야가 잇는 슬픈 말들에 나는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그렇지만...... 죽다니, 그런 일 없어. 괜찮아.” (P306-307)
이즈미에게 크로키북 속 청년 이야기를 듣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즈미는 나와 그 청년의 관계에 관해 가르쳐주었다.
우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묘한 인연으로 유사 연애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
우리가 매일 만났다는 것. 그날그날의 내가 그 애에게서 힘을 얻었다는 것.
그림을 그리는 습관은 그 애 덕에 생겼다는 것.
그 애가 어느 날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애의 유언으로 일기 등에서 그 애의 자취를 모조리 지웠다는 것.
경악했다. (P341-342)
“나한테도 결국 도루는 과거가 될 거야.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있더라도 인터뷰하다가 도루의 죽음을 무심코 입 밖에 낼 수 있을 정도로, 언젠가는 과거의 일부가 될 거야. 어떤 상처든 한번 입고 나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 상처는 기억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픔이 계속되진 않거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 추억 속의 바람이 문득 불었을 때, 원고를 쓰다가 키보드로 도루란 글자를 쳤을 때 생각나는 일은 있어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아픔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해서 슬픔을 소화해가는 걸까.
슬픔을 잊게 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계속 사로잡혀 있어서는 앞으로 걸어나갈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슬픔을 잊게 된다는 게 슬펐다.
“추억은 소중한 거죠.”
그런 생각을 담아 말하자 누나는 표정을 살피듯 나를 쳐다봤다.
“전 그 소중한 걸 잃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그 애를 잊어갈 거라면..... 전 조금씩 그 애를 기억해내고 싶어요. 소중한 걸 되찾아보고 싶어요.”
누나는 괴로운 듯 눈꼬리를 내렸다. (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