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의 탓
<따로 또 같이 쓰는 문장>
이제는 아무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마당엔 제법 큰 탁자가 하나 있었다. 네 자매는 탁자에 앉아 심각한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아버지는 탁자 하나를 가져왔다. 흠집이 있었고 곳곳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엔 탁자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자리만 차지하다 결국 쓰레기가 될 거라며 반기지 않았다. 파란색 플라스틱 둥근 판을 철제 구조의 다리가 받치고 있었던 제법 튼튼하고 무거운 탁자였다. 아버지는 버려져 있는 탁자를 보는 순간 마당 위에서 펼쳐질 풍경을 그려 보았다. 햇빛만 가릴 수 있다면 꽤 괜찮은 공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창고에 처박혀 있던 텐트를 꺼냈다. 텐트 천이 탁자 위 지붕으로 요긴할 거라 확신했다. 두 개의 빨랫줄에 텐트 천을 걸었고, 적당한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텐트 천을 빨래집게 여러 개로 고정했다. 모양새는 엉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그림은 선명해졌다.
둥근 탁자와 텐트 천 지붕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때로는 도서관이 때로는 미술 학원이 되었다. 언니가 동생의 숙제를 도와주는 따뜻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자매들은 수박씨 뱉기 내기도 했고, 옥수수 하모니카를 신나게 불기도 했다. 그렇게 네 자매는 아버지의 그림에 풍경을 늘려 나갔다.
자매들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날, 집에는 네 자매뿐이었다. 아버지는 일터에 어머니는 시장에 첫째는 학교에 있었다. 아침부터 땀이 뻘뻘 나는 유독 참 더운 날이었다. 네 자매의 대장 격인 둘째는 한 가지 재밌는 일을 떠올렸다.
"오늘은 안 되겠어. 방으로 들어가자."
"심심한데, 뭐 하고 놀지?"
"야구 어때?"
모두가 동의했다. 둘째는 자신이 공을 제일 잘 던지니 투수는 당연하다 말했다. 막내는 자동적으로 이 놀이에서 탈락했다. 둘째와 여덟 살 차이가 나는 데다가 끼고 싶어도 몸집이나 힘에서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막내도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포수와 타자 역할은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셋째는 포수, 넷째는 타자가 되었다. 세 명의 자매는 막내가 심심하지 않을까 싶어 '심판'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렇게 마당 둥근 탁자의 공간은 새로운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놀이를 하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했다. 투수는 공을 살며시 던졌고 포수는 무리 없이 받아냈다. 타자를 위한 시간도 당연히 있었다. 공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투수의 공을 받아치고 받아내고, 쉽지는 않았지만 연습을 거듭할수록 실력은 나아졌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서로를 배려하며 놀이를 준비했다.
"이제 됐어. 정식으로 점수 내기다!"
공을 던졌는데 타자도, 포수도 각자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투수가 1점을, 공을 쳐내면 타자가 1점을, 공을 받으면 포수가 1점을 얻는 놀이였다. 막내는 종이에 점수를 적기로 했다. 막내는 점수판으로 역할을 바꾸었다.
처음엔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까르르 웃으며 서로 공을 주우며, 공을 건네며 훈훈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따뜻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승부욕이란 녀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점수가 올라갈 때마다 긴장감은 팽팽해졌다.
"J 언니 몇 점!"
"SU 언니 몇 점!"
"SO 언니 몇 점!"
막내 역시 지지 않았다. 언니들이 승부욕을 발휘하는 만큼 점수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더욱 크게 더욱 또렷하게 외쳤다.
투수의 공은 거침이 없었고, 날렵해졌다. 타자의 방망이도 질 수 없었다.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투수와 타자가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포수 역시 예민해졌다. 회를 거듭할수록 네 자매의 목소리는 커지고 커졌다. 막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누구는 신이 났고 누구는 화가 났다. 놀이 진행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열기는 점점 올라갔다.
"쨍그랑!"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모두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집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여덟 개의 눈동자는 한곳을 향해 있었다. 포수의 뒤쪽 오른편에 있던 전신 거울로. 이곳저곳 금이 가 있었다. '제발'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기도 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거울의 파편들은 보란듯이 방바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투수였던 둘째가 포수를 다그쳤다.
"너 왜 안 잡았어? 똑바로 안 할래?"
포수였던 셋째가 타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너 왜 안 치는데? 너 때문이야!"
타자였던 넷째는 포수에게 되묻는다.
"언니는 왜 안 받았는데?"
적막이 감돌던 집안은 온통 '네 탓!' 뿐이었다.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서로에게 화살을 돌렸고 서로를 탓했다.
점수판 막내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꿈이길 바랐다. 장롱에 붙어 있던 거울은 산산조각 나 있고, 언니들은 싸우고만 있다. 시장에 갔던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에서 탈출해야 돼! 나는 공놀이는 안 했잖아! 나는 잘못 없어!'
순간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언니들이 싸우고 있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막내는 언니들과 함께였던 탁자에 앉았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는 당부하고 당부했다. 접시가 깨지지 않게 하라고. 누군가 다칠 수 있다고. 거울이 깨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말도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작은 것이라도 조심해서 다루라고. 그랬는데! 그래서 지금 큰일이 났는데! 그런데! 언니들은 싸우고만 있다!
'J 언니는 공을 너무 세게 던졌고, SO 언니는 공을 치지 못했고, SU 언니는 공을 받지 못한 거잖아. 우리 모두가 잘못한 거야!'
막내는 언니들에게 달려갔다. 그만하라고 빨리 치우자고 소리쳤다.
"엄마 올 시간 됐어. 이러다가 우리 더 혼나!"
집안이 고요해졌다. 네 자매는 다시 한마음이 되었다. 일단 방바닥의 존재들을 치우는데 모두가 동의했다. 큰 조각은 손으로, 작은 조각들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치우고 또 치웠다. 깨진 거울 조각을 봉지에 담았다. 셋째가 신문지를 가져왔다. 신문지를 펼쳤고, 서너 장을 포갰다. 그 위에 거울 조각이 담긴 봉지를 올렸다. 둘째와 셋째는 신문지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살며시 놓았다.
말끔해진 흔적을 확인한 네 자매는 마당으로 나와 둥근 탁자 위에 모였다. 어머니에게 누가 먼저 말할 것인가, 어떻게 말해야 덜 혼날까 대토론이 벌어졌다. 꽤 심각한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그림에 예상하지 못했던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풍경을 더하고 있었다. 둘째는 이 모든 사단은 자신이 제안한 놀이 때문이라며 자신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했다. 늘 대장 노릇을 하며 큰소리만 뻥뻥 치던 둘째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자 셋째와 넷째도 덩달아 말한다.
"아니야. 내가 말할게! 내가 말할게!"
막내는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냥 넷이 같이 말하자! 같이 잘못했다고 하자!"
대토론 끝에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혼나도 같이 혼나고 맞아도 같이 맞자고. 이제는 아무도 탓하지 말자고.
네 자매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얼마나 혼이 날지, 정말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 넷이서 손을 꼬옥 잡았다. 이마에도 등에도 손에도 땀이 흘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한마음으로 어머니를 기다렸다. 혼나도 괜찮으니 제발 나쁜 일만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시장에서 돌아오신 엄마는 깨진 거울을 보고 화를 내지도 혼을 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시에는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도 많이 놀라셨던 것 같아요.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만 하셨고요. 엄마도 진짜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걱정을 하셨던 것 같아요.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금전적인 문제였지 누가 다치거나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제 기억으로는요. '따로 또 같이' 문장 덕분에 어린 시절로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