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여기까지
어쩌다 보니, 지금의 내가 되었다.
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막연함이었다.
언젠가부터 몸과 마음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길은 보이지 않았고, 하루는 습관처럼 흘러갔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붙잡았다.
책이었다.
종이 위에 새겨진 검은 활자들이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 먼 나라의 바람이 불어왔고, 한 문장을 오래 바라보면 내 안에서 잊었던 설렘이 흔들렸다.
그 설렘을 다시 불러오기로 했다.
처음엔 하루 한 페이지라도 좋았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읽은 문장 중 마음에 남는 것을 적어보고 싶어졌다.
펜을 들어 한 줄씩 쓰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옮겨진 문장은 내 안에서 한 번 더 살아났다.
지속성을 위해 인문학 밴드에 가입했다.
매일 다른 사람들이 올리는 책 이야기와 글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오늘은 어떤 문장을 남길까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하루하루 쌓이는 기록은 내 마음의 발자국 같았다.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 밴드의 한 회원이 ‘맨발 걷기’를 한다는 글을 올렸다.
풀 위를, 흙 위를, 그대로 걸어보라는 말이었다.
이른 아침, 들판에는 하얀 물안개가 옅게 깔려 있었다. 신발을 벗자 서늘한 공기가 발끝을 감싸며 스며들었다. 발바닥에 닿는 땅의 온도와 질감이 낯설었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촉촉한 이슬이 번졌고, 고운 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드러운 흙 사이에 숨어 있던 작은 자갈이 발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멀리서 까치 소리가 들리고, 풀잎이 스치는 바스락 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몇 걸음 걷자 발끝에서 심장으로 전해지는 생생함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맨발 걷기는 내 하루의 첫 문장이 되었다.
여름이 와도, 가을이 와도, 땅은 그 계절의 숨결로 나를 맞아주었다.
몸이 깨어나자 마음도 선명해졌다.
가을 햇살이 스미는 창가에 앉아 글을 쓰면, 문장 사이에 은행잎의 노란빛이 내려앉았다.
그 무렵, 공저 집필 제안이 들어왔다.
매일 써온 기록들이 내 손을 잡았다. “넌 이미 쓰고 있잖아.”
그렇게 시작한 공저 원고는 끝내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책 표지에 찍힌 내 이름을 바라보던 순간, 오래전 꿈을 마주한 듯 가슴이 떨렸다.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자는 마음으로 만든 독서 모임은 어느새 3년을 넘겼다.
이제는 단순히 책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모임에서 나눈 문장과 생각이 다시 내 글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틈틈이 단독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매일 새벽, 푸른 기운이 남은 시각에 휴대폰 화면에 뜬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
하루 한 줄 글쓰기, 한 페이지 독서, 아침 맨발 걷기, 계절마다 이어지는 독서모임.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길이 되었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 길은 조금씩 나를 키웠다.
지금 내 삶은 매일 쓰고, 읽고, 걷고, 나누는 꿈 꾸는 여정 위에 서 있다.
그 여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