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을 계속 바라보기를
<따로 또 같이 문장>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하고 있었다.
<SCENE 1- 2005년의 어느 봄날>
종로3가역 지하철 환승로 어디에서쯤,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인인 듯 꽤 다정해 보인다.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건넨다.
"양력 생일하고 음력 생일하고 정확하게 한 달 차이 나는 일이 있냐고, 처음 들어보는 일이라고..."
여자가 대답한다.
"좀 특이한 경우이긴 해.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 딱 한 달 차이 나는 거 흔하진 않은 것 같더라고."
여자는 대학 시절 단짝 M이 떠올랐다. 생일이 단 하루, 차이 나는 친구였다. M은 12일, 여자는 13일. 여자는 혹시나 해서 물었었다. 너도 양력 생일과 음력 생일이 정확히 한 달 차이냐고. 아니 나와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났구나 하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었다. M 역시 여자와 똑같은 경험이 있었다. 양력과 음력이 정확히 한 달 차이가 나는 경우가 어딨냐고, 제대로 알아보라고. 달력을 펼쳐 놓고 알려줘야 하나 답답했었다고. 나와 같은 사람 처음 만나 본다고, 드디어 내 맘을 이해하는 동지를 만났다며 기뻐했었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밥벌이 좀 한다고 한동안 발버둥을 쳐댔으니 한가롭게 음력 생일, 양력 생일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것도 내 짝이라 생각하고 있던 남자에게서, 유쾌하지 않은 그 상황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냐고.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어디 가서 사주 보고 온 거 아니냐고 묻더라. 미리 봤는데 안 좋으니까 음력 생일 바꾼 거 아니냐고. 우리 엄마 너무 웃기지 않냐?"
한동안 이어진 침묵이 어색했는지 남자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순간 여자의 얼굴을 일그러졌다. 여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뭐 대단한 집안이라고 내가 생일까지 속여! 어이가 없네!"
이번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 봐!"
순간 환승로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됐다. 그곳에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소리 낮춰! 목소리 낮춰!"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일인지,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물밀듯이 오고 가는 지하철 환승로에서. 사람들의 눈길은 여자에게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남자보다 목소리를 낮추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하는 여자에게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자는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이 조금 진정이 될는지, 이게 미안해야 할 일인지 마음이 복잡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서로 가족은 건들지 말자!"
남자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때 여자는 생각했다.
'아, 내가 가족을 건드렸구나!'
종로3가역 환승로 한복판에서 여러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한 가지는 제대로 익혔다. 앞으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
<SCENE 2 - 2005년의 어느 여름날>
여자는 이제 든든한 내편이 생겼으니 결코 외롭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언제든, 그게 무엇이든 항상 함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퇴근 후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정리하고, 여유 있게 산책을 즐기면서, 주말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알차게 시간을 보내면서 보람 있는 시간만 펼쳐질 거라 의심치 않았다. 너무나 소박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바람이 결코 소박하지 않았음을 깨닫기까지. 남자가 올빼미형 인간이라는 걸 재차 확인하곤 세상이 무너져 버렸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새벽 시간, 여자는 혼자였다. 평일이든 휴일이든 6시면 온몸에 세포가 새롭게 재생되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새벽 시간, 쇠한 기력을 한창 보충해야만 했다. 주말과 휴일 서너 시만 지나면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슬슬 시동을 걸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새벽같이 일어나 바지런을 떨며 벌레를 잡아먹어야 하는 참새과였고, 남자는 늦은 밤 두 눈을 반짝이며 작은 동물을 레이더망에 포착해야 하는 올 빼 미과였던 것이다.
이른 아침 장을 보면 얼마나 한가하고 좋을까! 아침 시간에 집안일을 해 두면 오후가 얼마나 편할까!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굳게 간직하며 이 게을러빠진 올빼미 인간이 너무나 한심하고 미웠던 어느 날, 여자는 차를 끌고 혼자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7시 전후. 여자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확인하고는 매우 당황했다. 토요일 오전 대형마트, 생각과는 달리 텅 비어 있었기에. 매장 입구에 서 있던 한 남자 직원이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공은 반쯤 풀려 있었지만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는 가득했다. 그날 이후, 여자는 자신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도 정상은 아니구나!'
여자는 깨달았다. 남자를 게으르고 한심한 족속이라 판단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지극히 일반적인 부류가 아닐 수 있음을. 집에 도착했을 때 올빼미형 남자는 보란 듯이 쿨쿨 자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나갔다 온 줄도 모르는구나!'
하지만 여자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사 온 물건을 주섬주섬 챙겨 넣고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아침을 차리고, 주방 정리를 하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으면서. 그동안 꿈꿔온 소박한 꿈들을 하나둘 지우면서. 남자의 시간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밤에 기절해 버리는 나를 보고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SCENE 3- 2025년 어느 가을날>
비가 참 많이도 내린다. 여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장마가 찾아온 건지, 구름이 남자와 여자의 동네로만 모여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늘 우산을 챙겨야 했고, 수시로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한다. 오전 중에 잠시 찬란했던 하늘이 또다시 구름에 가려졌다. 예상대로 늦은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약속이 있었다. 귀가 시간이 남자보다 늦어졌다. 그녀가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을 때, 우산은 빗물을 한껏 머금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여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모퉁이를 돌았고, 보금자리 문 앞에 이르렀다. 남자의 우산이 문 앞에 펼쳐져 있었다. 황토색과 남색 계열의 체크무늬 우산이. 남자의 우산에도 빗방울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우산 옆에 자신이 들고 온 꽃무늬 우산을 펼쳐 놓았다. 두 우산은 나란히, 다정하게 놓여 있었다.
오늘 남자의 하루는 어땠을까? 구시렁댈 일은 얼마나 많았을까? 혹시나 중간중간 입 운동을 찰지게 할 일이 있었던 것을 아닐까? 여자는 남자의 하루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젖어있는 우산이 지금 남자의 상태를 대변해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SCENE 4 - 2025년 바로 오늘>
처음엔 실망도 많았다. 욕심만 앞세워서였겠지. 참 많이도 싸웠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알 수는 없었으니. 가족의 먼 여행을 준비하며, 크고 작은 사고를 겪으며, 밥벌이 터에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으며 자박자박 나란히 걸어왔다. 이제 웬만한 일은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때에 따라 수위를 조절하며 찰지게 화도 내준다. 믿도 끝도 없이 그냥 무조건 난 네 편이라 넌지시 말을 건넨다.
돌아보니 남자와 여자는 수많은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징검다리 사이 간격이 한결같지만은 않았던 상황도 피할 수 없었다. 때로는 간격이 도를 넘어 지나치게 넓었기에 한참 동안이나 물속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발을 내디뎠다. 푹 젖어 버린 신발과 양말을 뽀송하게 말려냈고, 다음 징검다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서로를 위하고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수 있기를. 징검다리를 건너다 보란듯이 물에 빠져도, 몸이 흠뻑 젖어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 이어져도, 떨어지지 않기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늘 한 곳을 바라보기를.
그들의 시간을 간절히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