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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유령 가입자가 되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는 걸까

by 글꽃향기


몇 달 전부터였다.

LTE 유심( 5G/100분) 요금제의 기본 제공 데이터를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이후 요금제에 따라 데이터 요금 발생 및 mVolP 이용 제한됩니다.

휴대전화 요금제의 통화량이나 데이터를 미처 다 쓰지 못했던 내가 이런 메시지를 받기 시작한 지.





매월 중순쯤, 사용 가능 잔여 음성 통화량과 데이터양을 문자로 받곤 했었다. 늘 넉넉히 남아 있었다. 내가 영상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카톡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조차도 대부분은 와이파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114에서 받은 문자를 살펴보니 대략 9월부터 데이터 소진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다.





요금제의 최대 데이터양 5GB를 모두 사용한다 해도 추가 금액을 내면 3GB까지는 추가 이용이 가능했다. 그러나 8GB를 초과할 경우 데이터 이용이 제한되었다. 아마 가입 당시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한동안 집과 일터만 오가던 내가 친구들을 만나면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길에서 데이터를 쓸 일도 많아지긴 했었다. 공간 감각이 거의 없는지라 누군가를 만날 때면 지도 앱을 내내 켜 놓고 있는 편이었고 오며 가며 내가 썼던 글을 확인하는 일도 잦아졌다. 워낙에 저렴한 알뜰폰 통신사에 가입했었기에 사용량이 초과된다 하더라도 납부할 금액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주에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미 8GB를 모두 사용했는데, 꼭 데이터를 써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엄마의 처방전을 언니들의 카톡 방에 꼭 전송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엄마는 최근 새로 복용하기 시작한 약이 몸에 맞지 않는지 불편함을 호소하셨다. 언니가 아는 의사에게 조언을 구해 볼 테니 처방전을 찍어서 보내 달라고 했는데 전송이 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할 수 없이 엄마의 카톡으로 전송을 했다.




친정에는 와이파이를 설치할 수 없었다. TV를 즐겨 보시는 엄마는 그동안 이용하던 통신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볼 수 있는 채널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여름, 여러 업체의 상품을 비교해 보았고 상의 후, 새로운 업체에 가입했다. 당시 와이파이 공유기도 최신형으로 설치해 주셨다. 그런데 그날부터 엄마의 어지럼증이 시작되었다.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와이파이 공유기를 꺼 버리고 나니 어지럼증이 사라졌다고 하셨다. 와이파이 기기를 제외한 상품으로 변경 설치를 요청했다. 설치 기사님께 이런 사례가 있었는지 여쭈어보았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셨다. 뭐 그때 오셨던 기사님이 모든 사례를 인지하시는 건 아닐 테니. 어쨌든 흔한 사례가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와이파이 공유기를 최신형으로 교체했을 때 한동안 꽤 어지러웠던 기억이 있다. 몸이 안 좋아서 느꼈던 어지럼증과는 조금 차원이 달랐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요?-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친정에서는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없다.




정신이 번쩍 났다. 요금제를 바꾸어야만 했다. 급하게 무언가를 검색해야 하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데이터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통신사를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알뜰 통신사업체는 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요금제 역시 다양하고 복잡했다. 나에게 적당한 요금제를 찾아냈고 곧바로 가입을 신청했다. 유심을 받을 주소며 결제할 카드며 등록을 완료했다. 유심을 받고, 셀프 개통을 진행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다음 주쯤이나 올 줄 알았던 유심이 토요일 2시쯤 도착했다. 유심을 확인하였고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설명서에 의하면 토요일 오후 셀프 개통이 가능했다. 평일이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마침 말일이어서 시기도 참 적절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설명서에 따라 단계를 밟으며 개통을 진행했다. 중간에 ‘전 통신사의 해지 단계’가 있었는데, 새 통신사에서 기존 통신사로 '번호 이동'을 요청하면 기존 통신사에서 '번호 이동'을 승인해 주는 방식이었다. 약 1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처음엔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에러' 메시지가 떴다. 단계별 설명을 꼼꼼히 읽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휴우, 몇 번이나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기존 통신사에서 해지 완료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개통만 하면 끝이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니 또 에러 메시지가 뜬다. 이게 무슨 일일까? 혹시나 전 통신사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다시 이전 단계로 돌아가 확인해 보니 이미 전 통신사에서는 탈출한 상태가 분명했다. 해지는 됐는데 가입은 안 된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몇 번을 다시 시도해 보니 "지금은 셀프 개통 시간이 아닙니다. 평일 업무 시간에 개통을 진행해 주세요" 메시지가 뜬다. 뭐라고? 그대들이 보내준 설명서에는 번호 이동 셀프 개통 이용 가능 시간 10시부터 19시 30분까지라고 적혀 있는데? 대신 번호 이동은 일요일은 안 된다며!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평일 업무 시간에 이용을 하란다. 어휴, 정말.





참으로 의아한 것이 기존 사업자 탈퇴는 토요일에 진행이 됐는데 새로운 사업자에 가입하는 것은 안 된다니. 보통은 반대의 경우가 태반이지 않았나? 나는 번호는 있는데 통신사에는 가입이 되어 않은 유령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집에서는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어서 문제가 없고, 집 전화가 있는 상태라 가족들과는 연락이 되지만 문제는 월요일 아침이다. 내 직업의 특성상 8시부터 9시까지 종종 전화를 받을 일이 꽤 있는데 나와 전화가 되지 않는다며 혹시나 노하는 누군가가 생길까 봐 살짝 걱정이 된다. 고로 월요일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집을 일찍 나서야 할 것 같다.






나의 불찰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설명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토요일은 셀프 개통 및 번호 이동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분명히. 이건 누구의 잘못이지? 고객 센터에 전화를 해서 따지고 싶었다. 우와, 이래서 폭언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물론 나는 그래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직까지는-





개통을 진행하려고 소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세 시간은 붙들고 있었나 보다. 내가 뭘 잘못했겠지 하면서 확인하고, 시도하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내가 왜 셀프 개통을 신청한 걸까 후회가 됐다. 그냥 평일 업무 시간 되길 기다렸다가 고객 센터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최소한 토요일 그 귀한 세 시간은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내가 부주의해서, 안내에 주의를 제대로 기울이지 않아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꼼꼼하게 읽고 또 읽었다. 더군다나 연락망이 사라진다는 것이 꽤나 불안한 상태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말 신경을 썼는데 나의 노력은 그냥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나는 2박 3일 동안 통신사 유령 가입자가 될 운명이었고, 그 운명은 내가 어떻게 해도 그냥 정해져 있었나 보다.




예전엔 주말, 휴일에도 고객 센터와 전화가 가능했었다. 비록 정말 오래 기다렸을지라도. 그런데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니 처음엔 화가 났는데 좀 놀랍기도 하다. 뭔가가 좋은 쪽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신호로 봐도 될까? 어제 덮은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사실 불편함은 느끼지만 개통이 하루, 이틀 정도 늦어진다 한들 그리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다. 월요일 아침이야 30분 정도 일찍 출근해서 일터에서 전화를 받으면 되니까. 고객 센터의 그분들도 휴일에 쉴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지.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던 택배들도 요즘은 하루 이틀 정도 늦게 온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야 누리던 것이 사라져 버려서 툴툴거리곤 하지만 택배 기사님들은 휴게 시간이며, 휴일이며 충분히 안전권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물론 일부 특정 업체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나의 불편함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면 좋겠다. 어제는 굉장히 화가 났었기에 만약 고객 센터와 연결이 됐다면 꽤나 쌀쌀맞은 말투로 통화를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통화를 할 수 없었기에 통신사 유령 가입자로서 2박 3일이란 기간을 보내면서 이렇게 글로 옮기는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 아닌가 싶다. 영화 "소희"가 생각난다. 나 역시 진상 고객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겠지. 화가 끓어오를 때 생각을 먼저 해 보는, 이렇게 글을 먼저 써 보는 내가 되길! 성부터 내지 말고.




그나저나 나는 내일 오후쯤에는 진짜 가입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 늦어도 2~3일 안에는 가능하겠지!




유령 가입자가 되었기에 이런 글도 써 보는구나. 좋은 점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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