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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희비가 교차하다

내 앞의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by 글꽃향기




비(悲)


새벽 0시 즈음, 이미 눈이 펑펑 내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늘은 매우 뿌옇고 흐렸다. 굳이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아도 출근길 교통대란이 예상됐다. 오늘 지각은 확정이구나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5시 30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늦게 잠든 데다가 지각 걱정에 푹 잘 수 없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느릿느릿 출근 준비를 이어갔다. 집을 나선 시각은 7시 15분, 마음까지 무거워졌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여유 있게 하루를 여는 시각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버스도 나도 느릿느릿할 거라는 건 굳이 애써 떠올리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희(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바라본 창밖 풍경, 안에서 보니 정말 장관이었다. 이런 날, 집에만 콕 박혀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悲)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구석구석을 돌면서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런 날 짬짬이, 틈틈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매우 부럽다. 나는 그냥 자나 깨나 출근시각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월급쟁이일 뿐이니까.






희(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 횡단보도의 초록불을 기다리다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나뭇가지 위로 쌓인 눈이 동화 속에서나 볼 듯한 풍경을 선물해 준다. 나뭇가지들은 저 눈덩이들을 어떻게 버텨내는 걸까? 잠시 동안 낭만에도 젖어 보고, 이야기 속 주인공도 꿈꿔 본다.





비(悲)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제설 작업을 했다곤 하지만 도로 곳곳은 블랙 아이스 투성이었다. 경사면이 있는 건지 사거리 중간 지점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기온이라도 떨어져서 얼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앞이 깜깜해졌다. 눈이 치워진 곳만 골라 나의 흔적을 남기며 버스 정류장으로 엉금엉금 걸어갔다. 앗! 내가 타려는 버스가 지나갔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는데, 한 줄로 늘어선 출근길 거북이들의 행진은 도통 속도를 내지 못했다. 어쩌지? 저 버스 놓치면 지각은 진짜 오백 퍼센트인데.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다행히 앞 거북이 군단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오호라, 같은 버스를 타는구나. 나도 그들을 따라 총총 뛰기 시작했다. 이제 넘어지든 굴러가든 내 알 바 아니다. 일단 저 버스를 타자.




희(喜)


무사히 버스를 탔고 한쪽 구석에 몸을 기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앉지는 못했지만 나름 꽤 괜찮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꽤 운치 있었다.





비(悲)


기사님이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살짝살짝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버스의 기둥을 더 꼭 잡아 본다. 제발 이대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희(喜)


두 번째 버스를 갈아타고 일터 입구에 도착했다. 세상에 지각이 당연했는데 8시 20분에 입구에 도착했다. 출근 시각까지 10분이나 남았다. 도로는 그야말로 쌓인 눈에, 녹은 눈에, 물웅덩이까지 합쳐져 사정이 형편없었지만 뚜벅이 출근길을 택해 준 고마운 분들 덕분에 도로는 뻥뻥 뚫려 있었다. 나를 포함해 오늘 대중교통을 이용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희(喜)






일터에 도착해서 둘러본 풍경, 이보다 더 멋진 작품이 있을까? 울타리 위에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은 참 아름다웠다. 지금이 아니면 담을 수 없을 것을 알기에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앨범에 담았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온 적이 있었을까? 이번 눈은 습설이란다.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기에 잘 뭉쳐지고 무거운 눈이란다. 나뭇가지들이 눈 담요를 버텨내지 못해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눈 담요를 덮고 있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질 수도 있겠지만, 어제오늘 내린 눈으로 대지는 촉촉이 습기를 한가득 머금고 필요할 때 꺼내 써 줄 것이라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곳곳에서 출연하는 눈사람들, 오늘의 눈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덕분에 나 역시 잠깐 동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퇴근길 아파트 현관에 들어서기 전 만난 눈사람 "오리 가족"이라는 문구와 오리 머리 위 나뭇가지 장식은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온 풍경 속에서 나의 마음은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폭설은 재난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아름다운 동화 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미끄러질까 봐 하루 종일 종종걸음으로, 거북이걸음으로 분주히 움직인 날이었지만 어제, 오늘 내린 눈이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과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게 되는 하루였다.


눈 때문에? 덕분에? 희비가 교차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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