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시대에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다
<영화 "원더랜드"의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11월의 말, 큰언니 시어머니의 부고 소식이 들렸다. 몇 년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요양병원에서 지내신다는 소식을 듣긴 했었지만 부고 소식에는 늘 마음이 무거워진다. 큰언니의 결혼식 때 잠깐 스쳐 지나가듯 뵌 것이 다였을까? 조카의 돌잔치 때 한 번 더 뵈었겠구나.
부고 문자에는 '날씨가 좋지 않으니 오지는 말라'는 걱정스러운 내용도 어어져 있었다. 당시 어마 무시한 양의 눈이 내려서 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친분이 없어도 지인의 부고 소식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 편이라 다음 날 그러니까 장례 2일 차에 남편과 함께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2022년 3월, 3일 내내 상주했었던 장례식장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모두 KF94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밥을 먹거나 음료를 마실 때만 겨우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누구 하나라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됐다가는 고인을 제대로 보내드리지 못할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 싶어 정말 조심했었다. 지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장례식장도 알리지 않았었고 부고 소식만 전했을 뿐이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년 8개월 만에 찾아간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가족들과 조문객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30년 전으로 기억을 돌려 보면 초상집 분위기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여전히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생생하게 재생해 낼 수 있다. 조문객들마다 곡 소리를 냈었고, 가족들은 연신 눈물을 훔쳤었다. 그때와 비교하자면 강산이 최소 3번은 변했을 터-요즘은 2~3년에 한 번꼴로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 장례식 문화도 정말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조문객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장소에 제법 큰 TV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TV 화면으로 고인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이 영상으로 편집되어 재생되고 있었는데 그동안 찍어 놓았던 사진 중에서 가장 화사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진을 골라놓은 듯했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하객들의 식사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장면과 같았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고 언니에게 말했더니 언니 역시 마찬가지이고, 조문객들마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면 속의 밝고 건강해 보이는 고인의 모습 덕분에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앞으로 장례 문화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믿도 끝도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인사와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나에게 언니는 최근에 "원더랜드"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머지않아 맞이하게 될 새로운 문화의 한 면이 아닐까 생각했다면서 시간이 있으면 꼭 보라고 추천을 해 주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연말의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모처럼 한숨을 돌리면서 언니가 추천해 준 영화를 비로소 재생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하는 새로운 방법'이 배경이 되어 네 개(혹은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맞물려서 진행되는 이야기였다. 내가 좋아했던 '블랙미러 시리즈'의 에피소드와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정서적으로는 근본부터 달랐다. 임종을 앞둔 이의 동의하에 그들의 의식이 원더랜드의 프로그램에 심어진다. 원더랜드에 심어진 의식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다-우주라든가, 먼 타지라든가-는 설정 하에 그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린 손녀를 위해 딸의 의식을 원더랜드에 심어 놓는 할머니의 이야기, 부모님의 의식을 원더랜드에 심어 놓는 프로그램 운영자의 이야기,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남자 친구의 의식을 프로그램에 심어 놓는 여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다른 별로 가 버렸거나 삶과 죽음 경계의 문턱에 서 있는 가족과 연인을 맞이하는 인물들은 처음엔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곧 현실을 자각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이 이어진다. 영상 통화나 음성 전화로만 이어지는 관계에서 결국 그들은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꼭 눈으로 확인이 되는 선이 있어야만 연락을 취할 수 있던 시대에서 무선 통신망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연락이 가능한 시대에 적응했듯이 원더랜드 같은 현실이 닥쳐도 결국엔 변화에 적응하겠지만 왠지 모를 두려움이 앞선다. 급작스럽게 떠났을지라도 남겨진 자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분명히 매듭짓는 것이 맞을지, 아니면 원더랜드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라도 연결고리를 이어가는 것이 맞을지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장면들을 충분히 이해한 나로서는-알 수가 없다.
또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다가오고 있을지, 그 안에서 나는 과연 정신을 차리고 살 수 있을지. 한동안 식당 안의 키오스크가 많은 이들에게 좌절을 가져왔던 것처럼 나 역시 좌절하고 혼란을 느끼겠지. 요즘 학생들은 구글이나 네이버가 아닌 Chat GPT에게 검색을 요청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앞으로의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혹은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면서 나의 마음은 단단히 다져두는 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일일 거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넘어지고 좌절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나의 어머니가 카톡 하는 방법을 한 단계씩 배우셨던 것처럼 문자에 사진이나 동영상 첨부하는 방법을 익히며 몇 번의 좌절을 거듭했던 것처럼 나 역시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나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유지하면서 두려움보다는 유연함으로 시대의 흐름에 잘 따르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듯이 -늘 두려움은 존재해 왔고, 그 두려움에 맞서면서 때론 비겁하게 외면하면서-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믿도 끝도 없는 확신을 가지며 두려움을 물리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