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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도서관에서 떠올려 본 길

묵묵히 걸어가기를

by 글꽃향기


2025년 1월의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내렸던 눈이 채 녹아있지 않았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라 기분은 상쾌했습니다.






도서관 열람실을 좋아합니다. 삼면이 막혀 있는 조금은 답답한 공간이지만 안정감이 있습니다. 상체를 공간 안에 깊숙이 넣으면 나만의 아지트가 생긴 듯한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대충 가져온 짐을 풀어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열람실 밖으로 나섭니다.








1층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습니다. 이곳을 자주 찾았던 2023년 상반기 그 시간처럼 현금을 넣어야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갑 안에 비상용 천 원짜리 지폐가 몇 장 있었습니다. 제일 만만하고 달콤한 간식 중 하나였는데 이제 한 잔에 400원이나 합니다. 무려 33프로나 올랐습니다. 엄청난 가격 인상을 실감합니다. 아침에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왔지만 자판기 커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커피에 얽힌 나의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2023년, 유난스러웠던 아래층 이웃 때문에 혼자서는 집에 있기 두려워했던 그 시절 마셨던 자판기 커피는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남편이 출근한 후 -때로는 남편이 출근할 때- 부랴부랴 가방에 읽을 책이며 공책이며 영어 책이며 도시락이며 잔뜩 싸 가지고 나와 걷고 또 걸으며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열람실에 짐을 내려놓고, 1층 로비 바로 이쯤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믹스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세상이 정말 뭐 같다며 그동안 내 인생에 펼쳐졌던 수많은 얼룩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시간에 마셨던 믹스커피는 쓰디쓴 소주 한 잔과 같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몸에 넣지 않으면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을 것만 같은, 나를 달래주는 유일한 벗과도 같은 그런 존재였을 겁니다.






커피를 들이키고 잠시 산책에 나섰습니다. 도서관은 작은 공원과 이웃해 있습니다. 역시나 오랜만에 이 길을 걸어 봅니다. 공원 한쪽은 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산에서 내려온 청설모, 다람쥐, 딱따구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멀리서 들려오는 딱따구리의 드릴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다정한 어치 부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도서관 오는 길에 만났던 오색딱따구리 이야기로 브런치 스토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소주 한 잔과 같았던 커피를 마시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걷고 걸었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저의 글길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걷다 보니 세 갈림길이 나옵니다. 2년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공원을 크게 둘러싸고 있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있었는지 잠시 멈춰 섰습니다.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 길은 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창 산행에 빠져 있었던 시절 자주 걷던 길이라 ‘익숙하고 평범한 길’이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왼쪽으로 뻗어 있는 길은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내리막길입니다. 이 길은 비교적 넓게 포장되어 있고 놀이터가 있기에 시끄럽고 특별할 게 없을 거라 여기고 걸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가지 않은 -못한- 수많은 길을 떠올려 봅니다. 그 길 역시 내가 생각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하고, 징검다리 같은 긴장감과 두려운 순간이 펼쳐져 있었겠지요. 내가 선택한 길을 되돌아봅니다. 분명 행복할 거라 굳게 믿었는데 예상치 못한 좌절로 이어졌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던 순간, 나를 잡아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생각지 못했던 행복과 기쁨을, 슬픔과 좌절을 만나겠지요. 어쩌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의 그릇에서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겠지요. 행복한 순간이 슬픔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절망의 순간이 새로운 길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꿋꿋하게 살아가야겠지요.




모처럼 평일에 찾은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내가 맞이하는 순간순간에 의미를 부여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이 시간을 기억하고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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