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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깨우침까지 선물 받았습니다.

채소를 손질하다가

by 글꽃향기


손질해 놓은 채소가 똑 떨어졌습니다. 냉장고 서랍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봉투를 꺼내 봅니다. 셀러리, 당근, 양배추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루 한 끼만이라도 몸을 좀 위해 보자고 부지런히 씻고 자르고 통에 담아 놓기를 몇 년째 거듭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바쁘다는 핑계로 온갖 불평, 불만을 털어놓으며 귀찮아했습니다. 사놓은 채소를 씻어 놓을 에너지와 마음은 없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온갖 약을 들이붓게 될 거라 생각하며 아침만이라도 채소와 과일을 꾸역꾸역 욱여넣었습니다. 이쯤이면 내 몸을 충분히 위했다고 생각하며 달콤한 것들을 입에 바삐 넣었고, 저녁 식사를 위해서 반찬가게 사장님께 SOS 구조 요청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감사히 여기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달콤한 것들을 입에 넣을 때는 행복했으나 몸은 무거워졌습니다. 사장님이 해 주신 반찬은 맛있었지만 지나치게 짜거나 맵거나 달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자극적인 것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엔 채소를 매 끼니 챙겨 먹고 내 손으로 반찬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채소를 씻기 시작했습니다. 양배추와 셀러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물에 담가 놓았습니다. 양배추가 담긴 통에는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렸습니다.




이제 당근의 차례입니다. 당근을 살 때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이냐, 세척 당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씻기 귀찮은데...'

'흙 묻겠지?’

'개수대도 청소해야 하고...'


가격의 차이는 꽤 컸습니다. 편리를 추구하고 주머니를 좀 더 비울 것인가, 노동을 감수하고 주머니를 지킬 것인가,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탓에 주머니를 조금 더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개수대에 당근을 넣고 마른 흙을 씻어 봅니다. 예상대로 잘 털어지지 않습니다. 손에 흙을 묻히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배수구가 막히는 일을 좀 더 미뤄 볼 겸 당근을 손으로 잡았습니다. 감자 깎는 칼의 도움을 받아 당근을 이리저리 돌리며 껍질을 벗겨 봅니다. 다행히 힘은 들지 않았습니다.







당근이 흙 속에 있는 동안 줄기를 뻗어내고 있었을 위쪽 부분까지 도려내고 나니 그토록 원하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새해에는 좀 더 어른이 되어 보자 마음먹어서일까요? 지저분하다, 귀찮다 여겼던 부분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흙이 묻어 있었기에 줄기를 뻗어내고 꽃을 피울 수 있었겠지요. 먹기만 했지 줄기며 꽃이며 열매며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근 역시 치열하게 살아냈을 터인데 숨겨진 이야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당근을 키워낸 손길 또한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손질하는 시간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을 텐데, 요 세 아이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내느라 치열했을 시간들, 또 다른 생명체에게 내어주었을 부분 부분들, 그리고 나에게 오기까지 거쳤을 수많은 정성을 그려 봅니다. 지금은 나를 위해 예쁘게 꽃단장까지 마쳤습니다. 글로 옮기는 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참 오래도 걸렸습니다.





나 자신과 타인을 혹은 다른 모든 것을 깊숙이 들여다보려고는 했는지, 보이거나 만져지는 혹은 느껴지는 것들로 전체를 성급히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스스로 단점이라 여기고 미워하는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뭐 이렇게 생겨 먹었냐고, 왜 그리 부족하냐 탓을 하고 있지만 어느 먼 옛날, 나의 조상들에게는 분명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지금의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 거란 허무맹랑한 생각도 해 봅니다. 나와 다르다며 겪어 보지도 않고 상대를 단정 지어 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기에 배울 것이 있을 거라, 나를 더 채워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보지 못했습니다.




채소를 손질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잎이며 줄기며 뿌리를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나 봅니다. 깨우침까지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내팽개쳤던 나의 몸을 정화시켜 줄 영양분도 오늘의 깨달음도 잘 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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