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반이 되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by 글꽃향기


"잠깐 다시 모이세요. 의논할 일이 있어요."


복도에서 부장님의 어여쁜 목소리가 들렸다. 교실 앞문 유리창으로 눈길을 돌리니 부장님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쭉 뻗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부장님은 1반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곧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복도 어디쯤인가에서 또박또박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린다.

"잠깐 우리 반으로 모여요."

어라, 그런데 2학년 부장님도 함께 있다.

'뭐지? 뭐지? 2학년과 3학년 무슨 일이 있었나?'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오늘은 1월 31일 금요일, 4주간의 겨울방학과 설 연휴를 마치고 학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종업식까지 남은 등교일은 10일, 시간이 부족하다. 학년말에 꼼꼼히 챙겨야 할 서류와 점검할 사항을 전달 받고 교실에 들어왔다. 4교시 수업을 마치고 급식 후 아이들을 막 보낸 터라 책상 위엔 방학 과제가 쌓여 있었고, 교실은 쓰레기장까지는 아니었지만 지저분해서 청소의 필요성을 느끼던 찰나였다. 선물 같은 일이 굳이 안 와 줘도 정신없을 이 타이밍에 2학년 부장님은 웬일로?!?!





"무슨 일 있어요?"

부장님 교실에 들어가서 문이 닫히기도 전에 성급하게 꺼낸 질문이었다.

"아, 자세한 이야기는 1반 쌤 오시면 그때 할게요."




분위기를 살피니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닌 것 같고, 우리 부장님은 대략 난감한 표정인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해 못 참겠다.

"왜요? 2학년 애들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이럴 때 보면 나도 성격 참 급한 듯하다.

"아, 2학년 교육 과정에 <3학년이 궁금해>라는 주제가 있어요. 그래서 왔어요."

'아하! 애들 사이의 일만 아니라면, 뭐 얼마든지!'





다른 학년 선생님의 방문은 흔히 세 가지 이유로 나뉜다. 업무 담당자로서 학년에 자세한 설명을 위해, 업무 담당자에게 메시지 전달을 위해, 그리고 학년 간 불미스러운 일을 의논하기 위해. 세 번째 경우만 아니라면야!




우리 학년 3명이 모두 모이자 2학년 부장님이 다시 입을 떼셨다.

"<기억> 교과서에서 <3학년이 궁금해>라는 주제가 있어요. 3학년에 대해 궁금한 점을 생각해 보고 형님 반에 가서 질문을 하기로 했어요. 협조 가능할까요?"





<기억> 교과서라니 <기억> 교과서라니! 내가 초딩 시절엔 <바, 슬, 즐>이었고, 언제부터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뀌더니 <나, 우리, 가족, 학교>에서 이제 <기억>까지.... 통합 교과서의 변천사로도 글을 한 편 쓸 수 있겠다. ㅠㅠ





"같은 반끼리 짝꿍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2학년 1반은 3학년 1반과 함께 이런 식으로요."

2학년 부장님이 4절지 크기의 우드락을 수줍게 살포시 책상 위에 올려놓으신다.




꼬물꼬물 또박또박 비뚤배뚤 제법 정성이 들어간 질문지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사회는 무엇을 배우는 과목인지 알고 싶어요.

6교시는 언제 끝나요?

교과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영어는 무엇을 배우는 과목이에요?

도덕은 무엇을 배우나요?

만들기는 어떤 교과서에서 하는지 궁금해요.

3학년 교실이 궁금해

반장이나 부반장은 어떻게 뽑아요?

과학 실험은 얼마나 많이 해요?




오호라, 이거 2학년 수준이 심상치 않다. 질문 내용이 꽤 심오하다. 아마도 3학년 교과서에 대해 한바탕 공부를 하고, 3학년에서 달라지는 점들을 한번 훑고 질문을 만든 듯하다. 귀요미들~!




"좋아요!"

"2학년 쌤들한텐 내가 전할 테니 각자 짝꿍 반끼리 연락 취해서 시간 정하세요!"

잠깐의 모임을 끝내고 2학년 부장님이 나를 졸졸 따라오셨다. 부장님은 나와 짝꿍인지라.




"언제가 좋을까요?"

"어, 저희도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점심시간이 다르니까 4교시는 불가능하고"

3학년 4교시에 1, 2학년은 점심을 먹는다.

"화요일 4교시, 수요일 5교시는 교과 수업이고."

"그럼 1교시나 2교시가 좋겠네요."

"아, 수요일 1교시는 강당 갑니다."

"화요일 1교시 어때요?"

"좋아요. 말하기 듣기 수업과 연계하면 되겠어요."

"그래요, 그때 봐요!"




아, 진짜 교육과정.... 이번엔 정말 재밌다. 바뀐 교과서를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형님 반 방문'은 선택 활동이 아니었나 싶다. 2학년 선생님들이 센스를 발휘하신 듯하다. 일단 잊으면 안 되니까 포스트잇에 커다랗게 써 놓고 모니터 아래 살짝 붙여 두었다.

"2학년 맞이 답변 준비!"





월요일, 아침 독서 시간을 마치고 1교시 수업이 시작될 무렵 이야기를 꺼냈다. 학년말 어수선한 분위기를 '선배님'이라는 타이틀로 다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으니 심각한 듯 입을 열었다.

"2학년 교과서에 <3학년이 궁금해>라는 내용이 있다네요. 2학년 2반 친구들이 내일 1교시에 우리반에 방문할 겁니다."

아이들은 우왕좌왕, 시끌벅적해진다. 아니, 이건 내가 원한 분위기가 아닌데!

"조용!! 자 2학년 후배들이 질문지를 보내 줬어요. 이미 같은 질문끼리 모아 놨어요."




즉석에서 답변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2학년이 공식적으로 3학년을 만나는 자리이며, 친히 우리반에 방문해 준다 하니 선배답게 답변을 미리 연습해서 의젓한 모습을 그리고 완벽한 시간을 만들어 보자고 이야기를 건넸다.

"좋아요!"

"자, 그럼 답변할 사람을 정해 보죠."




비슷한 류의 질문끼리 모아 보니 대략 11명 정도가 필요했다. 우리반은 21명인데, 이거 또 가위바위보 한다고 난리가 나겠구먼! 우리반 아이들은 유쾌 깨발랄 캐릭터가 꽤 많은 편이라서 말이다. 질문을 하나하나 읽어갔다. 어라? 손드는 친구가 별로 없다. 세상에! 야들도 후배 앞이라고 긴장되나 보다. 겨우겨우 11명을 모았다. 마지막엔 가위바위보로 할 사람을 정할 정도로 평소보다 지원자가 없었다.




"자, 질문지 가져가서 확인하고 다시 가져오세요!"






아이들 표정에서 심각함이 묻어난다.

"아, 이거 어떻게 답변하지? 괜히 한다고 했나?"

질문은 단순 명료한데 평소와 다른 모습이 참으로 어색하다.




"2학년들에겐 우리반 교실에 오는 것 자체가 배움이야. 너희가 어떻게 답하든 도움이 될 거고.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줄 수 있는 걸 준비하면 돼! 혹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와. 대신! 내일 아침엔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해!"



-나는 분위기에 따라 높임말과 예사말을 번갈아 가며 사용한다.-




답변을 공책에 적어서 보고 읽어도 되냐고 질문한다.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묻는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오호라, 이 시간 생각보다 꽤 괜찮은데!'






화요일 1교시, 2학년 짝꿍 반에서 메시지가 왔다.

'9시 5분쯤 올라가겠습니다."

"자, 이제 5분 정도 후에 후배님들이 도착하신답니다. 답변 준비한 친구들 다시 한번 맘속으로 또박또박 연습해 보세요."



"야야! 누구누구, 가방 잠가!"

"거기 쓰레기 주워!"

"책상 줄 맞춰!"




'어라? 요 녀석들 봐라! 평소엔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들은 체 만 체하던 녀석들이!'

아! 배신감 느껴진다. 요로케 할 수 있는 녀석들이 그렇게 어린 척을 했다고? 음... 일단 2학년을 맞아야 하니 이따 보자! 요 녀석들!




짝꿍 반 선생님이 앞문을 '똑똑' 두드리신다. 앞문을 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신다.

"안녕하세요. 2학년 왔습니다!"

선생님 뒤로 쪼르르 20명 남짓 쪼꼬미 귀요미들이 뒤를 따른다. 교실 분위기는 환해진다.

"우리 먼저 인사 나누고 시작할까요?"

"차려! 인사!"

"안녕하세요!"




"우리 2학년이 3학년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어요. 곧 3학년이 될 동생들에게 많은 이야기 들려주세요!"





질문을 하나하나 읽어 주었고, 답변을 준비한 아이들이 일어나 또박또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와중에 교과서를 하나하나 보여주는 아이, 공책에 쓴 답변을 줄줄 읽는 아이, 목소리를 가늘게 떠는 아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는 아이....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 펼쳐진다. 2학년 귀요미 후배님들은 반짝반짝 눈을 굴린다. 수줍어서 뒤로 숨는 아이도 보인다. 눈 안에 맘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풍경이다.




답변을 너무 짧게 준비한 걸까? 9시 5분쯤 도착해서 10분쯤 시작한 질문-답의 시간은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나와 부장님의 멘트도 포함된 시간이다. 1시간을 예상하고 왔는데 너무 일찍 끝나버린 탓에 부장님이 교실을 한번 둘러봐도 되냐고 하신다. 우리반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부리나케 책상 줄을 다시 한번 정리한다.

'하! 요 녀석들!'




부장님을 따라 쪼르르 2학년들이 교실을 한 바퀴 돈다. 교실 크기나 구조물은 모든 교실이 비슷하다. 다만 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들과 교실에 게시되어 있는 작품이 다를 뿐. 다른 반, 특히나 다른 학년 교실에 가 볼 기회가 적었을 터이니 모든 게 신기할 만도 하다. 교실 뒤편에는 수묵화가 걸려 있었는데 그 작품이 꽤나 신기하고 낯설었나 보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수묵화 수업이 생각난다. 그때 괜히 붓 들고 다니다가 친구 옷에 진기한 작품을 만들까 봐 전전긍긍했었는데. 그 난리 통에 완성된 어설픈 작품이었는데, 크레파스와 색연필로만 작품을 만들었을 2학년 눈에는 신기함만 가득했나 보다.







"자, 그럼 우리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차려! 인사!"

"고맙습니다."

"잘 가!"

"3학년 생활 열심히 해!"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얘들아~!'

교실 문이 닫히고 폭풍 칭찬을 쏟아낼 찰나였다.

"선생님, 저 대답 안 했는데요!"

"선생님, 저도요!"

"뭐라고? 분명 포스트잇 다 읽었는데!"

"여기 포스트잇 두 개 떨어져 있어요!"





허걱, 역시나 오늘도 사고를 치고 마는 담임이었다. '어떡하지? 얘들아, 그냥 넘어갈까? 대충 비슷한 답변이 있었던 것 같은데. 2학년은 이미 갔는데 어떡하지? 누구누구야, 정말 미안해. 몬 산다 정말!'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대충 넘어가 보자 주의로 생각 없이 말을 털어내고 있었다.





"선생님, 2학년 아직 복도에 있어요!"





실수는 내가 한 것이며, 아이들이 이렇게 원하는 데다가, 내가 그렇게 똑띠 답변 준비하라고 엄포를 놓았던 지라 더 이상 아이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교실 앞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고, 힘없이 문을 열었으며 2학년 부장님께 다정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부장님, 제가 실수로 질문을 두 개 빠뜨렸네요. 혹시 다시 들어와 주실 수 있을까요?"

복도를 둘러보던 2학년 아이들이 눈을 반짝인다. 손으로 입을 막는 아이들도 보인다.

'너네 좋아서 그런 거지?'

민망함은 오직 나의 몫이었다.





곧이어 2학년이 들어오고 질문과 답이 다시 오갔다. 역시나 질문은 내가 읽었고 답변은 억울함과 아쉬움을 호소했던 두 학생이 이어갔다. 다시 들어오기까지 했는데 두 개의 질문과 답변으로만 끝내고 그냥 돌아서게 하기가 미안스러워 급하게 피리 부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별별아, 리코더 연주 실력 좀 후배들에게 보여 주지 않을래? 다시 들어왔는데 이렇게 그냥 돌려보내기가 선생님이 너무 미안해서 그래. 좀 도와주라."

소년은 이내 당황한 표정이다.

"도와줘. 리코더 연주 들으면 후배들이 엄청 좋아할 거야!"

"뭐해요?"

'아싸, 넘어왔다!'

"징글벨, 그거 괜찮겠다! 요즘 그거 연습하잖아."

소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의 연주에 2학년 후배들 눈이 동그래진다. 분위기는 점점 더 훈훈해진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진다.

"리코더 배우니까 열심히 연습해 보세요."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들어와 줘서 고마워요!"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고 2학년들이 교실 밖으로 나간다. 아쉬움이 가득한지 2학년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우리 반 형님들은 앞문에 대고 손을 계속 흔든다.




"너희들, 이렇게 의젓하게 할 수 있으면서 선생님 앞에선 그렇게 어린 척한 거야?"

"선생님, 또 왜 그러세요~!!"

'에효, 요 녀석들 어느새 이렇게 컸니!'





예상치 못했던 참 좋은 시간이었다. 후배들을 눈앞에서 그것도 교실 안에서 마주하면서 그 어떤 책임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또 이렇게 귀한 시간을 몸과 마음속에 담아냈다. 학년 말 시기에, 지금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새 학년을 준비하기에 참 괜찮은 교육 내용이었다. 모처럼 교과서를 만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나에게도 아이들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참으로 보람된 시간이었다.





단, 내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후배들 앞에서 의젓하게 돌변했던 모습은 한동안 얄미운 상태로 자리 잡고 있을 듯하다. 요 녀석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이 묻어 있는 걸까 새삼 생각해 본다. 스스로 성장통은 또 얼마나 겪고 있을지! 일 년이란 시간은 참 귀하고 또 귀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나에게도 역시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란 공간 안에서 여럿과 어우러지며 무럭무럭 성장하길 그리고 안전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2월 14일에 종업식을 마친 상태입니다.



학교란 공간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저도 동료 교사들도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학교 이야기를 지금 이 시기에 올려도 될지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만,



학교라는 다수가 모인 공간에서 아이들은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배움 -단지 교과 학습만이 아닌- 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