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환자생활 #1
위험했다. 이미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던 블랙베리병(病)이 불과 며칠 전 재발해 나를 사정없이 공격했다. 근래 휴대폰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면역체계가 무너질 정도로 몰입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 무시무시한 병은 약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나의 뇌에 침입해서 인지 능력을 차단하는 버튼을 눌러 초록창에 블랙베리 Q10을 검색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다행히 그 날 낮 최소주의를 다짐하며 서점에서 홍지수 님의 <월든> 번역판을 사두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놈의 이쁜 쓰레기를 집에 들일 뻔했다.
스마트폰 시대의 본격화를 맞이하여 스스로 새 시대의 기수임을 자처한 애플이나 삼성과 달리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다 결국 대중에게 잊힌 블랙베리(Blackberry). 하지만 개화의 물결에도 위정척사를 부르짖던 무리가 있었던 것처럼 물리 키보드의 매력을 잊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블랙베리를 찾았다. 또한 브랜드가 대중에게 잊히게 되자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매력을 느끼게 된 신진 마니아층이 등장해 '존중은 취향 해주시죠'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복고의 깃발을 흔들며 블랙베리 구명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업무용 휴대폰으로 주목받기도 했던 블랙베리의 가장 큰 강점은 보안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시장이 블랙베리를 찾는 이유는 오직 디자인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취향의 영역이라 호불호는 있겠지만 요즘 나오는 휴대폰에 비하면 블랙베리가 내놓은 몇 가지 모델의 미모는 걸작의 반열에 올라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2G 시대의 피쳐폰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지만 이용자들 스스로가 휴대폰은 전화와 문자만 되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디자인 하나만을 보고 현대문명이 이루어낸 공학적 진보를 애써 누리지 않으려 할 정도이니 그 빛나는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이윽고 사람들은 블랙베리를 '예쁜 쓰레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방심할 틈 없이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강림하는 지름신께서는 사람들의 이 연약함을 포착하고 블랙베리병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셨다. 마치 감기 예방을 위해 독감 주사를 미리 맞는 것처럼 한때 블랙베리병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블랙베리를 사는 것뿐이었다. 휴대폰 하나로 못하는 게 없는 21세기라는 것을 자각한 상태로 카카오톡이 버벅거리는 구석기 문명을 체험하고 나야만 사람들은 그 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이미 병이 유행한 지 오래라 항체가 생긴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그들의 투병기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게 되어 지금은 블랙베리병의 위용 역시도 예전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불과 며칠 전 나를 공격한 것처럼 이 병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전망을 해보자면 그동안 블랙베리병은 아이폰의 넘버링이 올라갈수록 그 기세가 약해졌기에 아이폰이 14나 15 정도에 이르면 지구 상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될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5G 블랙베리를 올해 상반기에 출시한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작년 8월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점도 호재다. 또한 출시가 되더라도 스마트폰 사업을 접은 블랙베리 본사가 아닌 폭스콘의 자회사 FIH 모바일이 설계와 디자인을 맡을 예정이라는 점은 블랙베리병의 변종 출현을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러나 만일 블랙베리가 안드로이드 최신 버전의 최적화 도입에 성공하고 Q5, Q10 수준의 디자인에 쿼티 키보드를 유지한 채로 갤럭시급의 스펙을 탑재하고 아이폰의 감성 마케팅 능력을 발휘할 일말의 가능성 역시 극히 적은 확률이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인류는 블랙베리병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