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읽는 시간(by 문요한)
바운더리를 넘어서, 우리 사이
돈보다 책이 더 많은 우리 집 사방 벽면을 꽉 채우고 있는 책장들을 살펴봐도 '인간관계'와 관련된 책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비교적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별 고민이 없었다는 건가? 연애를 책으로 배우는 경지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고민이 생기면 관련 독서부터 시작하는 습성이 있는지라 있을 만도 한데, 의외로 없다.
이상하다.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사회생활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다. 가장 감수성 민감한 10대 후반 소녀시절과 30대 중반까지의 시절을 사관학교와 군대에서 초 집단생활을 하며 보냈다. 한시라도 혼자가 허용되지 않는 단체생활, 어디를 가든 줄과 열을 벗어나면 안 되는 규율이 있는 생활이었다. ‘나와 너’의 구분은커녕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세계관 속에서 오랜 생활을 보냈음에도 말이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오히려 내 책장은 내면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저자는 '타인과의 관계'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비중 있게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 장 ‘바운더리의 재구성’ 편에서도 나답게 사는 법을 강조하고 있다. ‘관계의 역사’를 이해하고 자신을 세우는 훈련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는 오티움’에 대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부터 타인과의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관계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를 탐구하고 읽어내는 것에서 풀어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들이나 구현할 수 있는 '내탓이오'나 ' 자기성찰' 또는 '자기반성' 등의 높은 경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자책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관계의 유형에서 굳이 찾아보자면 '순응형'일까? 타인의 감정에 쉽게 감염되었고,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서 내 감정을 살피는 것은 뒷전이었다. 내면을 탐구하는 것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음에도 여전히 나 자신과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은 괴리감에 많은 시간을 방황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나와의 관계,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는 ‘방어형’또는 ‘지배형’이었고, 타인에게는‘순응형’또는‘돌봄형’이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일상 속에서 관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미성숙함에 머물 땐 방어기제로 취약함으로 나타났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성숙함으로 올라설 땐 오히려 이것이 삶의 기술이 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처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심리학에 기반한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면서 처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한 편으로 내 관계의 틀에서 사유를 시작하여 부모님과 그 윗대 조부모의 관계의 역사까지 그 장대한 흐름을 의식하게 되면서, 지금 겪고 있는 갈등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역사는 큰 연결의 바다 속에서 한 방울 정도에 불과한 사건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명상을 할 때 내가 있는 공간을 의식하면서 무한한 의식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말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 속 한 구절이 있다. 홀로 산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선각자들도 있지만 나 혼자서는 온전히 성장하기 어렵다. ‘너’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반복적으로 맞이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는 관계의 달인이 되고 깨달은 자가 되어간다.
문득 30년도 지난 그 시절, 야간 행군 끝에 철모를 베고 나란히 누운 전우와 나 사이로 살랑 스치던 땀 냄새와 옅은 화장품 향이 묘하게 섞인 봄바람이 코끝에 다시 느껴진다. 마치 칼릴지브란의 ‘하늘 바람’처럼 ‘춤추며’그와 나의 사이를‘우리’로 연결하던 그때.
이제는 바운더리를 넘어서 우리 사이를 생각한다. 온통 나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과, 그물망처럼 펼쳐진 인드라망의 관계 속으로 두려움 없이 풍덩 빠진다. 바운더리를 의식하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발을 내 딛는다. 그 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으리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