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프라도 미술관 : 아름다움과 바라봄의 차이
교환학생과 이탈리아,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다 ①
1.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새벽 3시 50분이었다. 나는 샤워를 금방 하고 모든 채비를 마친 후, 전날 미리 싸 놓은 작은 캐리어를 챙겼다. 그리곤 의자에 걸터앉아 읽히지도 않는 시집을 읽었고, 그저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작은 시곗바늘이 숫자 5를 가리켰고, 외투를 입으며 스마트폰으로 우버를 불렀다. 목적지는 밀라노 도심에서 7km가량 떨어진 리나테 공항이다. 말펜사 공항은 밀라노 도심에서 가는 길이 훨씬 복잡하기에, 친구들은 내게 비행편이 있다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리나테 공항으로 가는 걸 추천해줬다. 7시 50분, 마드리드행 비행기이니 적어도 5시 40분엔 도착해야 여유가 있을 것이다. 볼을 희롱하듯 매섭게 부는 새벽의 찬바람을 맞으며 우버를 기다렸다. 이윽고 타임머신 같은 새벽 택시 우버를 타고 5시 50분에 공항에 도착했다.
2. 마드리드에 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UNWTO 본부에 가기 위해서 간다. 지난번 CV와 포트폴리오 그리고 성적표를 담당관님께 제출하여 드린 후, 미팅 날짜를 정해주셔서 날을 잡았다. 미팅 날짜는 오늘을 기준으로 다음날이며, 나는 그 내일을 위해 비행기에 앉았다. 교환학생 출국길 비행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말없이 비행기의 풍경을 바라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여행객들이다. 말소리와 억양을 들으니 독일인 같다. 큰 가방을 멘 여행객들은 바로 티가 난다.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쉬울 텐데 걱정이 들면서도, 참으로 흥미로워 보인다. 비행기가 잠깐 흔들렸는데 그들은 소리치며 마구 웃는다. 밝은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은 즐겁고 재미가 가득할 것이며, 지루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긴 반복되는 일상에서 해방된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뭐가 즐겁지 않을까.
3. 내 옆에 앉은 아저씨는 문제가 있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출발 전까지도 전화로 계속 미팅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말하며 누군가와 통화했다. 옷차림은 비즈니스 출장을 가는 것 같은데, 인상을 팍 쓴 채로 서류를 보다 비행기가 흔들리니 “피카소! 피카소!”를 외친다. 뭐가 잘못되었나? 처음에는 스페인에 피카소 박물관을 가는 건가 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Che cazzo (께 깟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탈리아어로 아주 심한 욕이다.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바라봄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니. 세상에 대한 인식은 곧장 그것에 관한 느낌으로 연결되니, 상대적 각도에서 한 대상을 바라보고 느낄 필요가 있음을 새삼 강하게 느꼈다.
4. 10시가 좀 되지 않은 시간에 마드리드 땅을 밟았다. 에어비앤비로 UNWTO와 인접한 부근에 2박 3일간 묵을 숙소를 구했다. 집주인 아주머니께서 친히 집으로 오는 길을 알려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곧장 갈 수 있었다. 체크인한 후에는 내일 가야 하는 UNWTO의 위치를 확인했고, 도보로 16분이 걸렸다. 문제없이 걸어서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을 익힌 후에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내일 인터뷰할 것을 미리 연습하고 준비한다 쳐도 여섯 시간 정도가 여유 있게 비어있었다. 내가 그간 정말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을 가기에 적격인 시간이다. 루브르 박물관,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프라도 미술관이다.
5. 영문 학생증을 제시하면, 만 25세의 경우 무료로 입장시켜준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니, 각 안내도 밑에는 삼성의 로고가 부착돼 있었다. 밀라노 두오모 디지털 전광판에서도 삼성의 광고가 계속 상영되는데, 괜히 반가웠다. 프라도는 ‘초원’이라는 뜻의 단어 ‘프라토(Prato)’에서 유래했다. 과거 귀족들은 가문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자 초원에 있는 수도원이나 저택에 수집품을 전시하고 다른 귀족 가문을 초대했다. 프라도 미술관의 소장품은 역대 왕과 왕비들이 대를 이어 수집한 것으로, 푸르고 울창한 수풀 짙은 프라도 미술관 주변의 조경을 보니 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 1층에는 세 개의 입구가 있는데, 입구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 거장의 이름으로 불린다. 왼쪽 입구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문, 중앙의 입구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문, 오른쪽 입구는 에스테반 무리요의 문이다.
6. 중앙 입구로 들어가 왼쪽 전시실 입구 안쪽에서부터 전시실 번호에 따라 순서대로 관람을 시작했다. 나는 미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없어, 일천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친구는 문외한인 내게 서양미술사 같은 책들을 몇 권 미리 읽고 가서 그림에 관한 상황들을 상상하며 보라고 조언해줬다. 그 조언에 충실하게 여러 상상을 하며 그림을 보는데,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동산> 앞에 서서 나는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가 그린 기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그림은 정말 초현실적인 상상력 그 자체였다. 그림에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괴기스러운 형상들로 가득하고 세상의 종말인지 연금술인지 하는 그의 상상 세계에 압도되어버렸다. 미술 서적에서는 보스가 그린 <쾌락의 동산>과 <건초수레>는 비슷한 주제와 구도를 보여주고 있어 두 작품을 비교하며 감상하면 더욱 재밌다고 권고해줬으나, 머리가 아파 비교해볼 수 없었다.
7. 미술사학자들조차 보스를 두고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주제를 찾느라고 골머리를 앓을 정도라고 하니, 가히 수수께끼와 미스터리에 가까운 인물로 불릴 만했다.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본 귀신 그림보다도 훨씬 더 아니, 살면서 본 그림 중에 가장 섬뜩하고 무서웠다. 이를 보며 저절로 미간에 인상을 찌푸려졌다. 사투르누스 신이 아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그린 건데, 아들은 피를 흘린 채 아버지에게 먹히는 상황이다. 고야는 이 작품을 자기 집 벽면에 그려 놓았단다.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그림을 식당에 그릴 수 있었을까. 어떤 관람객 부부는 이 그림이 참 우습다며 작품 앞에서 크게 웃으며 대화하던데, 이 역시 같은 작품일지라도 어떻게 ‘바라봄의 차이’인 듯하다. 유심히 관람을 다 하고 나오니 벌써 날은 어두컴컴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집주인은 프라도 미술관이 어땠냐고 물었고, 매우 아름답지 않냐며 두 손을 모았다.
8. 회화의 아름다움을 머리가 아파 지끈거릴 정도로, 정말 최고치로 느꼈다. 프라도 미술관의 아름다운 회화 작품들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으나, 관내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숙소 주인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해봤다. 나는 그간 아름다움에 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바라보는 이로써 각자가 생각하고 경험한 아름다움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상의 얇고 민감하고 연약한 겹겹의 감촉까지 마음으로 깊게 느낄 수 있을 때, 그게 진정 각자의 방식대로 아름다움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다움에 관한 경험은 다른 지각 활동처럼 상대적이기에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 나중에 새로운 친구든 연인이든 선후배든 가까운 사람이 생긴다면 함께 미술관에 가서 그 사람이 빠지는 아름다움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