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행은 폐기

큰코다친 해를 정리하며

by 김이곤

1. 고통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아프고, 괴롭고, 숨이 막힌다. 그럼에도 사람은 이상하게도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생각해보면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어서인 것 같다.


2. 아버지는 암과 싸우고 계시고, 엄마는 다음 달 수술을 앞두고 계신다. 할아버지도 얼마 전 암 진단을 받으셨다. 낯선 얘기였던 병원 얘기가 이젠 퍽 익숙한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유난히 편해졌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필요해서다.


3. 직업상 늘 말하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그러다 보니 말하기 귀찮고, 가끔은 정말 심하게 머리가 아프다.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진 건 아니다. 의자 하나가 부러졌을 때는 그럭저럭 버텼다. 두 개가 부러졌을 때도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다. 하지만 세 개, 네 개가 동시에 부러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4. 균형은 그렇게, 소리 없이 무너진다. 고개를 살짝 떨군 채 빠르게 걷다가 유리문에 부딪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코끝이 찌릿했다. 눈물이 날 만큼 아팠지만, 그날은 그냥 집에 와 잠들었다. 그게 하루의 끝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 회사 아나운서 한 분이 코를 보더니 꼭 최대한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 콧대 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5. 점심시간에 간 성형외과에서는 골절은 보지 않는다며 날 돌려보냈고, 이비인후과에서는 코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진료의뢰서를 들고 찾은 종합병원, 교수님은 CT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6. 기왕 부러진 김에 코를 조금 세울 수 있느냐고 농담처럼 물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 갑분싸였다. 원형 복원이 우선이고,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란다.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하필 왜 이런 시기에 이런 일까지 겹치나 싶어 원망도 났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 수술 후 찍은 셀피ㅠㅠ


‘이런, 진짜 큰코다쳤네.’

혼자서만 웃고 말았다.


7.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래된 세탁소 앞에 섰다.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을 붙여놓고도, 마지막 일이 계속 미뤄지다 결국 접었던 곳이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불이 켜졌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사장님은 예전과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걸어갔다.


8. 문득, 지금의 내 상황도 저렇게 다시 불이 켜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까 세탁소 유리문에 붙은 안내문을 곱씹었다.


세탁은 몇 분, 건조는 한 시간.

할인 안내 몇 줄이 더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마지막 줄.


한 달 보관 기간 이후에는 폐기.

세탁물은 한 달까지 보관하고, 한 달 경과 후 분실 시 책임 안 짐.


세탁소.jpg


9. 올해 내가 던진 물음표는 거의 밖을 향했고, 정작 나에게는 큰 질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게 조급했고, 점검은 항상 나중이었다. 누군가에게 막 기대고 싶다가도, 또 누군가가 위로나 조언을 하면 금세 지겨워졌다. 그간 속도에 취해, 나를 건너뛰고 산 건 아닐까?


10. 후회는 절대 안 하지만 늘 '빠른 다음'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사실, 이번엔 다른 선택지를 진지하게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큰 코를 한 번 다치고 나니, 모든 걸 조금씩 방어적으로 대하게 된다.


우리 엄마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Sit tight and don't make any decisions yet."

그 문장을 공책 맨 위에 검은 글씨로 적었다.


11. 그러고 보니 꽤 많이 시간이 흘렀다. 2025년 12월 28일, 며칠 뒤면 곧 2026년이다.

이제 보관할 만큼 보관도 했겠다.


아픔도, 원망도, 이유 있는 죄책감과 이유 없는 죄책감도.

짜증도, 불안도 두려움도.


모든 불행은 폐기하기로 한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내가 폐기하기로 했으니까.


12. 자, 이제 더 이상 묻지도, 붙잡지도 않기로 한다.

2026년 새해는 그렇게 시작해도 충분하다.


많이 고마웠지만 힘들었던 12달,

2025년은 여기까지. 안녕.


2026년의 시작


새 다이어리를 펼친다.

이상하게, 조금은 설렌다.


2026년엔 여백부터 채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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