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가 떠나신 날, 바다는 여전히 움직였다.
1. 영화나 소설, 드라마나 만화 속 주인공은 고난을 딛고 끝내 성공을 거머쥔다.
그런 이야기는 꽤 재밌다. 꿀잼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내가 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요즘 엄마가 참 힘들다. 아버지는 다행히 큰 수술을 버텨내셨고, 지금은 회복 중에 계신다. 많이 좋아지셨고, 앞으로도 잘 이겨내실 거라 믿는다. 격주마다 서울로 올라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신약을 맞으신다. 아침엔 꼭 걸으시고 밥도 잘 챙겨 드신다.
2.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함께하는 건 엄마다.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늘 그랬다. 크게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도 힘드신지, 온몸에 심한 두드러기가 자주 난다. 외할아버지는 얼마 전 수술을 받으셨지만. 회복은 쉽지 않았다. 의사는 내성균이 있어 면회를 삼가 달라고 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겐 치명적이라고 했다.
3. 그리고 24일, 외할아버지는 떠나셨다.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버지는 많이 좋아지셨지만, 아직 조문객을 맞이할 만큼은 아니셔서 집에 계셨다. 막내사위로서의 아버지의 마음은 또 얼마나 복잡했을까. 식장에 가니, 벌써 화환들이 조금 도착해 있었다. 나중에는 식장 입구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꽃이 줄을 이어 섰다, 그게 꼭 꽃길을 닮아 보였다.
4. 다 해진 양말 뒤꿈치에 구멍이 난 사람도, 값비싼 옷으로 몸을 감싼 사람도, 국회의원도, 잡부도 떠나간 외할아버지께 정성스레 인사를 드렸다. 상을 치른 곳은 동해였다. 장례식장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다가 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바다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해군 장군이든, 평범한 선원이든, 바다 앞에선 다 같은 인간이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바다를 보며 삶을, 죽음을, 그리고 살아 있는 매일의 인생을 떠올렸다.
5. 바다는 같은 모습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굴곡이 있는 인생이 그렇듯, 요즘의 나날도 무조건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 터프한 파도와 잔잔한 물결이 모두 바다를 이루듯, 삶도 그러한가 보다. 영원히 마르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바다를 보고 있자니, 우리의 삶도 바다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한히 이어지는 인생,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뿐인 유한하고 유일한 여정이다.
6.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험이란 너무나 고통스럽다. 한 번에 받아들이는 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애도라는 드높은 파도가 물러나면, 마음의 해변에는 온갖 잡다한 이상한 감정의 잔해들만 남는다. 그제야 슬픔은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낼 거다. 처음엔 이 고통과 그리움이 빨리 끝나길 바라다, 나중엔 끝날까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달콤 씁쓸한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그때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7. 따뜻한 위로와 조의를 보내준 사람들, 특히 대전에서, 서울에서, 춘천에서, 원주에서 멀리 동해까지 먼 길을 와준 이들이 고맙다. 잃어버린 감각이, 잠들어 있던 감정이 다시 깨어나는 이유다.
올해는 봄을 모르고, 여름을 건너뛰었으며, 아무래도 가을과 겨울도 그냥 지나칠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어제 풍수가가 그랬다. 묫자리가 참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