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며 귀국 일정을 연장한 적은 있었지만 편도 티켓을 끊은 건 처음이었다. 말인즉슨 내 손엔 한국을 떠나는 티켓만 들려있다는 거다. 태국의 북쪽, 치앙마이가 궁금했고, 그전에 방콕을 거쳐 궁금한 곳들을 둘러보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야지, 정도가 내 계획의 전부였다. 그래도 처음 도착해 어느 호텔에 머무를지 만큼은 즐겁게 고민해보기로 했다. 혹독한 겨울, 그리고 퇴사한 다음날 바로 떠나는 여행임을 감안해 초록의 싱그러움이 폭발(!)할 것 같은 장소가 너무나 간절했다. 방콕의 숙소를 뒤지다 식물의 줄기가 길게 늘어뜨려진 외관, 푸릇푸릇한 잎들로 덮인 벽이 인상적인 애드 립 Ad Lib 호텔을 발견했다.
늦은 밤 방콕에 도착해 도심 속 큰 병원과 복잡한 골목의 끝, 애드 립 호텔에 도착했다. 고대 시간부터 지구에 존재했을 것 같은 이 나무를 보니 얼마나 마음이 평온해지던지. 오늘은 이 나무의 자장가로 여독을 날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애드 립 호텔은 차가운 건물 외벽을 숨기고 나무와 줄기 등의 조경으로 압도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레스토랑의 벽을 덮은 식물과 곳곳의 플라워 어레인지먼트까지, 플랜테리어를 참 효과적으로 활용한 호텔임에 틀림없다.
방콕에서의 첫 밤, 창 맥주와 시킨 룸서비스는 야속하게도 너무 맛이 없었고, 배고픔을 달래며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행에 지쳐선지 기절하듯 잠들었고 아침 해가 높이 뜨고서야 눈을 떴다. 침대에 누워 정신을 차리고 있자니 창에 드리워진 식물들이 얇은 커튼을 뚫고 들어올 기세로 초록 빛깔을 과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커튼을 여니 정말 계절을 거슬러 열국의 세계로 온 것이 실감이 났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추위에 떨었는데, 이렇게 여름의 얼굴을 한 태양과 나무들을 마주하고 있다니!
신이 나서 아침을 먹기도 전에 루프탑 수영장을 먼저 올라가 봤다. 도심의 작은 섬처럼 빌딩 사이 자리한 수영장은 나무를 바라보며 물놀이를 즐기기에 적당했다. 이렇게 건물들이 있는 곳에서 유유자적 여유롭게 있으려니 저 어느 층 바쁘게 돌아갈 사무실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겨울과 여름만큼이나 온도 차가 큰 일상이다. 시선을 돌려 바쁜 풍경은 잊고, 풀 사이드에 심어진 프란지파니 꽃을 만끽하기로 했다. 동남아시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프란지파니(플루메리아)는 이곳, 태국뿐 아니라 발리, 하와이 등 내가 좋아하는 여름의 나라들에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다. 겨울에서 성큼 건너와 프란지파니 꽃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치앙마이의 137 필라스 호텔처럼 방콕 애드 립 호텔도 식물로 뒤덮인 그린 월이 단연 베스트 스팟이다. 조식을 먹으러 1층의 레스토랑으로 가면 통유리를 가득 채운 초록색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빼곡한 덩굴 식물들이 정말 싱그럽기 그지없다. 이 초록의 향연을 즐기고 싶어 야외에 앉아 식사를 했다. 무채색의 세계에서 갑자기 도처의 초록에 홀린 듯 풍덩 빠지니 에너지가 마구 솟구치는 것 같다. 이래서 컬러 테라피라는 게 존재하나 보다. 이 공간의 초록 기운에 내 안에 여름이 차오른다. 너무 그리웠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