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을 누비고 다니다 밤이 깊어졌다. 이전에 머물렀던 호텔을 들러 짐을 픽업하고 Airbnb로 예약해둔 J. No 14에 도착했다. 룸이 꽤 여러 개인 숙소임에도 야간에 상주하는 스태프는 없어서 호스트가 현관의 비밀번호를 미리 메시지로 알려줬다. 이 낯선 도시에서 어디엔가 들어갈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게 꽤 재미있다.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지기 직전이라 현관 키패드를 못 찾으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순조롭게 문을 열었다. 입구의 테이블에 내 방 키와 메모가 놓여 있었다. 꼭 어떤 게임에 참여하는 것 같다. 프런트 데스크의 인공적인 미소 보다 건물을 열 수 있는 비밀번호를 주고, 세심한 노트를 남겨둔 것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둠이 내려앉은 로비엔 작은 램프들이 켜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밝을 때 둘러보기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콕의 J. No 14 역시 인기 숙소라 내가 예약할 당시엔 선택할 수 있는 숙소가 많지 않았다. 외관이나 로비의 인상에 비해 방은 첫눈에 좀 실망스러웠다. 침대, TV, 책상, 그리고 꽤 넓은 화장실로 이루어진 방은 실용적이라곤 할 수 있지만 너무 단출했고, 특히 숙소에서 으레 기대하는 뽀송뽀송한 침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나 역시 작은 규모지만 airbnb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침구다. 체크인 한 숙소에서 낯선 사람의 체취나 머리카락 등의 흔적이 느껴지는 걸 경악할 만큼 싫어하기에 게스트를 받을 때는 잘 세탁된 새 침구를 세팅해두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J. No 14도 새 침구였으리라 생각하지만, 커버 재질이나 낡음의 정도가 쾌적한 편은 아니었다.
아침이 밝았다! 밤에는 몰랐던 넓은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다. 창 앞에 서니 옆 주택의 마당이 보여 방콕 사람들의 한가로운 아침을 살짝 훔쳐볼 수 있었다. 숙소가 주거 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오가며 현지인들의 일상의 온도를 느껴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로비의 아침도 나선형 계단과 2층 난간을 따라 늘어진 덩굴 줄기들로 싱그러웠다.
로비를 지나 군데군데 있는 테이블들에서 조식을 먹는 듯했다. 간단한 메뉴였지만 매우 맛있었고, 이곳의 고양이가 호시탐탐 내 식사를 노려 유쾌하게 먹었다. 머스탱 네로와 비슷한 느낌에 이 숙소를 골랐는데, J. No 14 역시 각종 동물의 뼈가 곳곳에 있었다. 덕분에 악어와 고양이와 함께 조식을 즐겼다. 소파로 자리를 옮기자 나비 등 곤충의 표본이 많았는데, 어릴 적 방학 숙제로 했던 곤충 채집, 표본의 공포가 밀려와 사진도 찍지 않고 얼른 자리를 떴다.
J. No 14에서 반한 건 심하게 귀여운 고양이 가족과 강아지들이다. 꼬물꼬물 모여있는 새끼 고양이들과 털 뭉치처럼 보송한 강아지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보다 보니 그냥 부채질이나 하면서 얘네들과 늘어져 있고 싶었다. 스태프들도 소파에서 강아지들과 장난을 치고 있는데 이것도 매우 친근해 보여 좋았다. 주인에 대해 물어보니 부부가 운영하는데 자주 들리진 않는다고 한다. 머스탱 네로는 오너의 취향이 확실하게 반영된 느낌이라면, 이곳은 호스트의 사진으로 미뤄 짐작해볼 때 누군가의 컨설팅을 받아 만들어진 것 같다. 많은 빈티지 소품들이 주인 없이 늘어져 있는 것 같달까. 운영 측면도 그렇고, 엣지 있다기 보단 좀 더 친근한 느낌. 친구들 여럿이 여행하면서 로비에서 술도 한잔하고, 동물들과 어울려 노닥대기 딱 좋은 숙소인 것 같다.
어젯밤, 마치 내가 이 숙소의 책임자라도 되는 것처럼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하루를 보냈다. 늘 여권을 복사해두고, 방으로 안내를 받는 호텔의 체크인 경험과는 사뭇 달랐다. 집 하나를 열고 들어가는 평소의 airbnb 경험과도 달랐고. 낯선 도시에서 어떤 건물의 액세스를 가진다는 것, 혼자만 알고 있는 오래된 비밀 장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특별한 스테이로 기억할 것 같다. 떠나기 전, 친절한 스태프가 사진을 남겨준다.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늘어진 초록 식물들과 멋지게 낡은 가구들 위 오래된 책들과 소품들이 근사한 포토월이 되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