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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Mar 01. 2021

단 하루도 아깝지 않았던 나의 20년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에 대해서 (보아 데뷔 20주년 축하글)

이 글은 2020년 11월 5일, 보아의 생일과 데뷔 20주년을 기념하여 썼던 글이다.


청소년기 내내, 여느 보이그룹이 아닌 여자 솔로가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나를, 친구들이 이상하게 여겼던 것이 기억난다. 그들은 보이그룹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요구한 적 없었던 설명을, 여자 가수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요구하곤 했다. 어디가 좋은지, 또는 왜 좋은지 등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팬질이 곧 연애감정의 연장선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주 강렬한 동일시의 열망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수를 꿈꾼 적 있다는 것은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어린이 합창 대회 CD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동네에 생긴 노래방에 주말마다 가족들과 출석 도장을 찍으며, 내가 이 동네에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른다는 것에 도취되어 있던 아홉 살이었다. 그런데 TV에서 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클 뿐인, 나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보아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빠져들었고, 그와 나를 동일시하며, 그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내가 살고 있던 지역에 대형 서점이 생기면서 음반을 청음할 수 있는 시설도 생겨났다. 음반 매장 주인과 친해져서, 온갖 종류의 가요 음반을 다 틀어달라고 졸랐다. 그렇게 장나라, 이수영, 이정현을 만났다. 하루에 딱 한 시간, 신문 뒷면의 TV편성표 페이지를 펼쳐 내가 TV를 보는 시간을 정할 수 있었는데,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그 시간을 음악방송을 보는 데 썼다. 친구들이 들을 때마다 놀라는 사실이지만, 그러니까 나는 음악방송을 시간 맞춰 챙겨보는 일을 20년 전부터 해왔던 셈이다. 음악캠프와 인기가요를 통해, 더 많은 음악과 가수들이 내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것이 보아였다. 내게 보아는 언제까지나, No.1 뮤직비디오 속 하얗게 빛나는 그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중이었고, 나는 그 말이 나에게만 전해지는 비밀 편지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의 노력을 알아봐 주기 위해, 그가 행복하게 계속 노래하고 춤출 수 있게 돕기 위해,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그래봤자 그게 어떻게 하는 것인 줄도 잘 몰라서 노래방에 갈 때마다 모든 보아 노래를 부르고 책상에 보아 사진을 붙이고 각종 내 소지품에 내 이름 대신 보아 이름을 쓰는 것밖에 못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팬이었다.


청음만 하던 것을 지나, 처음으로 가수의 음반을 샀다. 보아의 정규 2집 〈No.1〉이었다. 그 후 몇 달, 주말만 되면 컴퓨터에 CD를 넣고 음악을 들었다. 그 때 SM엔터는 윈도우OS에서 실행되는 자체 소프트웨어를 CD에 담아 놓았었다. 자동 실행되는 사진 갤러리를 보며, 음악을 들었다. 사진 속 보아는 굉장히 어른스러워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십대였을 때인데도, 눈빛은 차분하고 목소리는 깊었다. 대중 미디어는 그를 언제나 ‘소녀’라고 불렀지만, 내게 보아는 단 한 번도 ‘소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인한 아티스트였고, 덕분에 나는 늘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아틀란티스 소녀, My Name, Girls On Top을 연달하 히트시키며 한국 가요계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던 보아가, 한국 앨범을 내지 않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내 기분이 어떤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열린 공연에서 팬들이 따라 불러주는 노래에 우는 보아를 영상으로 보았을 때, 그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정말 그의 외로움에 가슴이 아팠고, 그에게 위로가 되는 장면에 내가 참여할 수 없다는 것에 지극히 자존심이 상했으며, 공백기라는 것이 왜 팬들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그 전까지 보아의 음악과 무대를 사랑했던 나는, 그 이후로 음악과 무대를 하는 보아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든든한 팬덤을 주고 싶고, 재능을 펼칠 무대를 주고 싶고, 잊지 못할 추억을 주고 싶고,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을 주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나의 팬으로서의 역사는 둘로 나뉘게 된 것이다. 받는 것에만 만족했던 2000년대와, 주는 것까지 해주고 싶어진 2010년대로 말이다.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중독적이다. 주고 나서의 반응을 보고 나면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자꾸자꾸 마음의 크기가 커지다 보면,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 내 마음과 네 마음의 크기를 재고 따지게 되곤 한다. 그렇게 해서 망쳐진 관계를 여럿 보았다. 팬과 가수의 관계도 그렇게 되기 쉬운 관계다. 그렇지만 보아와 함께 보낸 20년은 그렇지 않았다.

보아는 기본적으로 무미건조한 스타일이다. 물론 허당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목적의식이 강하고 성실한 태도로 직업을 대하기 때문에, 특정 팬과 개인적 관계를 깊이 맺거나, 팬 때문에 무리하거나, 팬들이 하는 무례한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하면서 자신의 디그니티를 망친 적이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다. 나는 그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데뷔한 연예인들의 취약한 면을 파고들어, 그들의 의존적인 면을 끌어내고, 자기 절제력을 무너뜨리며, 종내에는 자신감과 자발성을 빼앗아가는 나쁜 어른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런 사람들이 팬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 하지만 보아는, 운이 좋았던 건지 스스로 잘 통제했던 것인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팬들과의 진심 어린 교류를 하는 연예인이었다. 한때는 그것이 왠지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보아가 옳았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서로의 이면을 결코 알 수 없는 연예인과 팬이라는 관계가, 진짜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처럼 구성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니까. 오랜 해외 활동과 본인의 무뚝뚝한 성격 덕분에 맞춰진 이 절묘한 균형이, 나를 안심하게 하고 든든하게 한다. 함께 팬 활동을 하는 오래된 팬들의 성향도 대략 그렇기 때문에, 예민하고 고민 많은 편인 내가 이 팬덤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유가 말했던 ‘서로에게 빚진 게 없는 관계’. 그런 것이어서 좋다. 보아가 우리에게, 번드르르한 말이나, 귀염 떠는 애교 대신, 분명하고 선명한 무대와 음악을 주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20년이 흘러 보아의 데뷔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요계의 주 소비자가 되었다. 지금의 아이돌 팬덤을 주로 구성하는 10대 팬들에게 보아는 “이사님” “선배님” 외의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보아가 계속해서 음악을 내고, 그 중에 정말로 들을 만한 것들이 발견되는 이유는, 보아가 팬들을 위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음악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들어도 부끄럽지 않은 음악, 현 시대의 메시지를 은연중에 담아내면서도 듣기 편한 음악, 마음의 위로가 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습과 작곡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보아의 현재 위치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보아의 무대와 음악이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가, 그런 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아의 전성기가 이미 지나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애초에 유행을 탄 적 없던 사람에게, 철이 지났다는 말이 흉이나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보아가 한국 가요계 최연소로 가요 대상을 탔을 때, 그 주변에서 경쟁자로 서 있던 사람들은 터보, 플라이투더스카이, DJ DOC 등이었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과거가 소환되는 그들과 동시대를 공유했으면서도, 보아의 이름은 왠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들린다. 이전만큼의 파급력을 가지지 못한 지금도, 그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언제나 그 점을 가장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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