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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혜민 Sep 29. 2021

우리가 Next Level에 빠지게 된 이유

원제 : 에스파 리뷰인지 케이팝 리뷰인지 아젠다 리뷰인지 헷갈리는 글

이 글은 청년 인문 스타트업 길드다 의 월간 뉴스레터 〈아젠다〉 15호의 "더 높은 음악의 경지로 이끌어주마 : 길드다에 <넥스트 레벨> 전도하기!"를 읽고, 민들레 사이랩의 혜민과 모경이 함께 쓴 글이다. 〈아젠다〉 16호에 실려 있다. 유료 구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매체에 실렸던 글인데도 브런치에 싣게 해 준 길드다 멤버들께 감사드린다. 더 많은 글을 만나보고 싶은 분들께 〈아젠다〉 구독을 권한다. https://guild.tistory.com/496 


길드다의 충실한 친구이고 싶은 사람들로서, 우현, 명식, 지원, 고은의 캐릭터가 잘 드러나는 글을 메인 이슈에서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아이디어를 던지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그 흐름 속에 내가 함께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아,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는데!” 하며 맞장구를 치고 싶기도 했어요.

케이팝 산업을 바라보는 이 시대 청년들의 동경과 경멸이라는 양가감정에 대한 것이든, 케이팝을 향유하는 팬들과 리스너들 사이의 트렌드에 대한 것이든, 주변 친구들을 만나면 언젠가 한 번쯤은 화제로 삼는 것들이기 때문에요. 그 중에서도 <넥스트 레벨>은 그야말로 최근의 대중음악이 “이미 존재해 온 소스를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어떤 관점보다 그 관점에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사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우리 사이 대중문화 비평의 아이콘인 혜민이 <넥스트 레벨> 전곡을 들은 지 얼마 안 됐다는 사실이죠. (웃음) 어쨌든 대중문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가 BTS나 블랙핑크와 같은 다른 케이팝 스타들보다 에스파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에스파가 갖고 있던 특수한 정체성이라고나 할까요. SM 걸그룹 에스파는 인간 세계의 멤버 카리나·지젤·윈터·닝닝의 '또 다른 자아'가 가상 세계에서 아바타로 발현해 함께 활동한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바타들은 이름(ex. 아이-카리나)도 따로 가지고 있고, 가상 현실에서 독자적인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는 설정이죠. 그래서 사실 그룹 에스파는 4인조가 아니라 8인조 그룹이라고 할 수 있어요.


ⓒSM엔터테인먼트

왕년에 사이버가수 아담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가상 현실과 아바타라는 개념은 여전히 하위 문화 속에서 '덕후'들에게만 친숙한 존재였는데, 한국의 주류 문화를 이루고 있는 대형 기획사 중 하나인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본격적으로 이런 개념을 가져와서 마케팅적 요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체성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로 가져왔다는 게 놀라웠어요. 그래서 더 관심이 갔죠.


어째서 이런 부분이 흥미로울까?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보여준 걸그룹 K/DA 도 비슷한 컨셉이었어요. 게임 캐릭터들이 함께 무대에 서고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비슷한 느낌을 줬을 것 같아요. 다만 기존 아이돌 아바타는 이미 인기를 얻은 멤버가 가상 환경에서 '분신'을 통해 부가 활동을 펼치는 개념이라면, 에스파는 현실 멤버와 아바타를 기획 단계부터 함께 설정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8인조 멤버들이 가상 세계과 현실을 오가는 점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미 우리는 '현실' 안에서만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인터넷 세상에서 대부분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처음부터 가상 인간을 우리와 같은 존재로 본다는 것에서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의 모습을 에스파의 세계관(이자 SM엔터의 세계관인 SMCU) 에서 미리 엿보는 면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코로나 시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팬데믹 시대에 가상 세계는 우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공간이 되었고, 거기서 무엇을 상상해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에스파는 대중문화라는 장르에 있어서 큰 아이디어를 줬던 것 같아요. 에스파가 데뷔하자마자 아바타에 대한 위험성 관련 기사들이 쏟아진 걸 보면 우리가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지도 잘 보여주기도 했고요.


글 본문에서, ‘음악성’과 ‘마케팅’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 온 논쟁이기에 얘깃거리도 많지만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가수의 음악성보다 마케팅이 성공에 더 큰 영향을 준다” 또는 “마케팅이 아무리 잘 돼도 음악성이 없으면 소용 없다” 는 입장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해요. 이 입장에 대해 우리가 대화를 나누며 도달한 지점은, 아무래도 후자에 더 가깝습니다. 음악 외의 요소에 대한 마케팅 역할이 분명 중요합니다. 어째서 뮤직 비디오에 그렇게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컴백하면 SNS 챌린지를 너도나도 만들어내겠어요. 그렇지만 저희는, 마케팅을 통해 입문한 새로운 청자들에게 충분한 음악성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주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은 들어왔던 문으로 그대로 다시 나가게 될 (이런 것을 인터넷 용어로는 "입덕 회전문"이라고들 합니다)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글에서 우현은 엔지니어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했는데, 음향과 사운드의 면도 그렇지만 어떤 조합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넥스트 레벨>을 높게 평가하는 지점이 나오는데요. 알려져 있듯 원곡이 이미 존재하는 <넥스트 레벨>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에스파가 가진 세계관과 결합이 되고,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파트가 중간 전조 파트입니다. "나비스(Nævis, 에스파와 아이-에스파를 도와주는 인공지능 시스템)"가 우리를 부른다는 가사 ("Nævis Calling")와 함께 전조가 되는 그 부분에서, 청자들은 정말로 "다른 세계"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더라고요. 그런 어떤 외부의 세계관과 이 곡이 딱 결합이 되면서 시너지가 생기는 그 지점, "Nævis Calling"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도 저게 뭔가 중요한 거구나 느끼게 된다는, 그런 부분에서 재미있는 노래라고 생각해요. 최근의 대중음악에서는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컨텍스트도 중요하더라고요. 단순히 노래만 봤을때 좋았던 것들도 분명히 있지만, 이 노래를 만들기까지의 어떤 과정이 그 곡의 맥락을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중음악의 어떤 곡들을 두고, 음악성이 낮다든지 그냥 이미 있는 소스들을 그냥 결합하기만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으면 쉽게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21세기야말로 융합 예술의 시대라고 하는데, <넥스트 레벨>을 비롯한 케이팝 음악이 어쩌면 이 트렌드에 제일 앞서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 '음악'이라고 평가받지 못했던 효과음이나 음향 소스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것, 그리고 뮤직 비디오 자체에 특정한 세계관을 부여하고 연출을 더한다는 것, 그리고 A.I. 또는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한다는 것 등의 면에서요.

이미 예술에서는 기술을 결합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었어요. 작년 서울문화재단에서 기획한 'Unfold X' 와 같은 전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캔버스나 음반과 같은 고정된 형태를 넘어 디지털 미디어와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을 활용하는 예술의 형태가 많아지고 있죠. 이것을 과연 예술이라고 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원화된 사회에서 장르로 예술의 형태를 구분하기보다는, 기술을 활용한 탈장르적인 프로젝트들을 새롭게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대중문화에서도 '케이팝'이라는 장르라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게 아닌, 기존의 문화를 어떻게 잘 섞어서 지금 다원화된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까지 '대중음악'의 자리에 있었던 재즈, 락, 힙합 등의 장르와 케이팝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는데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장르들은 저항 정신을 담고 있거나 주류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 또는 '대중'을 대변하는 음악으로서 호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케이팝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편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케이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하나하나가 어떠한 저항정신도 숭고함도 없이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대중음악이지만 '대중'으로부터 오히려 비판받고 있는 지점들도 있지요.

우리가 기억하기로 '케이팝'이라는 단어가 없었을 때에는, '가요' 또는 '댄스가요'와 같은 단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돌팝'이라는 단어도 있었다는 점을 떠올렸는데요. 우리가 우상(idol)으로 여기는 존재가 너무나 자본화되어 있고, 때로는 반(反)인권적인 환경 안에서 길러졌다는 것이 우리를 가끔 슬프게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럼에도 우리가 대중으로서 계속해서 시민의식을 높여가고,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단호함을 가질 때에 우리의 우상 역시 조금씩이나마 변할 수 있지 않나 희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드다를 비롯한 우리의 친구들이, <넥스트 레벨>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대중음악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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