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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19. 2024

‘사내연애’를 그만두자  루머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2019년 10월, 그와의 루머

 [2019년 10월]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1990년생. 카메라 감독.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그 좋은 게 여자 친구(현 아내)인 ‘나’만 빼고 다른 이들만 위하는 것이란 것을 모르는 머저리.


현우 감독은 이상한 병이 있다. 바로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병’. 때문에 그는 늘 누구와도 언쟁하지 않으려 하고, 뭔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자리를 피해버린다. 때문에 나나 그 자신이 어처구니없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는 늘 유야무야 넘어가기 일쑤다. 옆에 서있는 뚜껑 열리기 직전인 나를 꼭 잡고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주문을 걸뿐.


때문에 나에게는 남편과 함께한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이 묻어둔 아물지 않은 상처가 몇 개 있다. 그것은 대체로 그의 ‘착한 사람 병’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가 그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남들을 챙기고 의식하느라 나를 외면하고 홀로 두었던 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우 감독과는 별개로 일터에서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결국 조금의 휴식이라도 얻고자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팀을 떠나기란 쉽진 않았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현우 감독과 함께 일했던 프로그램을 그만두며, 우리의 비밀 사내연애는 약 7~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더 이상 촬영장에서 모두를 속이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 행복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팀을 떠나자 현우 감독은 방심을 했는지, 숨겨둔 여자 친구의 존재를 묻는 이들에게 나의 존재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나는 질겁하며 그에게 화를 냈다. 우리의 연애 조건은 ‘비밀연애’ 아니었던가. 그는 왜 이토록 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울화통이 터졌다. 하지만 현우 감독은 친한 선후배들에게만 말했으니 걱정 말라며, 별일 아니니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나를 말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함께 일했던 수많은 이들로부터 연락이 쏟아졌다. “너 현우 감독이랑 사귄다며? 왜 말 안 했어?!”. 이미 그 팀을 떠난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메시지로나마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그들의 서운함을 달래는 것 외엔. 그렇게 하루 종일 그들의 연락에 답장을 해주며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이틀 뒤, 내가 친한 후배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백수 라이프를 시작하며 잠도 푹 자고, 밥도 꼬박꼬박 잘 먹으니 몸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기분도 점점 나아지는 듯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있는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나와 가장 친한 후배의 전화였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아 들었는데, 후배는 내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언니, 혹시 들었어요?” “아니 뭘?” “언니 지금 언니랑 관련된 이상한 소문이 돌아요. 유부남 피디랑 바람을 폈다는” 엥? 나는 순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후배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언니가 이미 결혼한 남자를 뺏었대요. 아니 어디서는 여자 친구 있는 사람을 뺏었다고 하기도 하고요” 후배는 한참을 내게 자신이 들은 소문들을 이야기하며 울먹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내 표정 또한 점점 굳어졌다. 긴 시간 끝에 통화를 마쳤다. 후배의 이야긴즉슨 내가 남의 남자를 가로챈 ‘나쁜 년’이 되어 말 많고 탈 많은 방송국 동네에 소문이 났단 건데, 대체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다음날, 다 다음날까지 며칠을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이런 ‘루머’가 돌고 있다며 걱정스러운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현우 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나를 만날 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어?” 내 질문에 그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전혀. 근데 그 유부남 이야기 말이야. L작가가 그런 거 아니야?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아. 잊고 있었다. L선배... 그녀는 나와 현우 감독과 함께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선배작가였다. 한때 그녀는 현우 감독을 짝사랑하며 가슴앓이를 심하게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오래된 이야기고 심지어 고백을 거절당한 뒤로 다른 이를 마음에 품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대체 왜... 현우 감독의 말에 휴대폰을 뒤져보니 L선배, 그녀만 없었다. 나와 현우 감독의 연애 소식을 알고 함께 일했던 모두가 연락을 해오던 그날. 그녀의 연락만 없었다.


소문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자면, 나는 누군가의 남자를 빼앗았다. 그 누군가는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여자친구’였다가, ‘아내’가 되기도 했고, 카메라감독인 현우 감독은 어느새 피디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나는 유부남 피디를 만나는 상간녀가 되어있었다. 나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 더 이상의 추측대신 L선배에게 전화를 걸기로 하였다. 그리고 오해가 있다면, 제대로 해명하고 풀고 싶었다.


전화를 받아 든 L선배는 오히려 당당했다. 현우 감독과 내 연애시점이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를 짝사랑하면서 나 또한 그를 알게 되었으니, 어찌 됐든 자기가 좋아하는 동안 마음을 키운 것 아니냐며 따져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끝난 후에야 현우 감독과 가까워졌고 한참 후 연애를 시작했다고 몇 번이나 설명을 했지만, 그녀를 말릴 순 없었다. 결국, 나는 경직된 목소리로 “그래서 이런 소문을 냈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어. 네가 말한 것처럼 유부남을 꼬셨다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던 남자를 네가 뺏어 사귀었다고. 나랑 친한 사람들한테 하소연 좀 했는데 그게 왜?” 나는 그녀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오해라며 사과를 하고,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나의 태도에 L선배는 오히려 기세등등해져 무엇이 잘못이냐, 누가 더 잘못했냐며 내게 언성을 높였다. 나는 참다못해 히스테릭한 그녀의 말을 뚝 자르고, 혹시나 이런 일이 지속된다면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경고를 한 후 통화를 마쳤다.


전화를 마치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작은 방에 혼자 처박혀서. 늦은 밤 현우 감독이 퇴근해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에게 왜 우리의 연애 사실을 상의 없이 털어놓았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어떤 신세가 됐는지 쏟아냈다. L선배와 통화한 내용까지 모든 것을. 그리고 나는 감정에 북받쳐 현우 감독을 만난 것조차 잘못된 결정이었다며 그를 원망했다가도, 아이처럼 현우 감독에게 L선배를 만나 이야기를 좀 해달라며 그녀를 좀 막아달라고 떼를 부렸다.


하지만 나를 더욱 완벽히 무너뜨린 건 L선배도, 소문도, 소문을 퍼 나르던 이들도 아닌 바로 현우 감독이었다.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직 그 팀에 남아있는 자신이 어떻게 L선배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고, 사회적인 입장이 있는데 그녀에게 이런 일로 싸우자고 할 수도 없지 않겠느냐며 나를 다독였다. 소문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진실이 아니니까 걱정 말라며. 나는 그렇게 그날 밤, 모두에게서 고립되었다.


현우 감독은 아직도 남의 시선을 가장 의식하며 산다. 그들에게 ‘착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전에는 이런 모습이 가식적이고, 남들을 신경 쓰느라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화를 내곤 했는데, 긴 시간 끝에 나는 결국 이런 그를 바꿀 수 없단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나는 누군가에게 배려를 바라고, 의지하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물론 이 또한 쉽지 않지만.


여튼 생각을 이렇게 바꾸자 때때로 웃긴 일들이 생기곤 한다. 현우 감독은 내 친구들에게 ‘다정한 남편’으로 보이고 싶어 늦은 시간 일을 마친 나를 데리러 오며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그에게 바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는 이런 예상치 못한 그의 챙김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만 보면 서로 윈윈이다.


사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 살다 보면 가장 지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마련이다. 나는 그가 이토록 피곤하게 사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어떠한 조언에도, 타이름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를 보며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많은 이들이 하루에 한 번 그의 옷장을 검사하고, 빨래 바구니를 검사하면 어떨까. 필히 그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매일을 반짝반짝하게 닦고, 모든 옷을 가지런히 벗어 놓을 텐데 말이다. 그것이 참, 아쉽다고.


☑ 남편과의 사내 연애 끝: 어째서 나의 연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시밭길을 걷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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