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것은 느끼지 못했다. 작가가 되고 다시 보는 그림은 이전과 달랐다.
지난달, 덕수궁미술관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장욱진 회고전을 보면서 김환기화백의 그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12월 3일까지로 예정되었던 전시가 31일까지 연장되었다는 것을 알고 기뻤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보기 어려울 작품을 찾아 하늘이 파랗게 개인날 부암동 언덕길을 헉헉 올랐다.
김환기는 안좌도, 작은 섬 출신이지만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중등과정을 일본에서 유학했다. 땅을 이어받고 부농이 되길 희망했던 아버지와 거래하듯 원치 않는 혼례를 치르고 첫아이가 잉태되자 다시 일본으로 가서 미술을 공부한다. 그는 많은 실험과 도전을 통해 조선의 이미지를 반추상으로 표현하는 독보적인 화가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경성에 돌아온 김환기는 현대미술을 끌어올리는 선두에서 활동하며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가 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여전히 조선의 자연과 사람 가족이 주제였다. 반 추상의 형태에서 추상으로의 길을 위태로이 걸었다. 아무도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를 제지할 수는 없었다. 이 무렵 이중섭의 소를 극찬하는 평을 쓰기도 한다. 거부이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자 그는 많은 땅문서를 소작인에게 나눠주며 정신적으로 깨끗해지고자 한다. 평생 미안하게 생각했던 부인과 이혼하고 예술의 동반자로 변동림을 만난다. 그녀는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아내이기도 했다.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고 천재화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김환기 성공의 7할은 그녀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야박한 평가일지 모른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염원하던 파리에서의 작업을 위해 그녀가 먼저 도불하여 준비한다. 마침내 김환기의 파리시대가 시작된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오히려 더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화가로 거듭나며 자신의 미술 세계를 굳건히 한다.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을 권유받고 브라질로 갔다가 운명에 이끌리듯 뉴욕으로 간다.
한국에서는 최고의 화백이나 뉴욕에서 그는 다시 신인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신문지와 전화번호부에 작품을 그렸어도 완성되어 가는 자신의 그림세계에 브레이크 없이 돌진했다. 1970년 뉴욕에 살고 있는 김환기는 제1회 한국미술대상에 심사가 아닌 작가로 응모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의 아내 김향안은 초대도 아닌 응모라는 말에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김환기는 응모를 통해 한국을 떠나 7년 동안 그가 추구한 또 다른 예술의 세계를 우리나라 화가들과 제자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미술의 세계는 넓다는 것을 보여주어 새로운 자극과 도전의식을 불어넣는 것으로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즈음 열정을 보이던 점화를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1969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4p
화가는 그리움의 물감을 붓에 찍어, 점 하나에 고향 바다와 뉴욕의 밤하늘. 친구, 그리움, 기쁨, 슬픔을 담았다. 그리움이 깊으면 더 오래 누르니 번짐은 곧 눈물이었다.
그의 150호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대상을 수상했고 점에 진심인 그의 붓질은 더욱 뜨거워졌다.
1974년 7월 디스크 수술을 위해 입원을 앞둔 그는 이 주일쯤 후에는 화실로 돌아갈 생각으로 작업하던 그림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새 캔버스 두 틀도 더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이생에 짧은 인연들과 말없이 작별했다.
회색톤으로 채워진 그의 점 사이에 선으로 남겨진 캔버스에는 지우지 못한 연필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돌아왔다면 그 연필 선은 보이지 않게 칠해졌을까? 만약 그가 돌아왔다면 두 개의 새 캔버스에는 여전히 점을 그렸을까?
미완의 작품은 마지막 이라는 표제를 달고 여전히 전시장 중심에 걸려있다. 그리고 비어있는 그의 캔버스는 이제 그를 기억하는 관객의 몫으로 남았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만나며 그림이 말을 거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이충렬 작가가 집필한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환기미술관측에서 몇 부분 삭제요청을 받았지만 예술이 순수하려면 전기의 집필도 사실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며 최종본을 출판했다. 덕분에 독자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화가 김환기의 작품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창작에 대한 그의 본심을 배운 귀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