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덕수궁. 비닐우산 위에 후드득 떨어지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오랜만에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고백을 주제로 하는 전시에서 성공한 화가와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은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이다.
‘지속성’과 ‘일관성’은 장욱진 그림의 주요한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재료를 가리지 않는 자유로움과 하나의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작 태도를 보여주며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했다. 나무와 까치, 해와 달, 집, 가족 등 일상적이고 친근한 몇 가지 제한된 모티프만을 평생에 걸쳐 그렸지만, 매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장욱진은 그의 화문집(畵文集)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에서 밝혔듯이,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화가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자기 자신을 소모시켰다. “나는 정직하게 살아왔노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 ‘진솔한 자기 고백’으로 창작에 전념했다.
그가 떠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새를 보는 아이 눈과 입의 위치가 바뀌어 부감을 표현했다.
1. 첫 번째 고백
나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
장욱진의 첫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그의 청년기(10~20대) 작품들은 고전색과 향토색이 짙게 느껴지는 모티프들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흑백과 갈색의 모노톤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욱진은 장년기(30~40대)를 거치며 명도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인 주목도를 높인다. 형태는 더욱 평면화, 도안화시키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아동화적 도상을 분할 구성하여 표현해 낸 시도나, 서양 동화 같은 정경에 동심이 천진하게 깃든 정감 어린 풍경 등이 그러하다. 이후 중년기(40~50대)에 이르면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서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들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물감층을 쌓아 만든 까칠한 질감의 마티에르가 점점 원근법적 공간을 지우고, 그림 표층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의 질감을 더욱 다양하게 조성한다. 잠시 구상과 추상을 혼성한 반추상과 더 나아가 순수 추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시 형상성(形像性)이 회복되며 장욱진 그림만의 순수 양식이 이어진다.
초기에서부터 까치가 등장하는 자화상
2. 두 번째 고백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
장욱진의 두 번째 고백, 여기서는 장욱진이 화가로서 어떠한 ‘발상’을 했고,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 구성했는지 살펴본다. ‘보고 싶은 대로 그냥 보고 있는 것’과 ‘지식을 가지고 관찰해서 보는 것’은 크게 다르다. 무엇보다 그가 그림 한 점을 그릴 때마다 점 하나, 선 하나에도 지나칠 만큼 엄격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장욱진의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가 조금은 더 진지해져도 되지 않을까?
두 번째 전시실에서는 그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을 자세히 분석한다. 장욱진 회화의 대표적 모티프 가운데 ‘까치’, ‘나무’, ‘해와 달’을 선정해 각각의 소재들이 지니는 상징성과 의미가 무엇인지, 도상적 특징은 어떻게 변모되어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전시장에 가득한 ‘까치’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고, ‘나무’는 그의 온 세상을 품는 우주였으며, ‘해와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의 매개체로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임을 보여주려 한 장욱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의 구성도 작품의 의미와 관계가 깊다. 소재를 통해 그림의 의미를 분석했다면, 이러한 다양한 상징성을 지닌 각각의 소재들이 작은 그림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얼마나 조형적 완결성을 가지는지 구성 방식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몇 가지 소재들이 반복됨에도 구성을 달리하면서 똑같은 그림이 단 한 점도 없는 것처럼, 별도로 마련한 ‘콤포지션’ 코너에서 그가 고민했던 작품의 발상과 방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소재의 변주, 그러나 모든 점과 선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3. 세 번째 고백
진眞. 진眞. 묘妙
장욱진의 세 번째 고백,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 진진묘[眞眞妙]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첫 불교 관련 작품인 〈진진묘〉로 시작하는 세 번째 전시실에서는 장욱진의 내면에 스며있는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 정신세계를 살펴본다.
장욱진과 불교의 인연은 유명한 여러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청년기부터 있었지만 실제로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작품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먹그림 역시 이 시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불교 인식과 태도가 딱히 종교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전시된 그의 먹그림들을 통해서 적어도 예술이라는 개념에서 ‘깨달음의 과정’이자 ‘깨달음의 표현’이었음을 말해준다. 나아가 그의 간결하고도 응축된 작품 경향은 서구 모더니즘의 추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오히려 불교적 사상과 개념으로 추구된 ‘절제’와 ‘득도’의 결과로 바라보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진진묘’는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法名)이다. 아내를 보살상으로 표현할 정도로 존중하고 가족을 귀하게 여겼던 장욱진은 하다못해 동물을 그려도 동물 ‘가족’을 그렸다. 가족도, 동물도 모두 소중한 인연(因緣)으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던 그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다. 특히 이 전시실에서는 일본에서 60년 만에 돌아온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가 응급 보존처리를 마치고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꼭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6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장욱진 최초의 가족도
4. 네 번째 고백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장욱진의 네 번째 고백, 여기서는 그의 1970년대 이후, 곧 노년기를 살펴본다.
흔히 이야기하는 수안보 시기부터 용인(신갈) 시기까지의 작품들이다. 장욱진이 평생 남긴 730여 점의 유화 가운데 80퍼센트에 달하는 580여 점이 이 마지막 15년 동안 그려진 것이다.
실제 1973년 전후로 그의 작품에서는 1960년대까지 주를 이루던 강한 마티에르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림의 색층을 더욱 얇아지고, 수묵화나 수채화처럼 묽은 물감이 스며드는 듯한 담담한 효과를 유지한다.
마치 먹으로 그린 동양화를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 민담이나 고사 같은 한국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삼거나, 조선시대 문인화에서 보았던 소재들도 새로이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나 민화를 연상시키는 화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킨 그의 유화는 결국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무상(無相)’으로 집약된다. 하늘로 둥둥 떠다니며 공중 부양하는 사람들, 시공간을 초월한 화면 구성을 통해 모든 사물은 공(空)이라 일정한 형태나 양상이 없음을 보여준다. 즉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應無所住]” 모든 집착을 떠난 초연함, 차별과 대립을 초월해 무한하고 절대적인 상태인 ‘무상(無相)’을 여실히 드러낸다. 압축적이며 평면적인 그의 초기작들이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속성을 추출하여 본뜬 ‘추상(抽象)’의 작업이었다면, 말년작들은 ‘무상(無相)’의 작업으로 생략과 압축, 시공간의 초월을 통해 그의 성찰과 내면세계를 표현하면서 진정한 한국적 모더니즘을 창출해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장욱진의 마지막 작품, 이미 생을 내려놓고 하늘에서 걸으며 땅에 미련이 없음을 표현했다.
장욱진 그림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에서 그는 위선을 가장 큰 죄로 여긴다고 했다. 어쩌면 군더더기 없이 본질만을 꾸준히 그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그의 진지한 고백일지 모른다.
천진하면서도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장욱진의 그림에서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것. 그러나 영원히 간직할 보물을 발견했다. 겸손한 사랑으로 채워진 자유로운 삶. 쉬운 듯 어려운 숙제 하나 내어주고 그 대신 미소 머금은 그림을 유산으로 남긴 장욱진은 훨훨 그렇게 까치와 날아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