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게벳의 노래 (작은 갈대 상자)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말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잘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위에 적은 가사는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의 가사이다.
기독교가 아닌 사람이어도 “모세”는 한 번씩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세를 모른다면 “홍해의 기적”이라도... 아니면 영화 이집트 왕자...
그 주인공 모세의 “어머니” 이야기다.
이 찬양을 인별 인플루언서인 하준맘이 불렀었다.
그때는 사실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같은 아픔을 가져서 그런가.. 그분이 걷는 행보에는 힘을 더해주고 싶고,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됐다.
저 곡도 언젠가는 제대로 들어봐야지 했다가 최근에 듣게 되었고,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당시 아들은 다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아이를 살리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표현한 노래라 더 그랬나 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는 사랑하는 우리 둘째 아이가 너무나도 생각이 났고,
요게뱃(모세의 엄마)의 마음을 묘사한 가사가 표현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고, 그 마음이 내 마음에 와닿아 생생히 전달되어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참아지지 않았다.
가사 중에 “눈물이 흐르고 흘러….”라는 표현이 있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젖도 떼지 못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을..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그저 눈물이 흐르고 흐른다는 표현할 수밖에…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역청을 바르고 또 발랐을 어미의 마음...
삶을 위해 -모순스럽지만-죽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하는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 말이다..
제발 살아달라며 절대 물이 스며들지 않길 바라며 상자를 쓰다듬었을 그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시리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천국에 가있는 우리 아이가 작고 하얀 상자에 담겨 우리 남편 품에 안겼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나 역시도 흐르는 눈물마저 방해가 될까 봐 억척스럽게 닦아내며 역청을 바르고 또 발랐을 거다.
완성된 상자에 뉘어지는 아이는 아마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멀뚱멀뚱 엄마를 바라봤겠지..?
너무나도 예뻤을 아이의 눈과 모습..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까.. 마지막인데..
어쩌면 아들을 낳은 자신도 원망되었을 것이고, 아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왕도 형언되지 않을 만큼 증오했을 것이다.
요게벳은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어 간절히 기도 했을 것이다.
나였다면...‘제발 살아다오’하는 마음으로 떠내려가는 상자를 보다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이성을 잃고 물에 뛰어들어 아이를 데리고 왔을 것 같은데..
요게벳은 어떤 마음으로 그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잘못 재단되어 어차피 쓰레기통에 들어갈 운명이지만 사정없이 구겨지는 알루미늄 포일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가슴을 후벼 팠던 두 번째 가사..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가는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이 가사를 보고서는.. 병원에서 우리 아이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연락해 주었던 때가 생각났다.
우리 둘째 아이가 곧 먼 여행을 갈 것 같으니 빨리 병원으로 오셔야겠다고.. 그동안 심폐소생술을 계속할지, 그만할지 정해주셔야겠다는 전화가 왔을 때 남편이 말했다.. ”우리 아이.. 이제 그만 편하게 해 주세요... “
그렇게 말씀드리고 병원 근처에 호텔에 있던 우리는 짐을 부랴부랴 정리하고 병원에 갔다.
분명.. 심장이 멈췄다고 했는데.. 아이의 폐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하얗다.. 그날 오전에 봤을 때랑 극명하게 달랐다. 핏기가 없이 그저 하얗다.
그 재서야 아이 바이탈을 보여주는 모니터에 눈이 갔고 드라마에서만 보던 “띠————-” 한 줄로 나타나있는 화면을 보게 됐다...
‘갔구나.. 엄마가 아까.. 우리 집에 가자고.. 조금만 더 버텨 달라고 부탁했는데... 우리 집이 아닌.. 저 천국으로 갔구나.. 엄마는 아직 거기 못 가는데..’
풀리는 두 다리와 놓아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아 아이 귀에 대고 계속 이야기했다.
“고마워,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태어나서 6일 동안 고생만 하고 가네.. 미안해 고생시켜서.. 사랑해. 엄마가 미안해.. 고마워.. 엄마한테 와줘서.. “
..........
이런 엄마의 부르짖음이 같이 서러웠을까… 함께하는 의료진들도 울고 있었다.
곧 사망선고가 들리고, 이내 아이 예쁘게 단장해서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 할 시간 드릴 테니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내 인생에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말하라면 이때를 말하고 싶다.
호흡은 멈췄지만 아직 체온은 남아 따뜻했던 아이의 볼과 내 뺨을 맞닿았던 그때.
지금도 기억한다. 벌써 3년 전이고 아이를 안고 있던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니 잊을 수가 없지.. 다시는 느낄 수 없는 순간이니까. 그 순간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비록… 우리 아이의 눈을 뜬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내 품에 안았던 그때만큼은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다.
귀여운 비니를 쓰고, 작은 얼굴과 듬직한 몸으로 편안히 눈을 꼭 감고 내 품에 안겨있던 우리 둘째 아이.
볼과 볼을 맞대어 한참을 울었던 그때를 잊지 못한다.
살아서는 너를 안아줄 수 없었어서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되뇌며 보내기 싫어 한참을 맞대고 있었던 작은 볼..
내 뺨에 다 차지도 않을 만큼 작았던 내 아이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어도 이렇게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라는 가사가.. 어떤 상황인지 너무 잘 알겠어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쏟아내느라.. 배안이 다 꼬이는 것 같았다.
아이가 떠나고 삶을 살아갈 의지도, 의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남은 자로 살아보니 이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겠어서, 내가 떠나버리면 남편과 큰 아이에게 또 남은 자로 살아가는 고통을 주는 거니까
그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어서..이고
두 번째는 “천국에서 만날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기독교이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합니다.. ’하는 의미보다
-이래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실존해야만 하는 곳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믿는 사람은 죽어서 가는 곳, 은혜로 가는 곳, 믿음으로 가는 곳, 이 아닌
내 아이가 먼저 가 있는 곳. 나를 기다리는 곳. 아이를 만날 때 부끄럽지 않게 이 생을 다 마치고 엄마가 멋지게 널 보러 왔어라고 말할 곳이 된 거다.. 빨리 가고 싶은 그곳... 우리 둘째와 영원히 살고 싶기에 반드시 실존해야만 하는 곳.
그렇기에 이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항상 그리움과 아픔과 손을 잡고 있지만….
기독교인으로 오랫동안 살면서 나를 통해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내겐 왜 어떤 사명도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둘째 아이가 하늘나라에 가고 나서 사명을 발견했다.
내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분이 주신 사명이다.
그래서 아이가 먼저 떠났어도, 남편이 암 선고를 받았어도, 내가 우울증에 허덕이면서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내게 삶이란.
천국에 가서 만날 둘째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또 내 삶의 주인이신 그분을 만났을 때 왜 그렇게 나를 고생시켰냐고 묻고 따질 거기 때문에 반드시 허락하신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미션과도 같은 거다.
아무것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지금..
어떤 방향성도 알지 못한 채 걸어가고 있는 것 같기에 ‘’ 나의 인생을, 우리 남편의 인생을, 우리 아이들의 삶을 당신께 맡깁니다. ‘하는 고백으로 살아간다.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나의 사명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