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찬란히 빛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놀라운 광경과 함께 감동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그 아름다운 순간은 오랫동안 눈앞에 잔상으로 남게 되는데요. 그 놀라운 풍경을 때로는 그림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하죠. 혹 눈앞에 펼쳐진 감동의 순간을 풍경화로 남긴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어떤 그림으로 남기고 싶으신가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풍경, 클로드 모네의 손에서 새로운 풍경화가 탄생합니다.
19세기말 파리의 작은 전시장에선 놀라운 그림 하나가 대중 앞에 공개됐습니다. 바다 위 일출의 순간을 담은 풍경화였는데요. 어스름한 새벽녘을 밝히는 강렬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죠. 푸른 바다 위에 떠오른 붉은 태양빛, 오묘한 색감과 단순한 붓질로 감각적인 작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150년 전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이 풍경화를 둘러싸고 떠들썩해졌습니다.
“벽지만도 못한 그림에 참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권총에 물감 튜브를 장전해 캔버스를 향해 발포하고 뻔뻔스럽게 서명한 작품이지 않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아마추어의 미완성작 같다.”
화가라면 참기 힘든 온갖 악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이 그림은 정신적으로 해로운 그림이니 전시장에 방문하지 말라는 소문도 돌았죠. 굴욕적인 비난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던 작품은 바로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입니다. 〈인상, 해돋이(1872)〉는 오늘날 모네의 작품 중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대표 작품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사랑하는 인상파의 상징적인 작품이기도 하죠. 어디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 주인공은 150년 전 파리에서는 왜 찬밥 신세였던 걸까요?
〈인상, 해돋이 (1872)〉는 당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전시회에서 처음 소개되는데요. 1874년 4월 15일 오페라 극장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사진가의 작업실 2층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립니다. 당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일명 ‘제1회 무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 예술가 협회전’이라는 혁명적인 전시였죠.
이전까지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오직 파리 살롱전의 높은 관문을 통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은 젊은 작가들이 작은 갤러리 공간을 대관하여 직접 전시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19세기 프랑스에서는 국가에서 심사하던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에게 합격점을 받아야만 전시회에 작품이 걸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그림도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알아봐줄 때 비로소 빛나는 좋은 작품이 되죠. 그런데 젊은 화가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되기까지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어떤 해에는 절반 이상의 작품이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살롱전의 심사기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젊은 화가들이 뜻을 모으기로 하는데요. 자체 전시회를 기획하는 것이었죠. 이제 누구나 원한다면 전시회에 작품을 걸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전시회는 우선 시선을 끌기에는 성공합니다. 전시 첫날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작품을 보러 찾아왔는데요. 이들의 파격적인 첫 전시회는 성공했을까요? 사실 이곳에 방문한 많은 관람객들은 작품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닌 비웃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그림이기에 따로 전시를 하는 것인지 호기심에 발걸음 했던 사람들이 결국 작품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시된 작품 중 모두에게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건 〈인상, 해돋이 (1872)〉였죠. 가장 새로운 그림은 주요 공격 대상이었는데요. 전시 기간 내내 형편없는 그림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모네가 자신의 어린시절 고향, 항구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르아브르의 항구에 앉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던 그 순간 붓을 잡고 빠르게 완성한 작품입니다. 정말 빠르게 그려진 그 속도감이 보는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데요. 이른 아침 안갯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자세로 짧은 시간만에 완성합니다. 정말 놀라운 속도였죠. 그래서 〈인상, 해돋이(1872)〉를 직접 눈으로 보면 물감이 너무 얇아 캔버스의 하얀 천이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만큼 빠르게 자신의 눈에 비친 순간의 인상을 담은 작품이었죠. 이는 당시로서 꽤 신선한 시도였습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그림은 세밀한 스케치를 하고 이후 몇 년의 시간 동안 물감을 섬세하게 쌓아 올려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1800)〉과 같은 작품이었죠. 루이 14세에 의해 시작된 행사였던 살롱전은 기본적으로 왕권에 도움이 되는 그림만을 선호했습니다. 그림의 주제는 역사화, 종교화, 신화만을 인정했죠. 무언가 이상화시키고 역사적인 서사를 담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림의 표현법 역시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만 했죠. 차분하고 연한 색들을 조합한 색채 그리고 정교하게 정리된 선으로 마치 사진과도 같은 디테일한 표현법이 요구되었습니다. 원근법도 정확하게 지켜 황금비율의 이상적인 구도를 갖춘 그림들이었죠. 마치 손에 잡힐 것 같이 3차원의 세상을 캔버스 안에 그대로 재현해야 했습니다. 화가들 개인의 주관이나 감정의 표현보다는 정해진 법칙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뿐이었는데요. 당시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는 재능이 뛰어난 화가보다 엄격한 규칙에 충실한 화가를 더 선호했습니다. 과거의 그림들은 예술이라기보단 기술의 영역이었죠.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이 아닌 화가들의 개성이 담기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모네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풍경화에 비해 모네의 그림은 순식간의 빠른 붓질로 그려졌습니다. 심지어 그림의 대상도 대단한 역사화나 인물화가 아닌 풍경화였죠. 당시 풍경화는 살롱전에서 취급하지 않던 볼품없는 장르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시선으로 모네의 그림은 대충 그린 그림, 벽지만도 못한 그림이었던 것이었죠. 모네의 그림은 거칠게 빛의 흐름을 아주 빠르게 담아냅니다. 실제로 〈인상, 해돋이(1872)〉를 마주하면 물감이 얇게 칠해져 있어 하얀 캔버스 천이 비치는데요. 그만큼 빠른 붓질로 순식간에 완성한 작품이었습니다. 이전 시대까지 미술은 섬세한 붓질로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마치 사진과도 같은 또렷한 형태를 그려야 했던 규칙이 있었죠. 하지만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재현하는 역할은 이제 그림이 아닌 사진의 영역이었습니다. 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은 다른 해석과 접근이 필요해졌죠. 이때 모네가 찾은 길은 바로 “빛”이었습니다.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모네의 노력이 짧은 붓질로 나타난 그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