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소의 외침
이중섭은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의 부유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납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지만 든든한 집안 덕에 큰 어려움 없는 어린시절을 보내는데요. 어릴 때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며 일찍부터 본인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타고난 화가였던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는데요. 그 당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화가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미술 유학을 했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은 모두 배울 수 있었던 부잣집 막내 도련님 이중섭도 1936년, 21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향합니다. 집안의 기둥 형의 경제적인 지원과 어머니의 정신적인 지지로 당당한 발걸음으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20대 초반, 원하는 것은 뭐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의 청춘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하는데요. 1937년 도쿄의 사립제국미술대학에 입학해 새로운 화풍들을 익혀 나갑니다. 이곳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장욱진, 이쾌대 등 많은 예술가들과 우정의 시작이 된 곳이기도 했죠.
당시 일본은 빠르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미술을 소개하고 있었죠. 이중섭 역시 피카소의 입체주의 스타일과 마티스의 야수주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습니다. 서양의 화풍에서도, 학교에서 많은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한 걸음 도약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시절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요. 황소만큼이나 아니 본인보다 더 사랑했던 마사코를 만납니다. 대학교 2학년 당시 후배였던 마사코에게 사랑에 빠지는데요. 학교 실기실에서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뺏기고 캠퍼스 커플이 됩니다. 둘은 훗날 함께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전도가 유망한 미술학도 커플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남자와 일본 여자의 만남은 쉽지 않았는데요. 함께 학교를 다닐 때는 캠퍼스 커플로 데이트도 자주할 수 있었지만, 마사코의 졸업 이후 자주 만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럼에도 이중섭은 마사코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고 그의 마음을 담은 그림 엽서를 마사코에게 전했습니다. 1940년부터 3년간 꾸준히 엽서에 직접 그림을 그려 러브레터를 보냈는데요. 1941년에는 무려 80통의 편지를 그려 보냈다고 합니다. 둘의 사랑이 열렬했던 1941년이었습니다.
당시 이중섭의 그림 엽서를 보면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도 엿볼 수 있는데요.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마사코의 신발이 보도블록에 끼면서 발가락을 다쳤습니다. 그때 발가락을 치료해주다 이중섭의 손에도 피가 묻었던 날을 떠올리며 그린 추억의 작품이 〈발을 치료해주는 남자(1941)〉입니다. 이날의 추억으로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이라고 부르곤 했는데요. 체형에 비해 발이 유난히 크고 못 생겼다고 지어준 애칭이었죠. 때로는 그 길쭉한 발가락이 아스파라거스와 닮았다고 해서 ‘아스파라거스’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은 결실을 맺습니다.
1945년 4월 마사코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걸고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훗날 마사코가 기억하길 이때 자신이 타고 온 배가 한국으로 올 수 있는 마지막 배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이중섭만을 바라보고한 용기 있는 결심이었죠. 부산항에 도착해서도 물어물어 사랑하는 이가 있는 경성까지 찾아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5월, 둘은 결혼식을 올렸죠. 결혼식을 마치고 이중섭은 일본인 아내를 위해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 많은 여인’이라는 뜻의 이남덕(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선물해줍니다. 덕 많은 남덕 덕분이었을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의 광복과 함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태현과 태성이 태어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단꿈에 젖을 수 있었죠.
‘진실하고 귀여운 나의 남덕 군…
소중한 발가락 군이며, 당신의 깜빡이는 귀여운 눈이며, 나의 커다란 손가락 등을 많이 써 보내주기 바라오. 대향의 머릿속과 가슴은 귀여운 남덕 군의 일로 꽉 차 있소오. 당신을 힘껏 포옹하고 몇 번이고 입 맞추오. 그럼 건강하오.’
- 중섭 대향 구촌(이중섭 화백의 이름, 호, 별칭 순) -
하지만 그의 행복한 신혼생활은 아주 잠깐의 반짝임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대는 이중섭의 편이 아니었죠. 광복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이중섭의 집안에서는 가장 역할을 하던 형이 실종되고 그의 집은 폭격을 맞아 무너졌죠. 이중섭은 혼란 속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더 이상 원산에 머무는 것이 어려워지자 남한으로 넘어가야 했는데요. 형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와 형수는 설득되지 않았고, 아내 남덕과 두 아들 그리고 조카 이영진을 데리고 국군 해군함정에 오릅니다. 그렇게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원산에서 부산으로, 제주까지 내려갔죠. 이때만 해도 중섭과 남덕 그리고 가족들은 잠시 남쪽에서 몸을 피해 있다가 금방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그린 작품들과 귀중품은 모두 원산에 어머니의 품에 맡기고 내려왔죠. 하지만 그는 원산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아무도 몰랐죠.
작품 〈싸우는 소 (1954)〉는 강렬한 색채와 강한 필체로 그려졌습니다. 푸른 소와 흰 소가 서로 뿔을 맞대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데요. 전쟁으로 인해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는 한국전쟁의 모습을 그린 이중섭의 작품으로도 해석됩니다. 한편으론 처참한 전쟁 속 어떻게든 죽을 힘을 다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이들의 강한 의지를 담은 작품이기도 하죠. 이중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리던 원산의 부잣집 막내아들은 없었습니다. 이중섭은 전쟁이라는 처참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남덕의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빠이기도 했으니까요. 피난민들과 함께 창고에서 지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희망을 품고 더 남쪽으로, 제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