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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 운명이라면, 너무 슬프잖아

팔자론과 개척론은 이렇게 다릅니다.

by 임오션 yimOcean

어느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남편이 대뜸 말을 꺼냈다. ‘암도 가족력이라며? ’


지금껏 그걸 몰랐단다. 사십몇 년을 살면서 저걸 모르고 있었다니, 이 남자의 상식선에 깜짝 놀랐다. 기본 중의 기본상식 아닌가.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기 전에는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합니다, 같은.


+ 당뇨도 유전이고 고혈압도 유전인데 암도 유전인 건 당연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하면서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시아버님의 당뇨력에 노출되어 있어서 신경 쓰며 살면서도 암마저도 유전의 굴레에 엮여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 듯했다.



그런 남편을 보니 일전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오갔던 얘기들이 마침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난 지 20년이 넘은 모임인데, 친구들의 부모님이 병환이나 사고로 돌아가시는 일들이 생기면서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부모님들의 건강이나 거취 얘기가 주로 오르내린다. 누구 아버지가 편찮으시다, 누가 부모님을 모시고 실버타운 임장을 다녀왔다 하는 레퍼토리들 말이다. 이날은 친구들 중 한 명의 얼굴이 어둡다 싶었는데,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을 때쯤에 얘기를 꺼낸다, 엄마가 폐암이래.


일찍 발견했고 착한 놈이라서 잘 치료는 될 거 같다면서 그래도 다행이지 하고 희게 웃는다.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다 이런 얘기를 하다 어떻게 발견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유전’이란 단어가 그 존재감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모친의 큰오빠가 몇 년 전에 폐암수술을 했고, 막내도 최근 폐암 선고를 받았는데 예후가 안 좋길래 혹시나 싶어 검사를 했더니 암 소견을 받았다고 했다.




+ 남매 네 명 중 세 명을 같은 병으로 잡아놓는 몹쓸 유전자라니까 그게. 강력하지.

- 그러네.

+ 근데, 뭐 암 말고도 세상에 가족력 많지. 성격도 유전이고, 입맛도 유전이고, ADHD도 유전이고, 술, 도박도 유전이고.

- 유전이라기보다는 환경 아닐까. 부모의 양육방식이나 식단 같은 거.

+ 나는 그것도 잘 모르겠더라고. 몸속의 유전자가 그런 환경을 불러들이는 거 아닐까 싶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말이긴 하다. 부모세대와는 다르게 살고 싶으면서도 문득 나 스스로 엄마랑 똑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 어이없으면서도 속상할 때가 있다. 유전이라는 건 무의식의 화마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상기하며 행동과 사고를 제어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속수무책으로 끌려들고 만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편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럼 인생도 다 타고 난대로 산다는 거야? ‘라며 반문을 했다. 수정란 상태에서 있을 때부터 그 세포에 새겨진 기억들로 살다가 유전자에 새겨진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 의사결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안에 있는 유전자에 의해 바이어스가 생긴 결과물들.



+ 응 난 상당 부분 타고난다고 생각해. 팔자라니까. 꼬우면 다시 태어나는 걸로.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라고 선언한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을 위해 존재를 영위하며 자기 보존은 곧 자기 복제를 의미하고 자기 복제는 유전자의 기능에 의존한다고 기술하였다. 저자는 인간의 사회, 문화적 활동들이 유전자의 지배하에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이란 “유전자에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먹고 살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꾸역꾸역 살아가며 유전자에 새겨진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는 환경에 허겁지겁 반응하고 내 유전자가 이끄는 대로 사랑에 빠지고 직업을 가지고… 그렇게 엉겁결에 살다가 지는 걸 보고,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기복신앙에 천착하는 누군가는 ‘팔자’라고 갈음하곤 하지만 저 영국의 진화생물학 석학은 참 팬시하고 골져스하게 표현해 놨다. 팔자와 이기적 유전자, 어감의 간극이 참 크면서도 또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평소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대해 진심이었던 남편은 내 스탠스가 맘에 들지 않는 듯했다.

- 그런데 말이야. 그 모든 게 다 운명이라면, 그거 너무 슬픈 일 아닌가.




…그 또한 운명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식어가는 쌀밥과 찌개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당신의 유전자도, 내 유전자도, 배부르기를 원하니 더이상의 쓸데없는 설전은 삼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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