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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신 뱁새의 꿈

죽도록 뛰어도 니 기록은 못 찢어요. 내 가랑이만 찢어져요.

by 임오션 yimOcean

단신 뱁새의 꿈

- 이젠 받아들이기로 해요. 죽도록 뛰어도 니 기록은 못 찢어요, 내 가랑이만 찢어져요.




러닝 인구가 늘면서 러닝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선수 출신들이 러닝 클래스를 열고, 마스터즈 대회를 석권한 아마추어 선수들도 브이로그 등을 찍으며 인플루언서의 대열에 합류한다. 2024년에는 마라톤 네임드의 끝판왕, 황영조까지도 유튜브씬으로 들어왔다. 뭐가 되었든 자기 홍보가 중요하다보니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통해 꾸준히 본인들을 노출하고자 한다. 그런 과정에서 이런 주법이 중요하다, 저런 호흡법대로 해야 한다, 신발은 이런 신발을 신어야 한다 (또는 신지 말아야 한다) 등의 본인들만의 이론 내지는 철학들이 삐져나온다.



러닝 커뮤니티에서는 한동안 케이던스 주법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었다. 케이던스라는 건 쉽게 말해 1분에 발구름을 몇 번 했냐는 것인데, 이 숫자를 180 정도에 맞추는 게 이상적이라는 이론이다. 1분에 180번, 1초에 3번 발구름을 하려면 총총총 뛰게 되는데, 이게 오버 스트라이딩 하지 (보폭을 너무 크게 뛰지) 않도록 방지해 주기도 하고, 주자의 발목이나 무릎에 충격을 줄여주기 때문에 부상을 방지하는 데에도 효율적이라고 한다.


러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배경지식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뛰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며칠을 성큼성큼 뛰었더란다. 이후로 남겨진 건 시큰거리는 발목, 후덜 거리는 허벅지였다. 인터넷을 서칭하고 난 뒤 보폭을 좀 더 줄이고 통통통 리듬감을 느끼며 뛰어보니 케이던스는 자연스럽게 180 언저리로 올라갔고 무릎도 더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와 케이던스 주법 이거 좋은 거구나? ‘



그런데, 어느 날 SNS에 지인이 이런 코멘트를 올렸다.


[케이던스 180, 그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그치의 키는 180cm가 넘는다. 다리 길이만 나와 10cm 이상이 차이 날 테니, 다리가 허공에 떠있는 체공시간도 다를 것이고 발구름을 교차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케이던스 180이라는 숫자는, 키가 작은 나는 크게 의식하지 않고 평소의 보폭을 유지하기만 하면 가볍게 달성할 수 있지만, 장신의 러너에게는 ‘굳이’ 의식하고 뛰어야만 달성가능한 어떤 표상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꿀벌같이 붕붕거리며 오종종 뛰는데, 누구는 가젤처럼 설렁설렁 뛰어도 저 앞으로 치고 간다. 나는 컴퍼스가 짧으니 힘들게 뛰어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다.


단신은 슬프다.

반올림해서 가까스로 160cm 인 내 키는, 사실 초등학교 5학년때 완성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때 까지도 다른 애들보다 껑충하니 컸고, 중학교에서도 반에서 중간 이상의 키는 되었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땐 키 순으로 50명 중에 7번째였던가 했다.


평소 살찐 아이들이 그냥 싫었다던 내 엄마는 내가 많이 살찔까 봐 무서웠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밥 두 공기 먹을라치면 도끼눈을 뜨며 그만 먹어라, 이것도 먹지 마라, 저것도 먹지 마라, 그렇지만 끼니는 절대 거르지 마라며 상당히 규제를 가했다. 내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자 엄마는 ‘내가 너를 그때 못 먹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 하고 후회했다. 러닝을 하면서 신촌 러너스 클럽에서 발 모양 분석 서비스를 받은 적이 있는데 측정해 주시던 분 왈, ‘이 발 사이즈면 키는 지금보다 8cm는 더 크셔야 되는데… 발이 크시네요.’ 키와 발사이즈의 상관관계가 그저 미신은 아니라는 걸 직업상 수많은 발을 보며 체감했다는 전문가의 말을 들었을 땐 난 좀 서글퍼졌다. 나는, 더 클 수 있던 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에 가득 차 아무리 염불을 외운 들 닫힌 성장판은 열리지는 않는 법. 내 키는 이제 줄어들지만 않아도 땡큐다. (대신에 막냇동생은 양껏 먹고 큰 덕에 나와 키 차이가 많이 난다. 나는야 시행착오의 심벌 K-장녀)




내가 대발이라니!!!



몸을 쓰는 체육 분야는 참 잔인하다. ‘근면, 노력, 성실’ 이 단어들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이 단어들 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적자생존의 제1 원칙, 애당초에 타고난 놈들만 살아남는 원초적인 세계가 체육계이다. 체형이든지, 수행능력이든지, 특정 운동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몸 위에서 노력도 성실함도 빛을 발한다. ‘타고난 놈이 노력하면 위너가 된다’라는 말이 절절히 체감된다. 비단 엘리트체육이 아니라 생활체육의 영역에서도, 오늘 하루 달리는 데서도 느껴진다. 나는 3년째 달리고 있지만, 운동을 갓 시작한 몸 좋은 초짜에게 곧 제쳐지고 말 수준의 달리기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



취미로 하는 활동을 가지고 남이랑 비교하지 말자고 매번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자꾸 황새를 좇아가는 뱁새처럼 다급해진다. 나 스스로 나는 단신 뱁새로소이다, 하고 되뇌어봐도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뛰어봤자 벼룩이고 잘 뛰는 사람들 따라 했다간 내 가랑이만 찢어질 거라는 걸 가슴깊이 아로새겨야 한다니.


그래도, 불편해도 인정하자. 나는 단신 뱁새로소이다. 나의 꿈은 잘 뛰는 당신이 아니라, 어제보다 잘 뛰는 나인 걸로 하자. 이걸 인정 안 하면 어쩌겠나.




지난 2월 9일, 미국 미식축구(NFL)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힙합가수 켄드릭 라마 Kendrick Lamar 가 나왔다. 셀린느의 플레어진을(부츠컷) 입고 나왔는데, 내 눈에는 그의 청바지 핏이 너무 괴상해 보였다. 무릎부터 벌어져야 할 바짓단이 정강이부터 퍼져있고,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바지뒷단은 언제라도 뒷굽밑으로 쓸려 들어갈 것 같아 보는 내가 조마조마했다. 마치 내가 옷집에서 긴 부츠컷 청바지를 입고 거울을 볼 때 느꼈던 그 어색함이 영상에서 느껴졌다(켄드릭 라마의 키는 165cm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이었던 건지, 사람들은 그의 패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해당 청바지는 삽시간에 품절되었다. 마치 바지핏 유행의 대전환을 가져온 용자처럼 켄드릭 라마의 이름은 패션 뉴스에서 샤라웃 되고 있다. 무대 퍼포먼스를 잘해서 단신도 커버가 된 것 같은데, 문득 머릿속에서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음, 나도 한번 스웩을 부려서 단신을 압도해 볼까?



IMG_9934.jpg 활짝 웃는 얼굴로 Drake 후두려패는 Kendrick La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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