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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Mar 04. 2021

멕시코에서 만난 고구려, 보남파크의 비와 벽화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20

멕시코에서 고구려를 보다


광장 중앙의 1호 비석(오른쪽)과 맞은 편의 돌계단과 건물군이 있는 아크로 폴리스

나 나름대로 우리 역사 속의 고구려 이미지를 찾는다면 광개토왕비, 장군총 같은 계단식 피라미드, 그리고 고분벽화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야시칠란 인근의 보남파크 유적에서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만났다. 이 유적들에서 놀랍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친근함을 느낀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다고 생각되었다.


보남파크는 6세기 야시칠란과 싸워 야시칠란의 속국이 되었다. 보남파크 유적이 야시칠란을 향하고 있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종속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야시칠란은 야시칠란의 장인들을 고용하여 1호 건물의 벽화를 제작하였다. 이 벽화들은 현재 멕시코에 전하는 마야 유적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좋은 벽화로 알려져 있다. 보남파크라는 이름도 '채색된 벽'이란 뜻이다.

찬무안 2세의 전성기를 기록한 1호 비석. 높이가 5미터가 넘는 비석 앞에서 여인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야시칠란의 속국이었던 보남파크는  9세기에 이르러 야시칠란이 몰락하면서 함께 몰락하였다. 야시칠란의 몰락 원인은 인구의 과잉과 그로 인한 농지확장 그리고 삼림의 벌채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우수마신타 강을 둘러싼 쟁탈전에서 이웃 국가들에 패배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주의 기가 내려오나? 찬무안 2세 비석의 신비감


광장 중앙에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때로는 커다란 캔버스에 찍힌 점 하나가 캔버스 전체를 채운 효과를 주는 것처럼 이 두 비석이 갖는 광장에서의 비중은 대단했다. 


두 비석 중에서 흰색의 큰 비석이 찬무안 2세의 전성기(8세기 말)를 기록한 1호 비석이다. 빗돌의 흰색과 비면에 새겨진 화려한 의상의 찬무안 2세는 마치 신비로운 기운이 감싸고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크로 폴리스의 맨 위 계단에서 내려다본 중앙 광장의 풍경


비석이 갖는 이러한 신비감 때문인가? 여행객으로 보이는 중년의 두 여성이 1호 비석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 비석처럼 신비감에 싸인 고대 유적에는 우주의 기가 모인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저 비석 앞에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올리고, 또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여성들을 보면서 오래전 수곡리 암각화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십여 년 전인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일본에서 온 나이 든 어떤 여성이 안동의 수곡리 암각화를 찾아와서 암각화는 보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간 일이 있다. 그는 암각화 유적에 우주의 기가 모여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 나는 그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지함에 숙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성은 찬무안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가? 아니면 우주의 기를 받아들이는 의식을 치르는가?

우리 역사 속에서 이렇게 큰 기념물로는 광개토왕비를 들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이 6미터가 약간 넘는데 찬무안 2세 비석은 5미터가 약간 넘는다. 광개토왕비는 높이만 큰게 아니라 비석의 네 면 폭이 비슷하여 큰 바윗돌이 서 있는 듯 무게감이 있다. 그런데 이 찬무안 2세 비는 폭이 2.6미터이고 두께가 50센티 정도로 얇아서 넙적한 판석을 세워놓은 형태로 전형적인 판석비이다.


희게 빛나는 비면은 여덟 조각으로 쪼개진 것을 다시 퍼즐 맞추듯 복원한 것인데 얇은 두께로 인해 비면의 중간에는 미쳐 맞추지 못한 퍼즐로 인해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지안까지 가서 광개토왕 비석의 거대함을 보고 어깨에 힘을 주곤 한다. 마야 문명이 남긴 최대 비석인 보남파크의 1호 비석도 멕시코인 또는 마야의 후예들에게 가슴 두근대는 자긍심을 주는지 궁금하다.


기념사진처럼 정교한 그림과 캡션


앞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지만 마야의 비석들은 단순히 글자만으로 역사를 기록한 우리의 비석과는 그 기록의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곳의 비석은 마치 기념사진을 보는 듯이 세밀히 묘사된 그림들과 그림을 설명해주는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의식용 지팡이를 짚고 있는 찬무안 2세. 등 쪽의 사각형 틀에 새겨진 것이 마야 문자로 새긴 기록이다.

그래서 글자 만으로 알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하고 있어 당시의 역사를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아주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은 마야인들이 비석에 역사를 기록하는 매우 뛰어난 방식이라 할 수 다.


1호 비석에 묘사된 찬무안 2세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상체는 갑옷을 두텁게 입었고 두 다리는 맨 살이 드러나 있다. 얼굴은 큰 코와 눈동자가 강렬하게 묘사되어 강인한 무사의 모습이 뚜렷하다. 발 밑에는 띠처럼 보이는 마야 문자가 보이는데 왕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다. 그 아래 복잡하게 보이는 그림은 마야인들이 최상의 신으로 모시는 옥수수 신이라고 한다.


아크로 폴리스의 비석


피라미드형으로 축조된 건물군. 올라가는 입구 양쪽에 비석이 서 있다. 왼쪽이 2호, 오른쪽이 3호 비석이다. 맨 오른쪽의 보수 중인 건물이 벽화가 있는 1호 건물이다.

광장의 중심 1호 비석의 서남쪽에는 산의 경사면에 돌계단을 조성하여 여러 건물과 비석을 배치하였다. 광장에 서서 보면 그것은 마치 피라미드 신전처럼 보인다. 계단의 중앙부로 올라가면 최상부에 작은 건물 셋이 마주 보이고 그 왼쪽으로 레벨을 한단 높여 같은 크기의 두 채의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들은 지붕 위에 루프콤을 갖추고 있어 작은 규모라도 매우 중요한 신전들로 생각된다.


마야인들은 신과 관련되는 모든 시설은 사람들의 생활공간보다 훨씬 높은 곳에 만들었고 그곳에 도달하려면 높은 계단을 이용하여야만 했다. 그래서인가, 신전이나 신성성을 가진 기념물 등은 모두 높은 계단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호(왼쪽)와 3호 비석.


이곳을 사람들은 아크로 폴리스로 부르고 있는데 높은 계단의 아래쪽에 두 개의 비석이 있고 다시 그 위쪽으로도 한 개의 비석이 있다. 아래의 두 비석은 아크로 폴리스로 올라가는 입구에 마치 수문장처럼 보인다.


2호 비석과 3호 비석으로 번호가 붙은 이 비석들 역시 찬무안 2세와 관련된 것이다. 1호에서 3호까지의 세 비석을 통하여 찬무안 2세의 가계와 가족관계 그리고 이웃 나라들의 정복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것도 광개토왕비에서 보는 것과 유사하게 읽히는데 영웅적 제왕의 기록이 갖는 보편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벽화가 있는 1호 건물과 같은 평면의 테라스에 있는 비석

2호 비석의 찬무안 2세는 두 여성이 앞 에서 그를 향해 서 있다. 앞은 그의 어머니고 뒤는 그의 부인이라고 한다. 1호 비석에서도 찬무안 2세가 입은 의복의 화려함이 돋보였지만 2호에 묘사된  아내와 어머니의 의복 그리고 머리에 쓴 관도 놀랍도록 사실적이다. 특히 지금도 중부 멕시코의 마야 여성들이 즐겨 입는 위필(huipil)이란 옷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어 마야인들의 전통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장면은 찬무안 2세가 몸에 구멍을 내서 피를 흘리는 일종의 희생의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읽히고 있다. 아내와 어머니는 희생의식을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아내는 종이로 만든 바구니를 들고 왕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 태움으로써 신을 기린다고 한다. 고대 멕시코에서는 신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바치는 희생 의식을 치르는데  왕도 거기서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이 신을 위해 심장을 꺼내 바치는 것을 생각하면 몸의 일부에 상처를 내 약간의 피를 흘리는 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파괴의 역사가 함께 담긴 천 이백년 전기록들

3호 석실 북벽의 인물로 얼굴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이전 세력의 권력을 제거하기 위한 행위라고 하는데 일종의 유감주술적 방법이라 하겠다.


벽화가 있는 건물은 유적 내의 1호 건물이다. 이 건물은 내부의 뛰어난 벽화로 인해 그림의 신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791년 11월 11일에 왕에게 바친 건물이라 하니 무려 천 이백 수십 년이 흘렀다. 이 그림의 사원은 20세기 초에 미국의 사진가가 미국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도 마야 원주민들이 건물 안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고 하니 이 유적은 외부세계에 알려지기 전에도 계속해서 신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호 석실의 입구 문과 상인방 1호.


벽화들은 군데군데 표면의 석회가 떨어져 없어진 부분도 많이 있으나 상당 부분 선명한 색채와 더불어 그림의 내용도 알아볼 수 있다. 그림의 표면이 떨어져 나간 부분들은 인위적으로 석회를 긁어내어 알아볼 수 없게 한 곳도 많다. 주로 얼굴 부분이 인위적으로 훼손되었다. 이는 벽화 제작의 시대가 지나고 이후 통치권을 승계한 세력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이전 왕조의  힘을 제거하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석굴사원에서도 볼 수 있고 또 조선 초기 석불 훼손 등과도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남파크의 벽화를 돌이킬 수 없게 훼손한 사람들은 이 유적을 처음 외부에 소개한 사진가와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어두운 실내에서 벽화를 밝게 보이게 하기 위해 벽화 위에 등유를 뿌렸다고 하는데 이야말로 벽화를 급격하게 훼손시킨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벽화의 표면에 채색이 상당 부분 없어진 곳은 아마도 등유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벽면의 하층 부분은 다른 색 페인트를 덧칠한 듯 보이기도 하고 표면이 많이 퇴색 또는 탈락된 곳이 많다. 이는 등유로 인해 훼손된 부분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훼손의 흔적들은 유적을 처음 훼손시키는 사람들은 언제나 연구자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다. 나 자신 또한 조사를 위해 국내외 유적들을 찾아 여러가지 작업들을 하면서 부끄러운 일들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을까? 머리가 어지럽다.


세 개의 방으로 연결된 왕위 계승 이야기


1호 석실 남벽. 하층에는 세 명의 왕족이 케찰 춤을 추고 있고 상층에는 다른 왕궁의 사신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라 한다. 오른쪽 단상에 안겨 있는 아기가 왕의 후계자라 한다.


그림들은 세 개의 방에 나뉘어 있다.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의 상인방에는 야시칠란에서 본 것처럼 왕과 관련된 그림과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이 상인방의 그림에는 아직도 마야의 청색이라고 부르는 푸른색의 물감이 남아 았어  본래는 선명하게 채색이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출입문의 양쪽 벽에도 프레스코 벽화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세 방의 그림들은 모두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이다. 찬무안 2세의 아들과 손자에게 이어지는 왕위 계승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개의 방에 모두 281 의 인물이 있는데  상당수는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마치 고구려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고분 등에서 처럼 그림 옆에 인물명 등의 글씨를 남긴 것과 비슷하다.  

1호 석실 남벽 상층의 왕의 후계자로 보이는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 이 아이는 최근 여성으로 밝혀졌는데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1호 석실로 들어가는 문의 상인방에는 보남팍의 왕 찬무완 2세가 적군을 잡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또 문의 양옆 벽면에도 채색 벽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맨 위에만 조금 남아있다. 1호실 문을 들어서면 방안의 네 벽과 천장까지 원색의 그림들이 가득 차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방의 구조는 장방형으로 벽의 상부는 대각선으로 안으로 좁혀져 좁은 천장을 만들고 있다. 벽에 그린 그림들은 회칠을 한 위에 채색화를 그린 소위 프레스코 벽화이다.


덩실대는 춤꾼들과 악기 소리 가득한 1호 석실


1호 석실 동벽의 벽화. 악대들이 연주를 하면서 행진하는 모습이다.

1호 석실은 왕실의 행사를 위한 장소라고 하는데 벽화의 내용은 찬무완 2세가 고위 인사들과 만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중앙벽이라고 할 수 있는 남쪽 벽에는 왕의 후계자와 왕의 형제들의 춤추는 모습, 그리고 동벽에는 일열로 악기를 불며 남벽을 향하여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그림은 남벽 상층의 오른쪽 단 위에 올라선 사람과 그가 안고 있는 어린 아이다. 이 아이는 대체로 왕위 계승자로 알려져 왔는데 최근 여성으로 밝혀지면서 그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계승자로 주목되는 인물들은 3호 석실에 있는 춤추는 남자들이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2호 석실 남벽. 찬무완 2세와 군사들이 포로를 잡는 장면.


마야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행진하는 악대와 춤을 추는 사람들, 귀족들로 보이는 화려한 장식의 인물들, 그리고 인물들에 쓰인 문자 캡션들은 그대로 고구려의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속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층 그림의 배경으로 사용된 푸른색은 소위 마야 청색(Mayan blue)이라 하는 색깔이다. 마야 청색은 마야의 고대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파란색 안료이다. 무기질과 유기질을 모두 사용한다고 하며  AD 500 년경부터 사용되었다니 사용한 역사는 매우 긴 편이다. 1호 석실에서는 행진하는 그림이 많은 벽화의 하층에 주로 사용되고 있고 2호 석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층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3호 석실 역시 상층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왕족이나 귀족들의 의식을 행하는 배경색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푸른색의 배경은 마치 블루 스크린을 사용하여 촬영하는 스투디오와 같다. 이러한 배경의 처리는 보는 사람에게 주제의 인물들이 앞으로 돌출된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효과를 준다.


2호 석실 북벽. 찬무안 2세가 창을 창을 잡고 서서 전쟁 포로들 앞에 서 있다. 창을 잡듯이 앉아서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은 손톱이 뽑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다.

전쟁의 참혹함과 포로들의 비명이 가득한 2호 석실


2호 석실에는 792년 치러진 전투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전투는 동맹국 야시칠란과 함께 인근의 다른 종족을 정복한 것이라 한다. 북벽에는 창을 잡있는 찬무안 2세의 앞에 포로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을 내밀고 있는데 손톱을 뽑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들은 몸에서 피를 뽑아 신에게 제사하는 의식이 매우 다양하게 있는 듯한데 이러한 행위가 신의 이름을 빌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은 종교나 문화적 현상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잔학하다.


석실의 남벽은 찬무안 2세와 그의 군사들이 이웃 나라를 공격하여 포로를 잡는 장면이 복잡하게 전개된다. 북벽에는 포로를 잡은 찬무안 2세가 포로들 앞에서 포로의 손톱을 빼서 피를 뽑아내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었다.


2호 석실의 동벽(정면)으로 전투 장면이고 좌측은 북벽으로 승리한 왕과 포로들이 묘사되었다.
2호 석실 전쟁의 모습으로 가득한 서벽과 남(좌) 북벽

2호 석실의 밑에서는 무덤 하나가 발견 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정확한정보가 없으나 찬무안 2세로 보는 견해가 많은 듯 하다.


2호석실이 세 방 중 가운데 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건물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덤일 가능성 이 많다. 그렇다면  세개의 석실은 무덤을 꾸미기 위한 것인가? 벽화의 방들이 찬무안 2세의 치적과 후계자 선정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덤의 주인공은 찬무안 2세가능성은 없을까?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축제의 환호 가득한 3호 석실


3호 석실의 문과 상인방 3. 문의 좌우 벽은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를 덧 씌웠다.

왕위 계승과 승전을 축하하는 듯 악대의 축하 행렬과 화려하게 장식된 옷을 입고 춤추는 사람들이 벽면 하층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상층에는 혀에 구멍을 뚫어 흐르는 피를 단지에 담는 유혈 의식을 치루는 왕족들이 단상 위에 앉아 있다.

3호 석실 동벽. 하층에는 축하 의식의 장면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머리에 깃털 장식을 달고 허리에 수술 장식을 단 날개를 착용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머리는 지워졌다.
3호 석실 동벽 상층 벽화. 왕족들이 혀에 구멍을 뚫어 피를 흘려 항아리에 담는다. 맨 위의 천장 부분의 붉은 곡선들은 피를 뿜는 초자연적 존재로 해석된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는 피라미드 위에서 심장을 꺼내는 장면 등 이 방에는 축제와 함께 끔찍한 희생제의 그리고 유혈의식 등이 함께 등장하여 기묘한 앙상블을 만들어 낸다. 마야인들의 세계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꺼번에 펼쳐 보여주는 곳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을 사는 나의 편협한 생각일까?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이런 의문을 자주 떠올렸었다.


벽면의 하층에는 푸른색의 커다란 깃털 장식을 머리에 쓰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왕자들이라고 한다. 왕자들은 붉은색으로 표현된 피라미드 계단을 배경으로 춤을 추고 있으며 피라미드 위에서는 포로의 몸에서 심장을 떼어내는 의식이 치러지고 있다.

3호 석실 남벽. 붉은색 피라미드 계단 상부에서 심장을 적출하는 의식을 치르는 그림으로 해석된다.

춤추는 왕자들이 입은 옷은 허리에 날개 장식을 달았고 머리에도 깃털 장식을 크게 달고 있어 이런 장식들이 이들이 섬기는 독수리와 관련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앞에 소개한대로 북벽에 그려진 인물들의 상당수는 뒷 세대에 의해 얼굴 부분이 훼손되었다.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을 제거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3호 석실은 왕위 계승,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축제의 환호와 유혈의식을 비롯한 희생제의가 한꺼번에 등장하면서 마야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판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3호 석실 서벽. 동벽과 같은 축하 의식 장면이다. 상층에는 악대가 음악을 연주한다. 하층에는 붉은색의 피라미드 계단을 배경으로 깃털 장식의 춤추는 사람들이 완전하게 보인다.

새들에게는 극락, 사람에게는?


보남파크 유적의 숲에서는 검정과 노랑색이 어울어진 예쁜 새들을 많이 볼 수있다. 극락조라고 한다. 극락에 사는 새란 뜻이다.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왠 극락인가? 전쟁과 포로의 몸에서 심장을 꺼내는 잔인함과 왕위의 계승 곧 왕의 자리를 둘러싼 쟁투가 한 덩어리로 뭉쳐서 눈을 어지럽히는 곳, 이곳은 정말 극락인가? 아름다운 숲을 보면서 사람에게는 몰라도 새들에게는 극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남파크 유적지에 서식하는 극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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