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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Feb 23. 2021

밀림 속 고대 도시, 야시칠란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19

우수마신타 강. 건너 편이 과테말라이다.

속의 비밀 도시


우수마신타 강의 좌우 풍경은 무척 풍요롭게 보였다. 배가 유적 입구의 강변에 닿았을 때도 이 곳에 어떤 유적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유적은 바로 강가에 인접하여 있었지만 거대한 고대도시가 이 울창한 숲 속에 있을 것이라는 낌새를 알려주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유적을 둘러싼 밀림 속에는 아직도 많은 마야인들의 흔적들이 숨어 있다.

도시는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갑자기 나의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마치 이야기 첫머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훅크(hook)에 덜미가 걸린 듯 낙엽 쌓인 광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도시가 번성했을 당시에야 지금처럼 숲 속에 몰래 숨어 있듯이 자리하지는 않았겠지만 오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비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세상에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유적이 존재한다는 것 만해도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 건너는 과테말라다.


유적의 입구쪽 길에서 밀림 속으로 들어와 숨어 있듯 자리잡은 작은 아크로폴리스

재규어들의 왕조


4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야시칠란의 역사는 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8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4백 년에 걸쳐 이웃 지역과의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지배영역을 확장해 갔다. 조그만 자연마을에 불과한 야시칠란은 우수마신타 강 유역을 대표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이곳이 가장 번성했던 때는 8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다. 유적 안에는 전성기의 왕위에 있었던 빠하로 하구아르 4세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빠하로는 새라는 뜻이고 하구아르는 재규어의 뜻이다. 왕의 이름에 재규어라는 이름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도 흥미 있다.


재규어는 마야인들에게 힘의 상징이자 신성의 상징이고 신앙의 대상이다. 의 이름에 재규어를 붙인 것은 마야인들이 왕의 존재를 신성한 존재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의 이름에는 이 외에 발람이라는 말도 많이 나오는데 역시 재규어의 뜻이다. 곧 이 나라는 재규어의 힘과 신성성으로 통치되던 재규어의 왕조였던 셈이다.


작은 아크로폴리스의 42호 건물

하늘이 된 돌비석


마야인들이 돌에 기록을 남기는 전통은 중국이나 한국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돌에 기록을 새겼을 뿐 아니라 나무의 속껍질을 이용하여 만든 종이로 책을 만들기도 했다.  다만 유럽의 침략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책들은 사라지고 없고 지금 남은 것은 종교의식을 위한 기도서와 순례자의 여행기록 등 겨우 네 권뿐이라고 한다. 이들이 근대적 학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면 금석학이 등장했을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들이 돌에 기록을 남기는 방법으로 특이한 것을 들자면 출입문의 상인방에 새긴 것이다. 상인방이란 건물에 들어가는 현관문 위에 가로로 걸친 부재를 말한다. 말하자면 문틀의 윗부분에 해당하는 부재이다. 마야의 석조 건물은 문도 모두 돌벽으로 만든 것인데 양쪽 석벽의 위를 덮은 넙적한 판석이 바로 상인방이다. 이 상인방의 밑 면에 그림과 글씨를 새겨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기록한 것을 상인방비라 할 수 있다. 내가 견문이 짧은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처럼 상인방에 새긴 비의 형태는 멕시코 외의 문화에서 본 일이 없다.


42호 건물 출입문 위의 42호 상인방 조각. 건물 번호와 상인방 번호가 우연히 일치한다.


건물의 문에 들어서서 머리를 위로 치켜들면 상인방비의 그림과 비문이 보인다. 이 비석은 문의 천장이 되었으니 하늘이나 다름없다. 하늘을 올려 보면 왕의 모습이 하늘에 떠있다.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왕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기록화와 캡션으로 된 비문구성


유적에서 본 것 중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상인방비는 42호 건물에 있는 세 개의 출입문 중 가운데 있는 42호 상인방이다. 여기에는 빠하로 하구아르 4세가 깃털 장식의 옷을 입고 화려한 모자를 쓰고 서 있는데 앞에 신하 한 사람이 도끼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왕과 신하의 사이의 아래위에는 장방형의 틀 안에 마야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러한 문자는 왕의 뒷 쪽에도 보인다. 신하의 뒷 쪽이 깨져서 아쉽지만 등 쪽의 선들이 어느 정도 살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는 알아볼 수 있다.


빠하로 하구아르 4세의 상을 새긴 42호 상인방. 왕의 앞에 신하 한 사람이 서 있고 왕의 뒤쪽과 신하와의 사이에 문자가 새겨진 새겨진 것이 보인다.

대부분의 비석들은 이처럼 어떤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그림과 그 내용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문장을 구성하는 글자 또한 그림으로 된 것이라서 여러 종류의 그림들이 예술적으로 배치되고  그것이 부조라는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에 따라서는 그림은 없고 온전히 문자만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그림 없이 문자만 있는  22호 상인방비


이러한 상인방비는 대부분의 건물 출입문에 있었으며 현재 60개 정도가 조사되었다. 상태가 좋은 것은 멕시코시티의 국립 인류학박물관에 가 있고 또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 외국으로 유출된 것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에 설명한 42호 건물에도 본래 세 개의 상인방비가 있었는데 한 개는 대영박물관에, 그리고 또 한 개는 멕시코시티의 인류학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이것 하나라도 현장에 남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비석으로 보는 놀라운 기록 문화


야시칠란에서 보는 많은 유물들 중에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들과 비석들이다. 이러한 조각 예술품 중에 대표적인 것은 위에 소개한 상인방비이지만 더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것을 들자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판석을 세워 만든 비석이다.


1호 비석. 전성기의 야시칠란을 통치한 빠하로 하구아르 4세의 기념비.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비석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3호 비석. 비석의 머리가 마치 타원형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방형이었다. 깨진 조각을 붙여서 현재처럼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유적의 비석들은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이것은 기록된 문자가 그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도 관계있는 듯하다. 많은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하려면 넓은 캔버스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왕들과 관련된 것이므로 통치자로서의 위대성을 표현하는 데에도 대형의 비석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석 중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것은 35호 비석이다.  야시칠란 유적에서 가장 잘 보존된 비석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비석은  빠하로 하구아르 4세의 어머니를 기념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면에 묘사된 인물이 그 어머니 상이다.


21호 건물 안에 있는 35호 비석.

비석은 높은 석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건축물 속의 석단에 서 있다. 출입구는 좁고 길게 나있고 입구를 들어서면 비석은 마치 무대처럼 꾸며진 석단 위에 석불 입상처럼 서 있다. 이 건물은 말하자면 비각에 해당된다. 위에 소개한 1호나 3호처럼 광장에 홀로 서있는 비석들도 본래는 비각 안에 있었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비석만 특별히 비각을 만들어 모시듯이 세워놓은 것인가?


비석 뒤에는 많은 그림과 글씨들이 새겨진 벽면이 있어 비석의 주인공을 호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오른쪽은 비석 정면으로 빠하로 하구아르 4세의 어머니 상이다.

비석에 새긴 내용의 구성은 다른 지역의 비석들과는 매우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비석을 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비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인물상이며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인물들이 주인공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림의 주위에 소위 마야 문자라고 하는 문자를 새겨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비석의 구성으로 비석은 무척 아름다운 예술품이 되었다.


2호 비석, 613년 세워짐.


하늘을 향한 구원의 손짓인가? 지붕 위의 루프콤


마야의 건물들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내부가 비교적 복잡하게 보인다. 중앙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건물은 아예 별칭이 미로라고 붙었다. 이 건물은 19호 건물로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그림자의 미로라는 공간을 통해 건물의 뒷쪽을 볼 수 있다. 건물 안으로 한 걸음만 들여놓아도 건물 속이 어지간히 복잡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마야 건물들의 외관상 특징을 꼽자면 단연 지붕 위에 세운 루프콤(roof comb)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치아파스 지역으로 와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팔렌케 유적의 왕궁 건물들의 지붕 위에 있는 루프콤의 흔적들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 높은 구조물로 서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없었다. 십자가의 사원 지붕을 보고서야 루프콤의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건물 앞 광장에는 풍화로 인해 내용을 잘 알아볼 수 없는 비석이 하나 서 있고 광장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33호 건물이 하늘 위로 우뚝 서 있다.


지붕 위에 우뚝 선 루프콤은 멀리서도 그 건물을 뚜렷하게 각인시키며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딕 성당의 뾰족탑처럼 하늘을 향해 높이 높이 올라가려는 인간의 염원을 표현한 듯 보였다. 그러나 루프콤들은 그것이 구조적인 면에서나 역학적인 면에서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건축 자체가 내구성이 취약하여 현재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드문 편이다.  야시칠란에서 루프콤이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은 33호 건물 밖에 없다.


왕의 궁전이라는 별칭이 있는 33호 건물은 중앙 아크로폴리스의 언덕 위에 있으며 야시칠란 유적을 대표한다.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루프 콤은 건물을 웅장하게 보이게 하여 밀림 속에 있으면서도 푸른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다. 이 건물은  756년에  빠하로 하구아르 4세가 지었다고 한다. 건물이 선 곳은 산 정상으로 발아래로 광장과 강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나무가 무성해서 보이지 않는다.


33호 건물의 정면과 측면. 측면에서 보면 루프콤 부분이 사다리를 마주 댄 모양으로 보인다.

왕들의  축구 시합


건물의 기단부 앞에 1단으로 계단석처럼 돌을 깔아 마치 지대석처럼 보이는데 이 돌들의 정면에 흥미로운 조각상들이 있다.  상형문자 계단(Hieroglyphic Stairway)이라고 부르는 이 계단석에는 구기 경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각상들이 있다. 구기 경기장은 멕시코에 온 이후 마야 유적지마다 볼 수 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경기가 어떻게 치러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볼 수 없었다.


그림 속의 구기 선수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얼굴에는 가면을 쓴 듯한데 땅에 댄 무릎에는 무릎 보호용구를 댄 것이 보인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오는 공의 표면에도 그림과 문자가 새겨있는데 무릎을 구부린 인물이 거꾸로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구기 경기 모습이 새겨진 상형문자 계단


경기를 하는 사람은 빠하로 하구아르 4세와 그의 전임 왕들이라고 한다. 이전에 보았던 구기 경기장에서는 전쟁포로 또는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사람들이 선수로 참여하여 이기는 팀 또는 지는 팀이 신에게 희생물로 선택된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왕들이 선수로 참여한다고 하니 이전의 구기 경기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상형문자 계단은 757 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는데 건물이 756년으로 편년 되어 있으니 건물을 완성한 후에 건물의 최종 마무리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혹시 건물을 완성한 후 왕들 사이에 구기 경기를 한 것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그림인가? 궁금하다.


상형문자 계단의 세부. 선수들의 복장이나 공에 새겨진 그림을 볼 수 있다.
중심광장(Grand Plaza)에 있는 구기 경기장

미로 속의 신전과 제단석의 문자들


미로라고 부르는 19호 건물을 뒤에서 보면 지붕 위의 루프콤이 있던 흔적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상부가 무너지고 아랫부분 일부가 겨우 남아 있는 루프콤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건축물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다.


19호 건물을 앞에서 보면 세 개의 출입문이 보이고 문과 문 사이의 벽에 각각 하나씩의 벽감이 있다. 여기서 벽감이라고 한 것은 벽에 길게 장방형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을 만든 것인데 적당한 표현이 없어 붙여본 이름이다. 건물의 앞에는 건물 앞마당이 층단의 형태로 되어 한 층을 올라설 때마다 계단을 통해 윗 단의 마당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중심 광장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그림자의 미로라고 부르는 19호건물 후면 공간. 오른쪽은 19호 건물 정면.

건물 바로 앞마당에는 제단석으로 알려진 둥근 북처럼 생긴 돌이 있다. 본래 세 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가운데 것이 측면의 조각 상태가 잘 남아 있다. 이러한 제단석은 주요 건물마다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건물에서도 확인된다. 마치 중국의 석고문(石鼓文)이 새겨진 석고를 보는 느낌이다.


제단석 측면에는 인물상이 있고 인물상 주위에는 마야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인물상도 자세히 보면 사각형의 틀에 맞춰 앉아 있어서 마야 문자로 추정된다.


 루프콤이 있는 지붕은 미로라는 별칭이 있는 19호 건물이다. 오른쪽은 19호 건물 뒷쪽 내부의 일부이다.
19호 건물 앞의 제단석. 모두 세 개가 있었던 듯한데 형태가 잘 남은 것은 중앙에 있는 이것 하나뿐이다.
19호 건축물 앞 제단석에 새겨진 인물상들의 일부. 펼친 사진으로 만들었다.


도둑맞은 마야 문명의 정수들


유적을 여기저기 돌아보면 허물어진 석조 건축물들이 숲 속에 숨어 있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야시칠란이 몰락한 것이 9세기 전반이라고 하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유럽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림과 사진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미루어 짐작하건데 야시칠란은 거의 천년 동안 밀림 속에 폐허로 있었던 셈이 된다.


1882년 영국의 탐험가 알프레드 모드슬레이(Alfred Percival Maudslay)는 이곳에 와서 조사를 진행한 후 상당수의 상인방을 해체하여 영국으로 가져갔다.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는 24개의 야시칠란 상인방이 있다고 하고 또 몇 개의 상태가 좋은 것은 멕시코시티의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과거 제국주의자들은 세계 곳곳에 있는 유적들을 자기 것처럼 실어 갔다. 대영 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 또는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은 그들의 치욕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 속에 숨어 있듯 자리하고 있는 유적들. 이 건물들의 뛰어난 상인방비들은 대영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하긴 한국의 국립박물관에 있는 중국 신쟝 위구르 자치구 출토의 서역 유물들도 중국으로 되돌아갈 희망이 없으니 우리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 유물들은 오오타니라는 일본인이 훔쳐오듯이 약탈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이 도둑이 흘리고 간 장물을 보관하고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셈이니 부끄럽기로 말하자면 남 얘기할 처지도 못된다.

유적지의 건물 틈에 핀 야생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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