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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Apr 09. 2021

물길 자취마저 사라진 운하의 도시 에드스나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22

피라미드 신전 도시의 표준형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 사전 지식이 없이, 그야말로 '그냥' 가는 것은 마치 안갯속의 어떤 곳을 향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가는 목적지에 대한 인상은 안갯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의 조각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가는 길의 길가 풍경은 참으로 평범했다. 넓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떼들이나 잡목들이 우거진 황량한 들판이나 모두가 그냥 하루하루 스쳐가는 일상적인 풍경들에 불과했다.


에드스나도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그리 많은 유적을 거쳐온 것은 아니지만 똑같은 피라미드 신전들이나 구기장이나 넓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석조 건물군들이나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유적들의 표준형이라고나 할까? 피곤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캄페체에서 에드스나로 가는 길가 풍경


매표소를 지나 들어간 엉성한 초가 건물 안에는 유적에서 수거하여 모아놓은 비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 비석들은 왜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이곳에 모여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열실은 '실'이라는 말을 붙이기보다는 풀로 지붕을 덮은 야외 박물관에 가까웠다.

유적 입구의 비석 진열실


진열실 한 복판에 있는 비석은 2호의 번호가 붙은 것이다. 이전에 야시칠란의 상인방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구도의 그림으로 오른쪽에 왕으로 보이는 화려한 관을 쓴 큰 인물이 서 있고 왼쪽 아래에 전쟁 포로로 보이는 작은 인물상이 서 있다. 비석에는 731년 8월 22일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비석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중심부에 원형의 도형이 있는데 이것은 구기 경기에 사용하는 공으로 보고 있었다. 이 공의 존재는 비석의 내용이 구기 경기를 끝내고 전쟁포로를 인신공양의 제단에 바치기 직전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다. 8세기 마야의 도시국가들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르고 또 포로를 제물로 바쳤는지 찾아가는 유적마다 볼 수 있는 비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앙 광장으로 통하는 아치형 성문은 겨우 문 모양만 복원되어 거기 문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돌무더기들의 본래 모습은?  


마야 유적에서 돌은 물과 같다.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마야의 돌들은 마야인들의 생각대로 모양을 바꾼다. 사전 지식 없이 찾은 탓인지 에드스나의 유적에서 다른 곳과 다른 특별한 무엇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돌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모양의 건축물들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다시 쌓아 올려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고 그래서 애초의 모습이 영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그릇 모양을 따라 애초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 내 앞에 있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무너져 내린 돌들이 제모습을 찾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런저런 형태를 갖추려고 애썼겠지만 많은 석조 건축물들은 제모습을 잃은 채로 서 있다.


보수된 피라미드 뒤로 5층 피라미드 신전의 루프콤이 보인다.


역사 유적도 세월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곳에 사람이 사는 한 그때 그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과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유적들을 보면 이제 저 유적 자신도 자신의 본래 모습을 기억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모습들은 오래도록 사람들 앞에서 마치 본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


에드스나의 현재 모습이 그럴 것이라는 자신은 없지만 그야말로 그냥 들러본 여행자의 생각이다.




뒤에 있는 피라미드 신전은 계단을 쌓은 석축이 무너져 일부 만 원형을 살려 복원되었고 중앙 계단도 계단석들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다.


대 아크로폴리스와 5층 피라미드 신전


유적의 전체적인 구성은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건축물 집단이 분포되어 있다. 중심광장의 동쪽으로 이 유적에서 가장 큰 대 아크로폴리스(Gran Acropolis)가 있고 북쪽과 남쪽에도 작은 아크로폴리스들이 존재한다. 그 주변으로 어느 유적에서나 볼 수 있는 구기 경기장이나 신전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들이 있는데 전체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5층 피라미드 신전과 그에 부속된 건물들이 모여 있는 대 아크로폴리스라고 할 수 있다.


대 아크로폴리스는 에드스나 유적 전체의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중심 광장에서 계단을 통해 올라와야 한다. 아래 광장에는 대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중앙계단으로 통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중앙계단으로 V형으로 만나는 통로의 존재는 아크로폴리스에서 거행되는 의식과도 관련될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서 내려다본 대 아크로폴리스 전경. 오른쪽은 달의 신전의 일부이고 맞은편은 북쪽 신전이다.
중심광장에서 동쪽에 위치한 대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본 모습니다. 중심광장의 좌우에 대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계단에서 만나는  좁고 긴  두 개의 통로가 보인다.


대 아크로폴리스의 광장 동쪽에는 전체 5층으로 축조된 피라미드 신전이 있다. 최상부의 루프콤까지의 높이가 31.5미터나 된다고 하는데 다른 곳의 피라미드와 달리 각 층마다 방이 있고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맞은편에서 보면 피라미드 전체가 마치 계단식으로 설계된 현대식 아파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방들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신전의 기능으로 미루어 신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주제하는 신관들이 살았을 법하다.


흥미로운 것은 피라미드 신전의 축조와 관련된 기록이 비석의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피라미드에 관한 기록은 피라미드로 오르는 계단의 수직면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계단에서 서기 652 년의 문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 알려지기로는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4 세기 무렵이라고 하며 수 세기에 걸쳐 건설작업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건설의 거의 마지막 단계를 14 세기로 보기도 하니 천년 이상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긴, 사람이 사는 동안 헐어내고 다시 짓는 일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을 것이니 그것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5층 신전으로 올라가는 맨 아래 계단 수직면에는 상형문자를 새겼다. 그래서 이 계단을 상형문자 계단으로 부른다.


운하와 함께 사라진 에드스나의 역사


또한 현장에서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 도시는 많은 운하가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더욱 놀랍다.  건조하고 더운 이 지역의 기후조건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을 어떻게 농지로 공급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그것이 운하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야인들이 보여주는 높은 과학 수준에 감탄할 뿐이다.

에드스나에서 사람들이 떠난 것은 혹시 농사와 관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운하가 사라지고 에드스나가 몰락했는가? 아니면 에드스나가 몰락해서 운하가 사라졌는가? 현답을 기대할 수 없는 우문이다.


대 아크로폴리스의 남쪽에 있는 달의 신전에서 본 5층 피라미드 신전
대 아크로폴리스의 북쪽 사원

대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5층 피라미드 신전은 에드스나 유적의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랜드마크 구실을 한다. 멀리서 나무 숲 뒤로, 또는 다른 석조 건축물 뒤로 우뚝 서 있는 신전을 보면 미륵사지에 솟아 있는 9층 석탑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피라미드에 석양이 비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붉은 노을빛에 물든 흰 돌의 신전은 얼마나 신비한 느낌이 들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중심광장의 북쪽에서 숲 뒤로 보이는 5층 피라미드의 위용. 맨 위층에 솟은 루프콤이 신전을 더욱 위대한 존재로 꾸며준다.
피라미드에 만들어진 방들은 이제 독수리들의 차지가 되었는가? 독수리 한 마리가 방 속에서 나와 날아갈 차비를 하고 있다.


새들과 이구아나가 지키는 숲 속의 폐허들


에드스나에는 숲 속에 감춘 듯이 있는 무너진 작은 신전들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오래전에 이 자리에 있었던 영욕의 시간들이 지금 그냥 흔적 만으로 내 앞에 엎드려 있다. 이들은 잘 정비된 중심광장이나 대 아크로폴리스 그리고 수많은 보수 과정에서 변형된 건물들의 깔끔한 공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어두운 숲 속에 숨듯이 가려져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로 인해 중앙 광장 주변의 깔끔하게 정비된 유적들이 숨을 쉬는 생명체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존재는 뜨거운 햇볕에 찌든 여행자의 육신을 부드럽게 위로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숲 속에 숨은듯이 자리잡은 작은 신전. 무너진 돌 무더기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15세기 중엽, 이 도시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이 거대한 돌의 신전들이 숲 속에 버려졌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채 피라미드 방들은 독수리 차지가 되었다. 숲 속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이 곳이 영화를 누릴 때나 다름없이 나무 가지 사이를 날아다닌다.


멕시코의 새들이라 특별히 예쁘지는 않겠지만 아름다운 새들로 인해 에드스나가 더 돋보인 것은 틀림없다.
중심광장 서쪽의 건축물 군이다. 우측의 노호치나로 부르는 건축물로 중심광장과 구분된다.
중앙 광장 서쪽의 긴 계단으로 이루어진 노호치나의 뒤쪽을 이구아나 홀로 지키고 있다.
중앙광장으로 통하는 숲 속의 작은 신전 터. 줄지어 서 있는 돌기둥들이 옛 역사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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