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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Apr 26. 2021

구름을 잡으려고 왔던 에네켄의 도시, 메리다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23


'구름을 잡으려고'


어렸을 때, 50년대 말이었는지 60년대 초반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KBS 라디오에서 들었던 소설이 있었다. 주요섭의 '구름을 잡으려고'라는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소설을 그대로 성우가 낭독해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지금도 그 소설의 작가와 작품명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어린 나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나 보다.



아침 산책을 나온 시민이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고 있다.


20세기 초 한국인 한 가족이 다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그들은 이민 사기에 걸려들었고 에네켄 농장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다가 어찌어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겨우 자리를 잡는가 했는데 대지진이 일어나 몽땅 망하고 이런저런 고생 끝에 기반을 잡는다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한국인들이 일한 선인장 농장이 바로 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에네켄을 재배하던 농장이었음을 나는 '애니깽'이란 영화가 나온 후에야 할게 되었다. 메리다에서 에네켄 농장은 보지 못했지만 이곳은 멕시코의 대표적인 에네켄의 도시이다. 한국인들이 멕시코에 이민 와서 처음 일한 곳도 메리다 근처라고 했다.  그래서 메리다에는 한국이민박물관도 있는데 공사 중이라고 해서 가볼 수 없었다. 


옷 가게 하나가 온통 소녀의 몸 위로 옮겨 왔다.
아기를 등에 업은 기념품 파는 여인이 관광 온 엄마에게 안겨 있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권해보지만 아이는 딴전만 피고 있다. 등에 업힌 아기의 피곤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리 중인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 한국인의 냄새를 맡을 곳은 쉽게 검색되지 않았다. '구름을 잡으려고'가 떠오르기는 했으나 한국인의 자취를 찾는 것도 갑자기 이곳을 찾은 여행자에게는 구름 잡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석판 한 장에 담긴 유카탄의 역사


시내 중심의 소깔로 광장은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아 쉬기 좋은 곳이다.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광장의 주변에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대성당과 많은 미술품을 보유한 시청사 건물, 그리고 멕시코 건축으로 유명한 몬테호의 대 저택과 현대미술관도 있다.

시청사 2층 복도에서 내다본 풍경. 나무로 가득찬 소칼로 광장 건너로 대성당이 보인다.
2층의 복도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청년 여행자. 청년 .뒤쪽으로 시청 사무실이 있다.

현재 관광객의 관람을 허가하고 있는 시청사는 여러 종류의 석조 조각품과 멕시코의 대표적 화가들의 작품이 복도와 회의실 등 여러 공간에 걸려 있다. 시청사는 하나의 큰 미술관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복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또 유리창 너머에서는 공무원들이 각자 분주히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청사 안의 여러 예술품들 중에서 특별히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을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화강석 석판이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의 금석학적 호기심이 작동되었을 따름이었다.


메리다 시청사의 현관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카디스 헌법 선포 기념 석판

저녁에 돌아와서 구글 번역기로 석판 앞에 놓여 있었던 안내문을 번역해 본 후에야 그것이 카디스 헌법이라는 스페인 헌법 선포를 기념하는 석판(1820)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메리다의 중앙 광장을 헌법광장으로 부르는 것은 이에 연유된 것이었다. 또 멕시코 시티의 중앙 광장 명칭이 헌법광장이라는 것같은 이유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시청의 건물 틈으로 내다본 거리의 모습.

카디스 헌법이란 1812년 스페인의 카디스란 곳에서 선포된, 왕의 절대권을 부정하고 국민들의 주권이나 참정권, 재산권 등을 보장하는 민주헌법을 말한다. 이 법은 특히 식민지 지역의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한 것도 카디스 헌법의 영향이 컸다. 식민지 시절 메리다는 스페인의 유카탄 총독부의 관할 아래 있었다. 멕시코가 독립한 후 유카탄 공화국의 이름으로 멕시코 연방에 속해 있었지만 1841년부터 1848년까지 유카탄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국가 였다. 이 석판은 유카탄 독립선언 때까지 광장에 있었다고 한다.


시청사 안마당에서 외부 도로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통해 관광용 마차가 보인다.

유카탄 공화국이 다시 멕시코 연방에 편입된 후 1871년에 당시 가톨릭 주교에 의해 유카탄 박물관으로 보내졌다. 석판은 그 후 1996년까지 시립박물관에 있다가 2019년에 국립 인류학 및 역사연구소 80주년을 기념하여 현재 시청으로 전달되었고 지금 일반 시민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장의 기념 석판은 그저 단순한 석조 유물이 아니라 멕시코가 어떻게 독립되고 유카탄은 또 어떤 역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통째로 들려주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마음 불편한 몬테호 가의 저택


몬테호 저택의 정면 파사드. 2층 발코니 위의 중심에 가문의 문장이 있고 그 양쪽으로 칼과 도끼를 든 병사 두 명이 문지기처럼 서 있다.

헌법광장 소칼로에 인접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저택이 있다. 사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는 그리 훌륭한 건축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집 앞에 도착했을 때 햇빛은 집의 정면을 비껴 넘어갔고 집을 대표하는 정면 파사드의 조각들은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흰색 화강암으로 장식된 정면은 세월의 때가 묻어 과거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집은 1543년에서 1549년까지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가 아버지의 명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 정복자들을 위해 이 집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 지을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도로에서 마주 보이는 정면 파사드뿐이다.


오른쪽 병사의 모습이다. 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의 머리를 밟고 서 있다.

이 건물은 내 눈에 우중충한 고택처럼 보이긴 했으나 멕시코에서는 소위 플라떼레스께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멕시코 건축의 보물로 꼽히는 것이라고 한다. 플라떼레스끄 건축의 특징은 은으로 만든 그릇의 아름다운 부조처럼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것이다.


그러나 그 섬세한 조각상들은 원주민의 머리를 짓밟고 있으며 기다란 도끼와 칼을 잡고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집을 지은 것도 스페인의 정복자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이 집을 메리다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으로 평가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처음 지은 것으로 치면 500년 세월이 지난 몬테호 가문의 저택.

 이 집은 부호 몬테호 가문이 13대에 걸쳐 주거한 곳인데 1839년 페온(PEON) 가에 팔렸고 1980년에는 현 소유주인 바나멕스 은행에 팔려 은행이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일부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집 내부는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고쳐져서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전시실은 대부분 과거 상류층의 생활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내가 그 집을 찾았을 때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는데 그 초롱초롱한 눈빛에 마음이 밝아지는 듯했다.

 

몬테호의 저택 박물관에서 어린 학생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반짝이는 눈빛에서 멕시코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피라미드를 헐어 지은 메리다 대성당


어느 도시의 소깔로 광장에서나 마찬가지로 메리다에서도 광장에는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일데폰소 성당이다.


성당 내부는 프란치스코 회 전통에 따라 비교적 간결하게 꾸며져 있으나 중앙 제단의 뒤에 서 있는 십자가는 12미터나 되는 거대한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만도 8미터나 된다는데 미주 대륙에서 가장 큰 십자가 예수상이라고 한다. 제단 앞의 천정은 반구형의 돔으로 구성되었는데 돔 꼭대기의 광창과 밑면의 둘레를 돌아가며 낸 아치형 창문에서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밝혀준다.


일데폰소 성당의 정면

대부분의 대성당들이 그런 것처럼 1598년 완공된 이 성당도 마야 유적에서 가져온 돌로 지었다고 한다. 메리다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다섯 개의 피라미드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피라미드를 모두 파괴해서 그 석재로 성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에게 다른 지역의 문화는 없애버려야 할 이단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가? 안내문에 따르면 무어식과 르네상스식이 혼합된 건축양식이라고 하는데 무어식은 이슬람 건축의 양식이니 이 성당은 이슬람과 유럽 기독교와 마야의 문화가 융합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프란치스코 회 전통에 따라 간결하게 꾸며진 성당 내부.

여행 내내 문맹자로 다니다 보면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성당 안을 살피다가 글이 새겨진 동판 하나를 보았는데 나중에 번역해볼 요량으로 사진 만 한 장 찍어 왔다. 저녁에 찾아보니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릎 꿇은 자리를 표시한 것이었다. 더구나 스페인어도 아니고 라틴어였으니 답답함이 두 곱으로 커졌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무릎을 꿇은 장소를 표시한 동판

그 동판 외에도 성당 내부의 벽 쪽 바닥에는 글자가 새겨진 대리석판들이 많이 깔려 있다.  대부분 성당 내의 공동묘지에 사용된 표석들이다. 성당의 공동묘지들은 마치 아파트처럼 여러 층으로 칸을  만들고 그 속에 관을 안치하는데 입구를 이름과 죽은 연도를 새긴 표석으로 막는다.


짐작컨데 묘소는 수가 제한되어 있고 오래된 묘소는 뒤에 죽은 이를 위해 폐기되고 표석도 교체가 된다면 폐기된 표석은 성당 바닥에 타일처럼 사용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폐기된 묘비석이 깔려 있는 성당 내부의 바닥

성당의 정문 안 쪽, 해가 잘 드는 곳에 나이 많은 맹인 여성이 목에 글이 쓰인 판지를 걸고 한 손에 동전용 큰 컵을 들고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 가여운 맹인을 도와주세요. 신께서 당신에게 생명과 건강을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경이로운 날이지만 나는 볼 수가 없군요.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목에 걸린 문장의 내용이다. 사진을 찍은 것이 죄스러워 지전 한 장을 컵 속에 넣었다.


성당 정문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맹인의 웃음이 보는 이의 주머니를 뒤적이게 한다.



성당의 한쪽으로 현대미술관이 있다. 현대미술관과 성당의 사잇길은 아크릴로 지붕을 덮었는데 반투명한 아크릴을 투과하여 들어온 한낮의 햇살이 골목에 가득 찼다. 골목에는 회화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어서 현대미술관이 골목까지 확대된 듯 하다.


대성당과 현대미술관 사이의 아케이드. 길거리의 미술전시장이다.

현대미술관의 반대쪽으로는 고풍스럽게 보이는 시가지가 붙어 있다. 시가지에는 관광객들을 태운 흰색 마차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내가 마치 19세기의 어느 시간으로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붐비지 않는 역사도시의 소깔로 광장은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여행자들에게는 다시없는 치유의 장소다.


마치 19세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주는 메리다의 시가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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