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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를 독립시킨 과달루페 성모, 멕시코 시티 3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5

by Segweon Yim

마야의 땅에 자리 잡은 이방인의 신


세계 어디에서나 태양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태양이 화를 내면 가뭄이 들기도 하고 홍수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 먹을게 없어지고 당연히 사람들은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마야인들도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 신을 섬기기 위해 커다란 돌을 쌓아 엄청나게 큰 피라미드를 만들고 그 위에 또 신전을 지어 제사를 드렸다. 그냥 제사만 지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산채로 잡아 심장을 바치기까지 했다. 그들의 태양은 밝고 따뜻한 햇살만 준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 왼쪽이 본당이고 오른쪽은 주교의 의상이나 자료의 보관과 성찬식 세례식 등을 거행한 사그라리오 성당이다.

바다 건너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를 빼앗고 자기들이 섬기던 신을 모셔왔다. 아스텍의 농민들에게는 그들을 다스리는 자가 그들의 황제인가 침략자 코르테스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평화롭게 농사짓고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죄도 없이 생명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했을 것이다.


코르테스는 처음 아스텍 군대에게 참패를 당한 후 테노치티틀란 밖에 있는 다른 마야인들과 손잡고 다시 테노치티틀란을 공격했다. 전쟁을 종결시킨 결정적 이유는 천연두의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코르테스 편에 힘을 보탠 많은 원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은 원주민들이 아스텍의 통치자와 신에 대해 적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규모 토목공사나 인신공양 등이 주민들을 침략세력과 손잡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 바로크 전성시기에 지어진 사그라리오 성당은 중앙부에 화려한 조각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금관을 쓴 검은 예수


침략자들은 아스텍 제국의 신전을 허물고 그들의 신전, 즉 성당들을 지었다. 아스텍 사럼들은 지금까지 섬기던 신전을 헐고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낯선 신을 위한 신전을 짓노라 또 생고생을 치루어야 했다.


사람들이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으로 부르는 성당은 스페인 침략자들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성당의 정식 이름은 성모 마리아 승천 대주교 성당(Cathedral Metropolitana de la Asuncion de la Santisima Virgen Maria a los cielos)이다. 무려 240년이나 걸려 지은 이 성당은 대부분의 대형 성당과 마찬가지로 그 큰 규모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용서의 제단 앞에 있는 검은 예수상.


이 성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들어서면서 바로 마주치는 용서의 제단이다. 제단 벽 중앙에 성모 마리아 모자상이 있고 그 오른쪽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있다. 이 제단에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 예수상이다.


예수상의 피부는 검은색이다. 검은 예수라면 레이디 가가의 '블랙 지저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아프리카 등지에서 백인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데서 등장한 것이다. 레이디 가가는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기독교를 인식하는 의미에서 예수를 흑인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황금빛 제단을 배경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앵글을 바꾸면 흰 색의 성당 벽으로 배경이 바뀌고 검은 피부가 강조된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타나의 검은 예수는 원주민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스페인 통치자들이 원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카톨릭을 선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백인 예수보다는 원주민의 피부색에 가까운 검은색이 원주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만술이라고도 생각되지만 당시 현지인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수용되었던 듯하다.

성당 안의 작은 부속 예배당의 하나


용서의 제단이라는 이름도 이단으로 처형될 사람들을 처형하기 전에 신에게 용서를 빌도록 하는 장소로 사용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예수의 머리에는 금관이 씌어져 있다. 금관의 예수가 식민지 시대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를 주었을까?


내부의 제단 아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촛불빛으로 밝혀져 있다.


멕시코 독립에 앞장선 성모 마리아


1521년에 아스텍이 스페인에게 망했고 후안 디에고라는 사람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1531년이었다. 디에고는 식민통치가 시작된 초창기에 이미 카톨릭 신자가 된 사람이다. 메트로폴리타나 성당 건축은 그 후 40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후안 디에고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성모 마리아가 그 앞에 나타났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앞에 서있는 성모는 멕시코의 원주민 모습을하고 원주민 말을 하고 있었다.

테파약 언덕에서 내려다 본 과달루페 성당.앞에 있는 것이 구 성당이고 뒤의 푸른색 지붕이 새로 지은 신 성당이다.
과달루페 성당 앞 광장은 언제나 성지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그가 성모 마리아를 친견한 곳은 현재 과달루페 성당의 뒤편에 있는 테파약 언덕이다. 여기서 성모는 디에고에게 한 겨울 장미꽃이 피는 기적을 행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성당을 지으라는 성모의 명에 따라 지은 것이 지금 보는 과달루페 성당이다. 과달루페는 그때 등장한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말이다.


이러한 과달루페 성모에 관한 이야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들을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과달루페 성모는 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추앙되었고 멕시코 인들의 마음속에 최고의 거룩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침략자들의 통치수단으로 전파된 가톨릭은 오히려 이후 멕시코 사람들이 험난한 역사를 헤쳐나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된 종교가 되었다. 그 중심에 과달루페 성모가 있는 것이다.


과달루페 구 성당의 내부

과달루페 성당이 있던 지역은 과거 늪지였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취약했던 성당의 지반은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구 성당은 피사의 사탑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 더 이상 미사를 지속시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구 성당 옆에 새로운 성당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 세워진 이 새로운 성당은 멕시코시티의 국립인류학박물관을 설계한 페드로 라미레스 바스케스(Pedro Ramírez Vázquez) 등 세계적 건축가들이 설계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신축 성당은 외부에 보는 모양부터 색다르다. 그것은 영낙없는 원형의 실내 체육관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출입문도 원형의 둘레를 따라 여러개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불편함이 없다. 내부로 들어가면 기존의 높은 천장과 좁고 긴 복도 끝에 아득하게 보이는 제단의 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무척 생소하다.


과달루페 신 성당의 내부
과달루페 신 성당에서 결혼미사가 거행된다. 지금도 노인들은 잔칫날이 되면 전통 의복으로 성장을 하고 나들이를 한다.

거의 원형으로 보이는 성당 내부는 신도들의 좌석이 마치 원형 극장처럼 부채꼴로 배치되어 있고 부채살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위치에 사제의 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기존의 수직적 구조의 가톨릭 시스템을 수평적 시스템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벌써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시대에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담당해야할 시대적 과제를 설계자가 깊이 고민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인의 상징이며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과달루페 성모의 초상화도 이곳에 옮겨져 제단 위에 걸려 있으나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 혼인미사가 올려지고 있어 가까이 가볼 수 없었다.


디에고가 성모를 만난 근처의 우물가에 세웠다는 원통형의 포시토 교회

그러나멕시코 독립전쟁 시기의 군대 깃발에까지 과달루페 성모가 그려졌다고 하니 성모의 존재는 실로 멕시코의 국가적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후안 디에고가 처음 성모를 만난 테파약 언덕 위의 세리토 교회. 한 젊은이가 굳게 닫긴 문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청년의 마음의 문은 열어 주시겠지.
석양을 등진 과달루페 성당의 실루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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