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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속에서 드러난 두개골의 제단, 멕시코 시티2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4

by Segweon Yim

450년 만에 드러난 지하의 피라미드


하늘을 찌를 듯하던 200계단의 피라미드 신전이 땅 속으로 묻힐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힘센 침략자들의 폭력 앞에 힘없는 토착 제국의 신은 어처구니없이 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신전의 돌들은 헐려 바다 건너 들어온 유럽인들의 신전을 짓는데 동원되었다. 헐려버린 아스텍의 신전은 제국의 최후를 지키던 테노치티틀란의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그때 테노치티틀란은 호수 위의 도시였다. 멕시코 북쪽에 있던 아스텍 인들은 남쪽 늪지대로 내려와 호수 한가운데의 섬에서 뱀을 먹고 있는 독수리를 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신이 그들에게 준 땅이라고 여기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1325년 아스텍 인들은 호수의 섬들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보강하고 연결하여 물 위의 도시를 만들었다. 아스텍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대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1521년 스페인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스페인의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점령하고 아스텍의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오늘날의 멕시코 시티이다. 아스텍 제국을 받치고 있던 피라미드 신전은 헐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 되었다. 그리고 신전의 나머지 부분은 땅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아스텍 인들의 신전을 헐고 세운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이 멕시코 시티의 상징물로 서 있다. 앞의 유적이 템플로 마요르 유적.


그러나 땅 속에 묻힌 것은 언제고 다시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1978년 작은 석판 하나가 대성당의 옆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땅 속에서 거대한 아스텍의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고 또 현재의 도시 속에 들어가 있어서 전체 규모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드러난 것만으로도 당시의 신전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템플로 마요르이다. 거대 사원이라는 뜻이지만 지금 드러난 규모 만으로도 거대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침략자들의 손에 의해 땅 속에 묻힌 지 450년. 아스텍은 드디어 상처뿐인 몸이지만 다시 그들이 숭배하던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템플로 마요르 유적 중 피라밋 정상의 신전으로 오르는 중앙계단의 일부이다.

촘판틀리와 챠크물의 충격


스페인에 함락되기 전 이 유적의 마지막 모습과 이곳에서 치러진 의식에 대해서는 당시 이 땅에 들어왔던 스페인 침략자들의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200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간 피라미드 정상에 두 개의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쇼킹한 것은 그 제단에서 산 사람을 신에게 바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인신공양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견해도 있어왔다. 그러나 2015년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의 뒤쪽에서 촘판틀리라고 부르는 두개골 탑이 발굴되면서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인신공양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주로 전쟁포로들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에서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두개골도 발견되어 희생자들은 보다 많은 계층에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여주는 두 기의 유적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네 벽을 두개골 부조로 채운 제단이다. 이는 촘판틀리와 관련 있으며 벽에 새긴 두개골은 인신공양에 희생된 사람들의 두개골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또 하나는 소위 챠크물이라고 부르는 엉거주춤 누워 있는 인물상이다. 이 인물상은 배 위에 큼직한 그릇 하나를 올려놓고 있는데 이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담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이 인물이 신에게 바쳐진 전쟁포로라기도 하고 또 비의 신과도 관련된다고도 한다.


두개골 제단은 흰색으로 칠해져서 실제 두개골의 느낌이 강하고 챠크물은 붉은색 파란색 검은색 등이 칠해져서 신에게 바쳐지는 인물의 화려한 의상을 떠올리게 한다. 두개골 제단과 챠크물의 조각은 유카탄의 치첸잇사 유적에서도 보았 지만 여기처럼 색을 입힌 것은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일찍이 땅 속에 묻혀서 돌 표면의 색칠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흰 칠이 된 두개골 제단, 흰 색의 칠이 두개골의 느낌을 훨씬 더 실감나게 해준다.

나는 학생 시절부터 퇴직 때까지 많은 발굴작업에 참여해 왔고 그래서 많은 역사 속 주검들을 만나 왔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죽여 함께 묻은 순장도 보았다. 그러나 이곳처럼 신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두개골로 탑을 쌓는 것 같은 이런 잔인한 것을 본 경험은 없다. 심지어 아스텍의 인신공양과 함께 전해오는 식인 풍습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것도 천년도 더 된 오랜 고대의 이야기가 아닌 불과 500년 전 이야기다. 한국에서라면 조선 중엽에 불과하다. 마치 제사 후 음복하듯이 희생된 사람의 시신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나 식량 부족으로 인해 식인 풍습이 생겼다는 말은 스페인 사람들이 견문을 기록한 데에도 나온다고 하지만 그냥 뒷사람들이 지어낸 설화쯤이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아스텍의 통치자들이 전쟁포로나 일반 백성들 또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신 앞에서 죽이고 아직도 뛰고 있었을 그들의 심장을 바쳤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들은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성한 존재이므로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용했을까? 아니면 통치 수단으로써 자기 나라의 일반 백성들이나 이웃 나라가 그들에게 두려움을 갖고 복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을까?

신에게 바쳐진 전쟁포로로 추정되는 챠크물 석상. 오랜 세월 지하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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