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는 멀고도 가깝다. 비행기로 열네 시간을 날아왔으니 멀다. 열 두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같은 날 열 한시다. 내가 떠난 서울의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뒤로 갔으니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또한 이른 봄에 떠났는데 내린 곳은 한 여름이다. 계절로 보면 멀고도 먼 곳이다.
멕시코의 서울 멕시코 시티. ‘멕시코 도시’라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멕시코에서 부르는 정확한 이름은 씨우닷 데 메히꼬(Ciudad de México)다. 줄여서 CDMX라고 쓴다. 번역하면 이 역시 그냥 ‘멕시코의 도시’다. 이건 도시의 이름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지고 보면 멕시코의 도시가 다 멕시코 시티 아닌가?
소깔로 광장에서 만날 수 있는 이 정체불명의 의상들도 마야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은 더더욱 맞지 않다. 한국의 서울도 이름이 없기는 매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한자로는 수도(首都)라는 뜻이니 도시의 이름이 아닌 보통명사인 셈이다. 그러니 나라의 수도가 이름이 없다는 점에서는 멕시코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인구로 보아서도 서울이나 멕시코 시티나 세계에서 가장 큰 거대도시에 들어간다. 또한 서울도 근대 이전 500년 동안 조선 왕조의 서울이었고 멕시코 시티도 스페인 식민지 이전의 마지막 토착 왕조였던 아스텍 제국의 서울이었다는 점에서 수백 년의 역사적 수도로서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도 같다.
멕시코 혁명기념탑
그러나 서울의 중심부에서는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조선왕조의 유적이 보이는데 반해 마야의 땅 멕시코 시티에서 마야를 볼 수 없다. 한국은 35년이라는 단 기간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남겨진 일본 제국주의의 굵직한 흔적들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는데 300년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으니 오죽하겠는가?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한 것은 1521년이다. 1821년 독립전쟁 승리와 독립선언을 멕시코 독립으로 본다고 해도 꼭 300년 간의 스페인 통치가 지속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의 통치자들은 이전의 마야와 아스텍의 흔적들을 철저하게 없애고 스페인 문화를 심어놓았다.
혁명기념탑 아래서 길 건터편 빌딩에 비친 기념탑을 본 것이다. 지금 이 기념탑을 시민들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지금 멕시코 시티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건물이나 유적들은 거의 스페인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남겨진 것들이다. 이제 멕시코 시티에서 마야나 아스텍의 문화를 다시 찾아본다는 것은 이들이 자랑하는 국립 인류학박물관 밖에는 없다. 그래도 최근 땅 속에서 다시 햇볕을 찾은 약간의 유적들이 있어 멕시코 인들의 과거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만 해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친숙하지만 특별한 도시의 풍경
멕시코 시티 어디에서나 여행자들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을 볼뿐이다. 거리의 가게들에서 유서 깊은 성당까지 유럽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없다. 공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나 꽃 파는 아주머니도 스페인의 어느 도시와 다를 게 없다.
버스 정류장에서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두 연인
멕시코 시티에서 마야의 오랜 전통을 찾으려 하면 실망밖에 남는 게 없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금 눈길을 돌리면 근대 이후 만들어진 멕시코 만의 독특한 문화들을 볼 수 있다. 근대 멕시코의 역사는 스페인 침략자들에 저항한 투쟁사이며 미국의 영토적 야망과 대결한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다.
이러한 민족적 자존감은 마야 문화를 정신적으로 이어가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구현되었고 특히 미술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시각적으로 이러한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게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라피티(Graffiti) 벽화들이다. 소칼로 광장 한쪽에 있는 예술궁전에서 보는 대형 벽화들은 미술을 몰라도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온다.
큰 길이건 작은 골목이건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곳은 없다. 왼쪽은 국립예술궁전에 걸린 근대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 오로스꼬의 카타르시스라는 작품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멕시코 사람들은 열정적이면서도 한 템포 늘어진 여유가 보인다. 큰 길가 한쪽에 음악을 틀어 놓고 댄스를 즐기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헤어지는 애인을 아쉬워하며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중년 커플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노숙자와 어린 기타리스트가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잡으려 한다.
아침에 시가지를 걸으면 여느 도시의 아침처럼 바쁘게 출근하는 회사원과 음식점에 채소를 나르는 배달차도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침부터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현악 연주 준비를 하는 길거리 음악가도 볼 수 있다.
멕시코 시티 시민들 일상의 일부를 엿본다.
멕시코가 잊지 못하는 어느 한국 농민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시내를 여기저기 걷다가 나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동양인의 얼굴이 어느 건물의 담벽에 붙어 있었다. 사진 설명은 스페인어로 쓰여 있었으나 사진 속의 인물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흰 패널에 'WTO가 농민을 죽인다(WTO Kills FARMERS)'라는 글씨가 보였다.
오래전 뉴스가 떠올랐다. 칸쿤에서 열린 국제무역기구 회의에 한국 농민들이 가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한 농민이 자결을 했었다. 당장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했다. 이경해, 그의 이름이다. 벽에 붙은 넉 장의 사진은 당시 한국의 신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그는 왼쪽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손을 들고 절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이 먼 나라에 까지 와서 그가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를 멕시코 사람이라고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미 다 잊고 있던 한 농민의 처절한 순간이 16년이나 지난 멕시코 시티 길거리의 한 벽에 멈추어 있었다.
2003년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 회의에서 자결로써 강대국의 자유무역 정책에 항거한 한국의 이경해 농민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