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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Mar 22. 2022

잉카의 어머니 티와나쿠 4 - 해와 달의 문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52


하늘과 땅을 이어준 달의 문


해지기 얼마 전 티와나쿠에 도착한 후 유적의 주변을 산책하면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달의 문이었다. 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고 길과 티와나쿠 유적 사이에는 철책이 쳐 있어서 멀리 있는 안내판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저녁 하늘에 우뚝 선 이 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문을 쳐다보면서 걷노라니 야트막한 언덕 위에 우뚝 선 이 문 뒤로 멀리 석양의 붉은 기운이 살짝 드리워진 흰 구름이 멋진 무대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배경으로 선 돌문의 실루엣은 마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안데스 산 아래의 알티플라노 넓은 평원에 서 있는 것이지만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보는 그 문은 마치 안데스 산 꼭대기의 능선 위에 고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듯이 보였다. 티와나쿠는 그렇게 달의 문과 함께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저녁 무렵 흰 구름을 배경으로 서있는 달의 문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유일한 존재처럼 보인다.


이 문은 칼라사사야 사원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태양의 문과 함께 티와나쿠 유적에 우뚝 선 돌로 만든 문이다. 돌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여러 개의 석재를 짜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을 'ㄷ'자 형으로 잘라서 세운 것이다. 달의 문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태양의 문과 대비시키면서 붙은 걸로 이해된다. 달의 문은 태양의 문보다는 훨씬 더 서쪽, 티와나쿠의 가장 서쪽 변두리에 위치하며 태양의 문과 대척점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문은 북쪽의 지형이 낮기 때문에 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문 양쪽 기둥의 바깥쪽 모서리 일부가 깎여 있는 것은 여기 어떤 장식을 부착시켰던지 아니면 돌문 외부로 어떤 구조물과 연결시킨 흔적일 수 있다. 이 문도 단순히 현재 남은 형태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문 양쪽으로는 담이나 벽이 붙어 있었을 것이고 문 뒤로도 다른 구조물이 연결되어 있었던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본 달의 문
달의 문의 앞(왼쪽)과 뒤


달의 문은 작기도 하지만 특별한 장식이 없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게 보인다. 두 기둥 위의 프리즈 부분에 얼핏 보면 무슨 문자 같은 도형이 한 줄로 새겨져 있는 것이 장식의 전부이다. 이 도형들은 돌이끼가 덮여 자세히 볼 수 없으나 태양의 문이나 또는 티와나쿠의 여러 유물에서 볼 수 있는 작은 신상의 형태가 보이기도 한다.


달의 문 상단의 문자처럼 보이는 도상


유적의 동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달의 문 앞에 왔을 때 마침 서쪽 하늘 밑으로 해가 가라앉았다. 짙고 검은 구름장 사이로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황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멀리 티와나쿠 성당의 돔과 종탑이 신비하게 들어왔다. 달의 문이 보여주는 또 다른 신비였다.


막 해가 진 후 달의 문에서 바라본 티와나쿠 성당

지팡이 신이 지키는 태양의 문


달의 문보다 더 티와나쿠를 대표하는 문은 태양의 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태양은 달보다 강하며 안데스 사람들이 가장 높이 추앙하는 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은 칼라사사야 서북쪽 모서리에 서있다. 문은 달의 문과 마찬가지로 전체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높이 3미터 폭이 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다. 무게는 약 10톤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문이 있는 위치로 보아 태양의 문은 칼라사사야 사원에 들어오는 출입구로서의 의미는 없다. 이러한 어색한 위치로 인해 이 문이 본래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설이 많다. 이 문이 여기서 1킬로미터나 떨어진 푸마 푼쿠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현대 기술이 동원되지 않고 도대체 이 무거운 돌덩어리를 어떻게 원 위치로부터 이동시켰으며 왜 그런 일을 벌여야 했는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만약 이 문이 본래의 위치라고 한다면 이 문은 단순한 출입문으로서 기능한 것이 아닌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또 제 위치가 아니라면 이 무거운 돌문을 옮겨야만 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태양의 문의 정면 모습


19세기에 유럽 사람들이 이곳에 왔을 때 이 문은 깨진 채 땅 위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스케치를 보면 이 무거운 돌문은  윗부분이 깨져 두 동강이 난 채  땅 속에 삼분의 일 정도 비스듬히 묻혀 있었다. 스케치와 거의 같은 상태로 있는 문의 사진도 있는데 사진 속의 문은 스케치의 것보다 더 기울어졌음을 볼 수 있다. 두 장의 그림과 사진으로 보면 문은 땅 속에 묻힌 채 위의 프리즈 부분이 깨진 후 균형을 잃고 점차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유랍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땅을 파고 하단부를 드러내서 문을 현재의 상태로 복원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은 일련의 사진 자료로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에는 태양의 문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태양의 문을 측면에서 본 모습. 뒤에 보이는 돌벽은 칼라사사야 사원의 서쪽 벽이다.


태양의 문의 윗부분 즉 프리즈(frieze) 부분에는 중심부 위쪽에 양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신상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고 그 좌우로는 작은 신상들이 중앙의 신상을 바라보고 뛰어가는 모습이 측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작은 신상들은 날개가 달렸고 손에는 역시 지팡이를 들고 있다. 신상들의 머리에는 지팡이의 머리 장식 같은 모양의 장식이 다섯 개씩 달려있다. 이러한 형태의 도상은 이전에 보았던 폰세 석상을 비롯한 석상에서도 많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프리즈의 아랫단에는 같은 형태의 신상으로 보이며 정면으로 묘사된 신상들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한 줄로 늘어섰다. 이 신상은 일반적으로 잉카인들이 모시는 태양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창조신 비라코차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태양신과 비라코차를 동일시하기도 하므로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그리 의미가 크지 않을 것이다. 이 프리즈 아랫단의 정면 신상과 중심부의 큰 정면 신상은 얼굴 주위로 지팡이 머리 장식을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마치 태양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이 신상들이 태양신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도상들의 의미를 천문학적 또는 점성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데 나의 지식과 능력으로서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태양의 문에서 볼 수 있는 이 몇 가지 도상들은 티와나쿠 문화가 퍼져 있는 넓은 지역 또는 잉카제국의 영토에 있는 다양한 유적 유물에서 사용되고 있다.


태양의 문 정면 프리즈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태양신상


중앙부에 새겨진 큰 신상이나 그 양쪽에 새겨진 작은 신상들은 지팡이를 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로 인해 이들에게 지팡이 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지팡이신이라는 명칭은 앞의 폰세 석상에서도 잠깐 언급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그에 관한 간략한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화적인 지도자이자 잉카제국의 시조인 망코카팍은 태양신 인티의 부름을 받고 동굴에서 걸어 나와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태양신은 그에게 황금 지팡이를 주어 그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라고 명했고, 망코카팍은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팡이가 꽂힐 때까지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현재의 쿠스코 지역에 다다르자 지팡이가 땅으로 쑥 들어갔다. 망코카팍은 쿠스코에 왕국을 세우고 지팡이가 꽂혔던 바로 그 자리에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을 지었다. 코리칸차는 대략 1200년 경 즈음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인티칸차였다. 이후 쿠스코 왕국은 시간이 흐르며 힘을 키웠고, 파차쿠티 황제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파차쿠티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그만 초가집 정도에 불과했던 인티칸차를 황금으로 도배하다시피 만들고 대대적으로 증축하면서 개 건하였으며, 이때부터 황금을 의미하는 '코리', 신전을 의미하는 '칸차'가 합쳐진 코리칸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쿠스코에 있는 쿠스코 대성당은 바로 코리칸차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은 이다. 


신화의 내용으로 보면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잉카를 세운 망코카팍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망코카팍에게 지팡이를 건네준 태양신 인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곧 태양신이나 지팡이 신이나 비라코차는 같은 신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 문을 출입하는 것은 태양신 인티의 허락을 받는다는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프리즈 왼쪽 면의 측면 신상과 아랫단의 정면 신상


태양의 문을 뒤에서 보면 프리즈 부분과 양쪽 기둥에  다른 석재를 끼워 넣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의 깊은 홈이 있다. 이로 미루어 이 문이 현재의 형태로 서 있던 것이 아니라 뒤로 연결된 부분이 있어서 보다 복잡한 구조의 건축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혹시 태양신 인티를 모시는 작은 신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태양의 문 뒷면 모습. 깊이 파인 장방형의 홈들은 다른 석재를 끼워 넣기 위한 것이 아닐까?

태양의 문 프리즈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태양신상이 조각된 석조물이 티와나쿠 유적 정문 건너편의 도자기 박물관 앞 뜰에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태양의 문에 장식된 태양신 또는 지팡이 신 도상이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티와나쿠 유적의 정문 앞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 앞에는 태양의 문과 거의 유사한  지팡이 신을 조각한 석조유물이 있다.



거대 판석의 플랫폼 푸마푼쿠(Pumapunku)


아카파나 피라미드나 칼라사사야 사원 등을 돌아보고 유적을 빠져나오면 티와나쿠 유적 답사를 마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티와나쿠 시내 변두리 마을을 지나 약 1킬로미터 남쪽으로 오면 티와나쿠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유적인 푸마푼쿠가 있다. 푸마푼쿠라는 말은 이 지역 원주민 아이마라 족의 언어로 퓨마의 문이라는 뜻이다. 퓨마는 안데스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결과 푸마푼쿠는 아카파나와 같은 형태의 피라미드였다고 한다. 지금 공개된 발굴 구덩이에는 아카파나 피라미드에서 볼 수 있는 진흙의 계단이 보인다. 물론 피라미드는 계단의 측면에 돌을 붙여 완성했다. 그러나 현재 푸마푼쿠 유적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으나 아파카나처럼 피라미드의 높은 산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이 유적이 얼마나 큰 피라미드로 있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지금 확인된 피라미드 밑부분은 길이 167미터 폭 116미터 높이 5미터 정도이며 동북쪽과 동남쪽 모서리에 27미터 길이의 돌출부가 튀어나와 있다.


계단식 피라미드의 구조를 보여주는 흙벽과 돌계단 일부
푸마푼쿠에 산재한 거대 석재들


푸마푼쿠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발굴로 나타난 수많은 석제품들이다. 그중에는 태양의 문이나 달의 문의 일부분 같은 석재의 조각들이 많다. 또 당시 석조 건축을 어떻게 조립했는지를 보여주는 석재들도 볼 수 있다.  


푸마푼쿠와 칼라사사야 사원이 있는 티와나쿠 유적의 중심지 사이는 직선거리 약 1킬로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다. 이 지역은 지금 티와나쿠 시의 외곽을 형성하며 농경지도 많다. 아마도 이 지역에도 많은 유적들이 있었을 것이다. 지표면에 있었던 석재들은 주민들의 주택을 짓거나 또는 도시 건설에 필요한 자재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누워있는 돌문은 칼라사사야 사원에 있는 태양의 문의 뒷면과 비슷하다.


최근 지반 투과 레이더 측정, 자기 측정 등의 지구물리학적 조사 방법 등으로 탐사한 결과 이 공간에는 수많은 인공 구조물들이 있음이 밝혀졌다. 이 구조물들에는 건물의 기초나 수로, 주거단지, 자갈로 포장된 도로 등이 포함되었다. 2016년에는 드론으로 탐사하여 전체 약 0.2 평방킬로미터의 유적을 확인하였고 그중에서 10퍼센트 정도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앞으로 고고학 탐사 기술의 발전은 푸마푼쿠는 물론 티와나쿠의 많은 비밀을 풀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발굴 당시 그대로 발굴 구역 안에 흩어져 있는 석제 유물들
유적의 일부 모습


푸마푼쿠에서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으로는 푸마푼쿠의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거대한 판석들이다. 이 판석들은 지면을 넓은 석조 테라스처럼 만들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길이 7.8미터 폭 5.1미터 두께 1미터의 붉은색 사암이다. 이 판석형 석재는 무게가 131톤이 될 정도로 거대하다. 또 이보다는 작지만 길이 7.9미터 폭 2.5미터 두께 1.8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것도 무게가 85톤이 넘는다. 이 석재들이 땅에 깔린 것을 판석형 플랫폼(Plataforma Litica)이라고 부른다.  


이 거대 판석은 본래 이렇게 누워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벽처럼 서 있었던 것인가? 판석 위에는 어떤 건축물이 서 있었던 듯 보이는 자리가 얕게 파여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 현재 모습이 본래의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누워있는 바위가 무게 131톤의 거대한 판석 플랫폼(Plataforma Litica)


푸마푼쿠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티티카카 호숫가 인근에서 이 거대 석재들과 같은 석질의 붉은색 사암의 채석장이 발견되었다. 푸마푼쿠의 이 거대 석재들은 여기서 운반되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운반 경로로 추정되는 곳은 경사가 꽤 가파른 곳도 있다는데 백 수십 톤의 바위를 어떻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푸마푼쿠를 비롯한 티와나쿠 유적에는 사암 외에 붉은색의 안산암도 많이 있는데 안산암은 코파카바나 가까운 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코파카바나에서 푸마푼쿠까지는 90킬로미터가 넘는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 올 수 있었을까?


판석형 대형 석재들이 길게 한 줄로 누워 있다.
건축물의 자재로 보이는 무거운 석판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땅바닥에 누워 있는 달의 문과 유사한 돌문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A.D. 536-600년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부터 1500년 정도 이전에 10킬로미터 또는 90킬로미터의 원거리에서 수십 톤이 넘는 석재들을 옮기고 집을 지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사람들의 신을 향한 집념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다.


티와나쿠 문화는 A.D.1000년경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급격한 환경의 변화와 농업 생산량의 감소 등으로 인해 집단적으로 도시와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안데스 산지로 옮겨 갔기 때문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 지역에 다시 새로운 국가가 나타나는 것은 12세기에 들어와서 잉카 제국이 성립하면서부터이니 그 사이 100여 년은 새로운 시대를 맞기 위한 과도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티와나쿠의 문화는 잉카 문화를 만드는데 단단한 초석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거대 판석재의 플랫폼
무게 131톤의 이 거대 석재에는 암각화들이 새겨져 있다. 티와나쿠 문화보다 늦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 판석에 새겨진 암각화의 일부

티와나쿠 유적에는 지금 유적지와 볼리비아의 여러 박물관에 남아 있는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곳에 드나들면서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유럽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티나와쿠의 많은 유물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 독일, 헝가리 등지의 유수한 박물관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귀여운 참새 한 마리 때문에 갑자기 푸마푼쿠가 마음 속으로 친숙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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