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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Mar 31. 2022

안데스의 함지박, 라파스 1

70대에 홀로 나선 중남미 사진 여행기 53

평화의 도시 라파스


3월 31일 점심을 먹은 것으로 티와나쿠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라파스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해서 호텔 사장한테 알아낸 정류소는 호텔 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큰길 옆이었다. 이곳은 정류장 표시도 없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 서 있으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다른 곳에 있다가 출발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이다. 혼자 낯선 곳을 다니다 보면 이런 걱정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시 호텔로 들어가 물어보니 조금 기다리면 올 것이라고 했다. 사장은 내가 걱정하는 것을 알고 나를 따라 나왔다. 조금 있으려니 길 건너 쪽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봉고차 같은 조그만 마이크로버스가 내 앞에 섰다. 라파스? 하고 소리치니 대꾸도 안 하고 타라는 손짓만 한다.


얼마 안 되어 그럭저럭 버스 안이 열명이 좀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길은 얼마 안가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넓은 평원 위에 높지 않은 건물들로 가득한 대 도시로 들어섰다. 엘알토이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알티플라노 고원의 도시다. 이곳은 라파스의 외곽으로 크게 보면 라파스의 일부인데 인구는 라파스 보다 많은 볼리비아 제2의 도시다. 라파스는 세 번째. 라파스의 국제공항도 이곳 엘알토에 있다.


보통 엘알토는 라파스와 하나의 도시로 인식되고 있는데 행정적으로는 다른 도시로 구별된다. 라파스의 인구를 150만이라고 하면 엘알토와 합쳐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엘알토의 인구가 80만이 넘으므로 인구만으로 보면 라파스는 엘알토보다 작은 볼리비아 3위의 도시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동부의 저지대에 있는  인구 240만의 산타크루스 데 라 시에라이다.


엘알토에서 내려다본 라파스 시


한 시간 반쯤 지나면서 길이 갑자기 급경사진 언덕길로 변하고 버스는 지그재그로 꼬불거리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알토가 끝나고 라파스로 접어든 것이다. 엘알토의 고원 위에 자리 잡았다면 라파스는 산골짝의 협곡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비탈진 길을 내려가던 버스가 멈춰 섰다. 종점이다.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택시를 불러 예약된 호텔 주소를 보여주었다.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택시는 거의 우버를 이용했다. 일부 작은 시골 도시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우버를 이용할 수 있었다. 우버는 운전기사의 신원이나 차량 정보 그리고 정확한 요금 결제 등으로 현지 정보를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매우 편리한 택시 시스템이다.


'라 파스'는 평화라는 뜻이다. 라파스의 공식 명칭은 '누에스트라 세뇨라 데 라 파스(Nuestra Señora de La Paz)' 즉 '평화의 성모'이며 라파스는 그것을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라파스는 처음 현재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라하(Laja)라는 곳에 있었다. 그곳은 이 일대의 잉카문화의 중심지였고 볼리비아에서 페루로 가는 중간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도시의 이름이 '평화의 성모'로 된 것은 스페인의 페루 및 남미 통치 정책에 반발한 곤살로 피사로의 봉기 이후 평화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곤살로  피사로는 잉카를 정복한 프란시스코의 동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그는 극악무도한 독재자였다.


독립영웅 무리요 장군의 동상이 있는 무리요 광장


라파스는 그 후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볼리비아 독립 혁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장군이 있었다. 라파스는 오늘날 볼리비아가 있기까지 수난과 영광의 역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역사의 도시임을 무리요 광장에서 알 수 있었다.


여장을 풀고 오후 시간은 라파스 시내를 걷기로 했다. 우선 박물관을 가고 싶어 무리요 광장으로 갔으나 이미 시간이 늦어 박물관은 문을 닫은 뒤였다. 내일은 월요일이니 라파스에서 박물관 구경은 틀렸다. 무리요 광장은 무리요의 동상이 있어서 뿐 아니라 그 주위로 대통령 집무실, 국회, 국립박물관, 국립극장, 평화의 성모 대성당, 주요 행정관서 등이 에워싸고 있는 명실상부한 라파스의 중심이다.


호텔에서 여기까지 천천히 걸어오는 것도 매우 숨이 찼다. 라파스의 시내 중심가는 해발 3600미터를 오르내린다. 그것도 그냥 평지가 아니라 언덕을 오르내려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럴 때 광장은 참 편안한 휴식처다.


무리요 광장은 비둘기 천국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오던 골목을 피하면서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골목길 하나를 골라 들어섰다. 도시의 골목길을 걸어보면 그 도시의 생얼굴을 만날 수 있다. 무리요 광장의 인근은 라파스의 중심지답게 오래된 행정관서의 건물들과 은행 등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나란히 그들의 역사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또 그 아래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똑같이 전통과 현대를 보여준다. 특히 이런 대도시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남성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리마에 내린 후 페루를 거쳐 볼리비아에 오기까지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푸노의 우로스 섬이나 타킬레 섬에서 전통의상 차림이 남성들을 만났지만 그것은 관광지의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라파스의 길거리에서 만난 전통의상의 남성들을 본 것은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거리의 사람들


현대식 고층 빌딩 밑으로 평화의 성모 대성당이 있고 그 아래 근대 건축물들이 마치 시대적 층위를 보여주는 듯하다. 길을 걷는 사람들도 이런 전통과 현대를 함께 아우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가는 신식 옷차림의 남자를 바라본다.
부부인듯 보이는 전통 복장의 두 사람이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라파스는 시내 낮은 곳도 대부분 언덕을 오르내려야 한다. 골목을 오르던 나이 든 여성이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한 아이는 걸리고 또 한 아이는 보자기 속에 업고 길을 나선 젊은 엄마. 풍성한 주름치마와 머리에 쓴 중산모는 모두 스페인에서 온 것들로 식민통치자들이 원주민에게 강제로 입혔다.
펼쳐놓은 물건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자 노점상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시내 중심가에는 부잣집 자녀들을 위한 사립학교도 있다. 학교 끝나고 스쿨버스를 타는 학생들에게서 여유로움이 묻어 있다. 여군들이 휴가 나왔나보다. 친구와 담소중인 여군들.
우리 식당에 오시죠. 피에로 분장을 하고 호객을 하는 남자가 포즈를 취해준다.


부자와 빈자는 숨 쉬는 것도 다르다


라파스 시의 중심지는 무리요 광장보다는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앞의 대로변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상업적 중심지라 할 수 있는데 근처에는 관광객이  들린다는 마녀 시장도 있고 번화한 상점가와 음식점들도 많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중심지 네거리에서 두리번거리며 근처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맞은편 빌딩의 유리벽에서 무척 흥미로운 풍경을 발견했다. 도심지 빌딩들 뒤쪽으로 붉은색의 상자들을 얼기설기 쌓아놓은 듯 한 달동네 풍경이 유리벽 위에서 이리저리 비틀어지고 구불어져 보였다. 뿐 아니라 유리창의 연결선으로 인해 풍경은 한 조각씩 잘라진 것을 다시 모아 붙여놓은 듯 보였다.


그제야 이곳이 낮은 저지대의 시 중심지와 높은 고지대의 달동네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것이 생각났다. 유리에 반영된 도시는 이리저리 틀어지고 왜곡되어 마치 이 도시가 안고 있는 모순 덩어리들이 유리벽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저 산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산소의 양은 급감된다. 그래서 라파스에서는 부자들과 빈자들이 소비하는 산소의 양이 다르다.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숨 쉬는 데도 차이가 있다는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현상이 라파스에 있는 것이다.


건물의 유리벽에 비친 일그러진 라파스


이러한 도시의 형태는 골목을 다니면서 줄곧 나의 눈길을 끌었다. 골목 끝에는 언제나 붉은색의 달동네가 하늘을 향해 친 병풍이 쳐 있었다.  한 도시의 빈부의 차이를 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내는 도시를 나는 본 일이 없다. 어느 도시거나 가난한 동네는 있고 산동네도 달동네도 있다. 그런 동네를 보려고 하면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데 대체로 도시 뒤편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라파스의 달동네는 시내 어디서든지 한눈에 들어온다. 라파스의 도시 형태는 도시 중심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그 주변은 모두 급경사의 산비탈로 이루어져 도시는 마치 커다란 함지박처럼 생겼다. 평화의 함지박이다. 함지박의 벽에 붙어사는 사람들에게도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골목 끝을 막고 있는 산동네의 붉은색 주택들


라파스의 시 중심은 3500미터에서 3600미터 사이이고 주변의 높은 지역은 4100미터 안팎이다.  표고 차이는 약 400에서 500미터 정도이다. 400미터의 급 경사가 도시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연결하는 도로는 직선이 없고 모두 지그재그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를 낡은 소형차들과 마이크로버스 등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그 차량들이 뿜어내는 매연이 시내를 뒤덮는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도로로 인해 연료 소비량이 많은 것은 물론 공해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케이블카의 설치이다. 케이블카의 설치는 이미 1970년대부터 계획이 있었다는데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고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기 때문에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올라왔으나 항상 빌 공자 공약이 되어 버렸다. 이 오랜 계획은 40년을 흘쩍 넘긴 2014년에야 겨우 실현될 수 있었다.


라파스 중심과 엘 알토 지역을 연결하는 케이블카


케이블카는 라파스 사람들은 케이블카를 '미 텔레페리코(Mi Teleferico)'라고 부른다. 번역하면 '나의 케이블카'이다. 2014년도에 처음 운행이 되기 시작한 노선은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표현되는 세 개의 노선이다. 이 세 가지 색은 볼리비아 국기의 색이다. 내가 라파스를 찾은 2019년 4월 1일에는 모두 10개의 노선이 있었다. 그 후 2020년 한 노선이 추가되어 지금은 11개의 노선이 있다고 한다.


이 케이블카는 도시 교통 네트워크로 구축된 세계 첫 사례이다. 이 시스템은 2018년에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 및 이동성 부문에서 라탐 스마트 시티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모르더라도 라파스에 간 사람은 무조건 이 케이블카를 타게 돼 있다. 그만큼 케이블카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충분한 라파스의 명물이 되었다.


케이블카 정류장은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를 끄는 것으로 보였다.

케이블카 노선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는 6호선을 탔다. 케이블카를 타는 것은 단순히 저 높은 곳에 가서 라파스 시내를 굽어보고자 하는 목적 만이 아니라 케이블카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는 것 또한 일품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눈 아래로 산동네 집들의 지붕들만 보이는 줄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라파스가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을 일일이 말로 할 수 없으니 몇 장의 사진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케이블카에서 보는 라파스의 아름다운 풍경들
엘알토의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내려다본 라파스 시내의 야경


호텔 근처에는 마녀 시장이라는 이름의 시장이 있다. '마녀'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시장에서 파는 물건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냥 모든 종류의 상품이 거래되고 있는 전통시장이다.


마녀 시장이라는 이름은 주술사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고파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주술사들이나 또는 민간 신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사용품, 환각제 또는 유사한 식물 , 희생용 동물이나  육류 등이 많이 거래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거래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특별한 것은 알 수 없고 그냥 온갖 용품을 파는 재래시장이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큰 관심이 없어 시장을 그냥 통과하고 하루 일정을 끝냈다.



사진으로 보는 마녀 시장 사람들


시장의 가게에는 특정된 상품이 없다. 채소부터 사탕 화장품 약품 집안에서 쓰는 소소한 물건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다. 손님이 없어 주인은 늘 심심하다.
여행자의 눈에는 가게 주인과 손님이 구별이 안되기도 한다.


스포츠 의류 가게에 늘어선 마네킹들이 가게를 나서는 손님에게 인사하고 있다.
시장의 길 가에도 전문점들이 있다. 장난감 아주머니와 꽃 파는 아저씨.


거리의 가로수 뒤로 갑자기 무지개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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