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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gweon Yim Aug 12. 2022

끝나지 않은 여행의 끝 3 (마지막 회)

70대에 홀로 떠난 중남미 사진 여행기 68

섬망증에서 벗어나다


내 가방을 가지고 왔던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돈 기예르모 호텔 사장 부부가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의 섬망 증세는 2,3일 더 계속되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를 해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딸과 사위를 교대로 내 옆에 붙어 있도록 했고 의료진을 절대 믿지 말라는 주의를 주곤 했다.  


호텔 사장 부부가 돌아간 다음날 병실을 또 다른 중환자실로 옮겼다. 내가 계속 의료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위는 내가 하는 말에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28일 내가 다시 이상한 말을 반복하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푼타 아레나스에서 경찰들에게 보호받던 4월 19일부터의 이야기를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사위가 이곳에 도착한 후 영사 실무관으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것이다.


아직 중환자실이지만 팔목에 붙어 있던 주삿바늘이 모두 제거된 것으로 보아 상태가 상당히 좋아진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에 길게 두개골 절단 후 봉합한 흔적이 보인다.


그 설명을 다 듣고 나니 갑자기 잃어버렸던 기억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푼타 아레나스의 거리를 가방 두 개를 메고 들고 헤매고 있었다. 날씨는 추웠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다만 내가 왜 여기를 이렇게 걷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이것이 내가 떠올린 기억의 모두였다. 아마 그 후 거리 어디에선가 쓰러진 듯하다. 비로소 내 무릎을 보았다. 아니 그 무릎은 어제도 또는 그제도 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릎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릎은 상당한 면적이 검은 먹색으로 변해 있었다. 피부 속으로 시커멓게 죽은 핏덩이가 굳어 있었다. 그걸로 보아 내가 거리에서 무릎을 찧으면서 주저앉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마도 그것을 경찰들이 보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누가 어깨에 매달려 있던 카메라를 집어가고 경찰에 알려준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면 길가던 행인이 신고했거나.


어쨌든 이 기억의 조각은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이야기들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으로 판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환상이 걷힌 것은 아니었다. 이날인가 다음날인가 또 그 후인가 나는 딸 수진이가 내 환상 속의 게임 심포지엄 현장에서 테러리스트들의 총격 속에 살아남았다는 임 교수에게 확인 전화를 했었다고 알고 있었다. 아마도 수진에게서 전화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수진에게 하니,     


"아빠 난 그 임 교수님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전화를 걸겠어?"

     

라고 대답했다. 나의 환상은 내 머리의 어느 곳까지 들어차 있었던 것일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런 현상을 섬망증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내 머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만져본 머리에는 뒤쪽 일부에만 긴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머리는 삭발을 해서 민머리로 변해 있었다. 오랜만에 본 거울 속에는 이마 위에 스테이플러에 찍힌 철사 자국이 길게 붙어 있는 괴상한 나의 머리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머리에 큰 수술을 받고 누워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현재 상황이 이제야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내 기억이 사라진 4월 19일부터 열흘째이고 수술을 받은 22일 새벽부터는 7일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기간 동안의 나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병실 침대에 누워서 본 푼타 아레나스의 교외 풍경. 마젤란 해협에서 올라온 안개가 단풍 든 산등성이를 덮고 있다. 5월의 푼타 아레나스는 초겨울로 들어가는 계절이다.


마젤란 병원을 떠나다


29일 일반 병실로 옮긴 날부터는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벗어나고 싶었다. 퇴원이 가능한지 알아보았지만 수술을 담당했던 크리스티안(Cristian) 박사는 상태가 급속도로 호전되어가기는 하지만 퇴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했다. 그러나 나와 딸아이 부부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나머지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5월 2일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크리스티안 박사는 조건을 붙였다. 비행기가 여러 공항을 경유할 텐데 경유 공항마다 하루씩 호텔에서 머물고 가야 한다고 했다. 오랜 비행으로 체력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 수술부위도 무리로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 2일 11시 드디어 병원 문을 나섰다. 푼타 아레나스의 거리로 나왔는데 거리는 너무 낯설었다. 내가 묵은 호텔도 시내 중심가였던 것 같은데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아카키코 스시(Akakiko Sushi)'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음식점이었다.


음식점 사장은 서인보라는 한국 청년인데 이번 나의 사고 이후 내 사고 수습을 담당한 영사 실무관을 현지에서 도왔던 사람이다. 퇴원 후 알아보니 서인보 사장은 영사 실무관을 충실히 도왔던 것은 물론 나를 보살핀 딸과 사위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인물이었다. 그는 푼타 아레나스에 자리 잡은 지 20년이 가깝다고 하는데 아직도 미혼이었다. 시내에는 많은 칠레 친구들이 있었고 특히 내가 입원했던 마젤란 국립병원에도 친구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그는 사위와 부산의 고등학교 1년 후배였다. 고등학교 선후배 인연까지 얽혀서 서 사장은 우리에게 진심을 다해 잘해주려 애를 썼다. 이 대목에서 그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인보 씨가 경영하는 아카키코 스시 식당


오후 4시경 푼타 아레나스를 이륙한 비행기는 오후 6시 반 경에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미리 예약해 놓은 공항 옆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여기서는 내일 하루를 쉬면서 영사관의 정영식 총영사와 나를 위해 푼타 아레나스까지 와서 많은 애를 쓴 박준이 영사 실무관을 만나기로 했다.  박 실무관은 공항까지 영접을 나왔다. 영사관에서 나를 위해 여러 가지로 현지 경찰을 비롯해서 의료진들에 이르기까지 연락을 취하고 또 직접 현지까지 와서 나의 상태를 체크하는 등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해서 한국 국적인이라는 데에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2003년인가 4년인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택시운전사가 내 카메라와 컴퓨터가 든 가방을 싣고 줄행랑을 쳐 곤경에 빠진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자카르타 영사관에서 영사 한분이 나와서 애를 써준 덕분에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카메라와 컴퓨터를 되찾을 수도 있었다. 해외 대사관이나 영사관들이 여행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일도 많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 들은 바 있으나 나는 현지 외교관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번에는 생명을 건지는 일에 큰 덕을 보았으니 나에게 외국의 현지 외교관은 은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당일 저녁 정영식 총영사와 박실무관에게 감사의 표시로 저녁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식사 후 계산을 하려 하니 이미 계산이 되어 있었다. 뜻 하지 않게 또 음식 접대까지 받았으니 뭐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정영식 총영사로부터 안동의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먼 칠레로 전화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안동의 친구와 지인들이 많이 걱정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새긴 기억의 소중함


다음 날은 산티아고 시의 중앙광장으로 시내 구경을 나갔다.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니 이곳저곳 다닐 수는 없었으나 중앙 광장의 한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자식들과 함께 먹으니 이제야 내가 목숨을 부지하고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안도의 느낌이 가슴속에 꽉 차게 들어왔다. 시내까지 나온 김에 내가 꼭 보고 싶었던 박물관을 한 곳 들렸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museum of memory and human rights)'이다.


기억과 인권의 박물관은 멕시코 시티의 기억과 관용 박물관(museum of memory and tolerance)과 리마의 기억의 장소(기억 관용 및 사회적 포용의 장소, Lugar de la Memoria, la Tolerancia y la Inclusión Social, 줄여서 LUM이라 부른다) 등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꼭 챙겨 보고 싶었던 곳이다. 산티아고에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 밖에 온통 하루를 쉬게 되어 이곳을 보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이 세 나라의 박물관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간 어휘는 '기억' '관용' '인권' 등이다. 독재에 희생된 인권은 사실 그대로 밝혀져야 하고 기억되어야 한다. 그 후 관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어휘들이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사위가 밀어주는 대로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리마의 기억의 장소와 유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칠레 현대사를 암흑으로 몰고 간 독재자 피노체트는 1973년 쿠데타로 아옌데 대통령을 죽이고(실제로는 반란군에게 저항하다가 소총으로 자살) 17년간 집권을 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정치적 이유로 인권침해를 당한 사람이 4만 명이 넘고 실종 또는 살해당한 사람이 3000명이 넘었다. 38,000명이 불법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피노체트는 시민들의 저항에 못 견뎌 결국 대통령을 사임했지만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을 위협하고 뒤에 영국으로 가서 살다가 체포되었으나 면책특권을 주장해 다시 칠레로 들어왔다고 한다. 칠레에 귀국한 뒤에도 그는 어려움 없이 살았다. 2006년 11월 아옌데 전 대통령 경호원 살해 혐의로 체포된 후 가택연금 중 심장마비가 와서 92세로 사망했는데 사망 후 국장 논의까지 있었다고 하니 먼 나라에서 온 나도 속이 터질 지경이다. 어쩌면 우리의 20세기 후반과 그리 비슷한지. 그의 부인은 2021년 12월 99세로 죽었으니 희대의 독재자 부부는 평생 남 못할 일 하다가 천수를 다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갔다.


그는 박정희와 판박이라고 하는데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죽은 것과 달리 90을 넘기면서 천수를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간 것은 도대체 세상은 그리 공평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피노체트 치하의 많은 희생자들과 희생자들이 남긴 유물들 그리고 기록이 이 기억과 인권 박물관에 있고 많은 젊은 세대가 와서 확인을 하고 있으니 다시는 그런 자들이 집권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Museo de la Memoria y los Derechos Humanos, Santiago de Chile)


막판에 바뀐 여행기의 끝맺음


하루를 산티아고 시내에서 편안히 쉬었다. 휠체어 신세를 졌지만 박물관도 가보고 중앙 광장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밤 9시 15분 멕시코 시티 행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캄캄한 밤하늘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멀리 동쪽으로 칠레 해안에서 3500 여 킬로미터 떨어진 태평양 한가운데의 이스터 섬이 왼쪽 창밖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스터 섬, 한 네덜란드 탐험가가 부활절에 발견해서 붙었다는 이 섬의 폴리네시아 이름은 라파누이이다. 내가 여행을 시작한 목적은 라파누이에 있는 모아이라고 부르는 석인상을 보는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 모아이 뒤로 넘어가는 석양을 촬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5월 6일 밤에 산티아고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사흘이나 빠른 5월 3일 밤, 지금 나는 산티아고를 떠나 멕시코 시티로 가는 중이다.


젊었을 때부터 나의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모아이 석상은 바로 지척에서 다시 머릿속 어느 구석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처음 계획했던 여행의 끝맺음은 막판에 와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끝나지 않은 끝'을 맺고 말았다.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것은 5월 4일 새벽 5시이고 다시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인 몬트레이행 비행기를 탄 것은 아침 9시였다. 그리고 몬트레이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탄 것은 5월 5일 새벽 1시였다. 시계가 하루빨리 가는 인천에 도착한 것은 5월 6일 새벽 6시였다. 2월 20일 12시경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으니 76일 만의 귀국이다. 처음 계획한 날짜보다 4일이 부족하지만 날짜는 거의 채운 셈이다.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이스터 섬을 갈 수 없었으나 파타고니아 지역의 칠레 국립병원 경험을 톡톡히 했다. 죽음의 문턱을 경험했으니 70 넘어 시도한 나 홀로 배낭여행으로는 경험할 대로 다 경험한 셈이 아닌가?


언제인가 토레스 델 파이네와 이스터 섬을 찾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돈 기예르모 호스텔에 다시 갈 것이다. 또 마젤란 국립병원의 크리스티안 박사도 꼭 다시 만나 맛있는 음식이라도 나누어야지. 그리고 그때 나의 길고 긴 여행은 해피엔딩으로 끝맺음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


위에서 중간중간 고마움을 표현하긴 했지만 나의 목숨을 구해준 여러분들께 다시 감사의 말을 전한다.


가장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푼타 아레나스의 이름 모를 경찰관들이다. 이들이 거리에서 나를 보살피고 경찰서에서 잠까지 재우고 또 푸에르토 나탈레스행 버스까지 태워주지 않았던들 나는 푼타 아레나스의 어느 골목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돈 기예르모 호스텔 사장에게 감사드린다. 먼저 내가 이 여자분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인터넷의 호텔 홈페이지를 보고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이 오지 않는다. 이 호스텔 사장은 나의 생명을 구해준 첫 번째 은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방에 쓰러진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비행기까지 태워 푼타 아레나스의 마젤란 국립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애써주었고 또 나의 짐을 왕복 8시간이나 운전을 해 가면서 병원으로 가져다주었다. 이 분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살려 놓은 마젤란 국립병원의 크리스티안 박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의 두개골을 잘라 경막 밑에 고인 많은 양의 피를 제거하고 안전하게 수술을 해서 나의 목숨을 살렸다. 칠레의 국립병원 체계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응급 환자의 신원이나 치료비를 낼 수 있는 경제력 등에 관계없이 이곳을 지나치는 수많은 여행자 중의 하나일 뿐인 나를 최선을 다해 치료해준 것은 다른 잘 사는 나라에서는 잘 겪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크리스티안 박사는 내가 칠레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제야 고마운 한국 사람들을 들어야겠다.


실종신고를 접수하고 두 시간 만에 나를 찾아내고 내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멜 때 병원 당국에 최선을 다하도록 노력해준 산티아고 한국 영사관의 정영식 총영사와 직접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날아와 나의 상태를 확인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많은 신경을 써준 박준이 실무관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박 실무관은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부터 떠날 때까지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고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푼타 아레나스의 아카키코 스시집을 경영하는 서인보 사장도 뺄 수 없다. 그는 박준이 영사 실무관을 보조해서 현지에서의 여러 일들을 해결해 주었고 나의 딸과 사위가 푼타 아레나스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다. 내가 남겨 놓고 온 짐들까지 챙겨서 한국으로 보내준 수고까지 해준 서 사장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 나의 여행 일정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살펴보고 위급 상황을 타고난 감각으로 인지해서 실종신고를 하고 한국에서 남극에 붙어 있는 먼 곳 푼타 아레나스까지 날아와서 나를 돌보아준 나의 사위 허승찬과 딸 수진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식인데 당연하지 않으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섬망 증세는 얼마나 더 오래갔을지 알 수 없다. 또 말이 안 통하는 지구 끝에서 내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맨 끝에서야 감사를 표하는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또 한 사람의 가족이 있다. 나에게 달려 오지는 못했지만 내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딸 부부를 대신해 외손녀들을 돌보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한 나의 아내 정애영에게 어찌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아내는 내가 돌아온 날부터 나와 함께 병원 살이를 하며 그해 12월 내가 마지막 두개골 수술을 끝낼 때까지 안동에서 서울로 자동차를 운전해서 병원 출입을 함께 해주었다. 아무리 부부라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안동에 온 후 수십 년 동안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 지인 여러분들께 고마움을 표한다. 칠레 영사관까지 전화해주신 분도 있고 많은 분들이 매일매일 나의 소식을 페이스북을 통해 듣고 걱정을 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늦게야 알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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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루한 여행기를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빠른 시일 안에 내용을 다시 다듬어 출간하고자 합니다. 그 때 책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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