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가 처음 만나본 부류의 팀장이었다.
서른일곱.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직장으로 이직을 했다.
늘 하던 일의 루틴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열망하던 중,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첫 입사 제안 메일을 받은 건 2017년 10월 즈음이었다. 메일함에는 낯선 회사의 이름과 발송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임소도 님, 당신을 채용하고 싶습니다." 누가 봐도 스팸메일로 분류하기 딱 좋은 제목이었다. 아무런 의식의 저항 없이 메일을 클릭했고, 안에는 꽤 심플한 내용의 텍스트가 적혀있었다. 아마 텍스트 뒤로 어떤 현란한 이미지라던가 디자인의 흔적이 보였다면 나는 아마 메일을 읽지도 않고 휴지통으로 넣었을 것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임소도 님.
저희는 주식회사 풍천입니다.
귀하께서 그간 000에서 해오셨던 일의 이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바람을 이용해 자연 그대로로 생명을 길러내는 일을 하는 회사입니다.
주요 수출품은 장어이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생물들을 번식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국외 수출에만 집중을 하였으나, 금번 시세 확장으로 인해 국내 홍보 인원을 충원하고자 합니다.
답변을 주시면 추후 면접 일정 등을 유선 전화로 안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기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흘려버리기엔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드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연차도 많이 남아있는데 하루 바람이나 쐴 겸 다녀와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쌀쌀했던 가을이었고, 평소 입지 않던 원피스를 꺼내 입고 면접장소로 향했다. 삼십 대 중반이 되었어도 면접은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켰다
면접장에는 인사팀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앉아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남자분 한분과 차장 직함의 여성분, 두 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일 할 팀의 팀원이라는 내 또래의 남녀 한 명씩이었다.
면접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렇게 이상한 질문을 하지도 않았고 유별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었다.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팀장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출장이 겹쳐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응,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면접 후.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람이 구해질 때까지 좀 더 일을 봐주고 인수인계를 마치고 하다 보니 첫 출근까지 석 달의 시간이 걸렸다. 이직 치고는 꽤 오랜 기간이 걸린 거였지만, 새로 옮길 회사에서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출근도 하지 않았는데 고마운 마음부터 가는 회사였다.
이직 후 처음 몇 달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피곤해서 대상포진에 걸리기도 했다. 업무에 적응하는 사이 기존에 있던 팀장이 퇴사를 하고 새 팀장이 왔다. 여자였다. 크게 모날 것 없어 보이는 인상의 그녀가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후여서 그런지 나는 제법 능숙하게 그녀에게 업무를 설명하고, 보고했다. 합도 잘 맞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인생 꽃길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거의 처음이었던가? 이런 꽃길.' 드디어 내 인생에도 광명의 날이 오는 것인가 싶었다. 행복했다. 팀장 복이 없어 늘 시달리기만 하고 달달 볶이기만 하던 나를 신이 갸륵하게 보고 보내준 선물 같았다.
그녀는 늘 나보다 먼저 퇴근했다. 말로만 듣던 칼퇴근이었다. 직장인에게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기본 사항이지만, 권리처럼 애써서 찾아 먹어야 하는 단어 아녔던가. 그런데 그것이 매일 반복됐다. 에브리데이. 그녀는 늘 정해진 시간이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그것에 대해 특별히 생색을 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정해진 업무 시간 외에는 메신저를 보내는 법도 없었고, 내 점심시간을 무례하게 침범하지도 않았다. 팀원들이 정하는 메뉴는 무엇이든 잘 먹었고, 외부 미팅을 가거나 할 때도 변수를 만들지 않았다. 생전 안 찾던 자료를 갑자기 찾는다던가, 가물가물한 수치를 묻는다던가 하는 사소하면서 사람을 바짝 긴장시키는 류의 일은 그녀와 나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에서나 침착했고 유순했다. 때로 내가 버벅대거나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에도 그녀는 늘 나를 기다려주었다. 침묵을 오래 끌고 가지도 않았다.
그녀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팀장이었다. 그런 팀장을 만나는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는 어느새 그녀를 팀장의 표준으로 삼고 있었다. 부러워하는 친구들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들 아닌지를 은근히 되묻기도 했다. 일종의 자만심 같은 것이었다. '응, 뭐... 다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식의 아주 재수 없는 속내를 새까맣게 품고 시종일관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내 평생의 팀장 운이 그녀로 인해 다 소진되었으니, 다음에 만나는 팀장은 분명 지랄 맞을 것이라 말하는 타 부서원들에게도 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이제 막 시작된 내 꽃길이 이렇게 끝날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반년을 보냈을까? 회사에는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로운 부장 자리로 올 사람에 대한 쑥덕거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전 직장에서도 까다롭기로 소문이 자자한 모양이었다. 직속 팀장도 아니고 부장 바뀌는 게 큰 대수랴 싶었다. 기껏해야 출퇴근 길에 인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고, 월례회의 정도에서 마주칠 때나 스트레스 좀 받겠거니 싶었다. 실제로 업무적으로 대리랑 부장이 마주칠 일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순전히 남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새 부장님이 첫 출근을 했다. 한 여름 더위가 계속되던 9월 초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