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가 처음 만나본 부류의 부장이었다.
하도 남일처럼 여겨서 그런지 남자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 달리 새로 온 부장은 여자였다. 예쁜 생김새의 얼굴이었다. 똑 부러져 보이는 야무진 인상이었다.
출근 첫날부터 약 한 달간은 얼굴을 제대로 마주치기도 어려웠다. 각 부서 팀장들과의 연신 계속되는 회의와 대외적인 미팅 등이 많아 보였다. 순적했다. 내가 예상했던 그 정도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배에 돛 단 듯 순항할 것이라 생각했다.
주말을 잘 보내고 여느 월요일과 다름없던 출근길. 사무실에 들어서자 총무팀 직원들이 바빠 보였다. 부장님 지시로 오늘부터 자리를 재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팀 자리 재배치를 한다는 말은 들었던 것 같은데, 우리 팀도 포함이었나? 싶었다.
같은 팀 남자 직원 하나가 슬며시 옆에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새 부장님 기조가 직급 상관없이 현업과 함께 달리는 마인드래. 그래서 보고도 팀장 거쳐서 받는 게 아니라 대리 사원들 한테 직접 받고, 거의 직속 팀장처럼 하나하나 관리하면 된다고 보면 된대"
아 씨.... 망했네. 느낌이 싸했다. 내 앞길의 신수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괜스레 짜증도 났다. 하필이면 내 자리가 부장의 바로 방문 앞이었다. 내 왼쪽이 팀장님, 오른쪽이 남자 직원. 그리고 우리의 등 뒤로 부장님 방의 통유리가 펼쳐져 있는 형국이었다. 최악이었다. 업무 시간에 딴짓을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늘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유쾌하지 못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
오죽하면 노래로 다 만들어졌겠는가. 내 슬프고도 불길한 예감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재배치 한 그날부터 잠시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 없었다.
새로운 부장님은 연신 나와 같은 일반직 사원과 대리들을 채찍질했다. 한없이 유순하고 평온하던 나의 그녀도 부장님이 쪼기 시작하자 평정심을 잃기 시작했다. 우리는 불안하고 거친 눈빛의 부장님으로 인해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일단, 새 부장님은 노여움이 많았다. 잠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방 문을 노크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다. 팀장님이건, 나건, 내 옆의 남자 직원이건 쉴 새 없이 호출을 했다. 일의 진행 상황을 단계별로 체크했다. 조금이라도 지체가 되는 상황이 되면 언성을 높여댔다.
이직 후 가장 큰 메리트로 느껴졌던 칼퇴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됐다. 그래도 팀장님은 대부분 칼퇴를 고수했지만, 나와 같은 대리 사원 조무래기들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새벽 1시를 넘기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겨우겨우 퇴근하고 자리에 누울라치면 카톡이 울리는 날도 다반사였다. 끊임없는 업무 지시였다.
그렇게 반년 가까이를 보냈다. 이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쪽잠을 자가며 그 많은 업무량을 쳐냈는지 신기할 정도다. 만약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나는 빌어먹고 사는 편을 택하겠다.
가장 적응이 안 되었던 것 중 하나는, 인내심 많은 팀장님의 멘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모든 보고를 직접 받기 시작하자 업무에는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팀장님은 모든 것을 크로스로 체크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방에 들어가는 모든 보고는 팀장님을 먼저 거쳐야 했다. 심지어 부장님의 점심 메뉴도 똑같이 먹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보고나 일의 진행 등에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느껴질라치면 그녀도 참지 못했다. 바이러스에 전파라도 된 것처럼 부장님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아... 나의 인내심 많은 그녀가. 그렇게도 유순하고 오래 참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님을 떠나보내는 게 이런 심정이겠구나 싶었다. 나는 팀장님에게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점점 사람의 몰골을 잃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옆 자리의 남자 직원이었다. 나는 부장님과 팀장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는 태평했다. 나는 새벽에도 부장님의 호출을 받느라 잠을 설쳐대는데, 그는 누가 봐도 잘 자고 일어난 말끔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아, 부장님이 카톡을 그렇게 보내시는데... 못 보셨나 봐요?"라고 물으면, 그는 눈치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정말요? 한번 잠들면 소리를 못 들어서 하하"라고.
너무 짜증 나고 약이 올랐지만, 그는 정말로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못 듣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부장님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내 DNA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그녀들의 안테나가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든 부장님과 팀장님과 신호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와 나는 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팀원이었지만, 적군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팀장님과 부장님은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모두 거부하는 것 같았다. 남자 직원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내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몇 가지만 간신히 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얄미움이 한도를 초과하는 것 같은 날은 온갖 신경과 짜증을 그에게 쏟아냈다. 어느 날은 나에게 “저...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라고 묻기도 했다. 아마도 얼마 전 내가 “저는 부장님이 언제 부르실지 몰라서 똥도 못 싸러 가는데, 화장실을 참 편히 가시네요”라고 쏘아붙여서인 것 같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상 미친년이었던 내 성격을 받아내느라 그도 참 고생이었겠다 싶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벌써 회사에 입사한 지 38개월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팀장님은 없던 똥고집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융통성 있게 자라났다. 부장님 역시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시기를 지나 조금은 말이 통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팀장님과 부장님 둘이 직접 소통을 하며 일을 진행하는 경우도 꽤 늘었고, 내 옆의 남자 직원 또한 듬직하게 성장해주었다. 앞으로의 내 회사 생활이 또 어떤 국면을 맞게 될지는 모르겠다. 만 3년이 넘어가니 이제야 조금 할만하다 싶게 느껴지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으로 봐서는 앞으로도 할 만은 할 것 같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챌 수 있었을까? 이것은 나의 새로운 직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출근은 있지만 퇴근은 없고, 한번 출산하고 나면 출구는 없는... ‘육아’에 대한 이야기.
위 글에 등장하는 팀장은 특별할 정도로 순한 첫째 아이고, 이상한 부장은 둘째. 같은 팀의 눈치 없는 남자 직원이 바로 내 남편이다. 이제는 흘러간 육아 초기의 과거지만 회상하며 적어 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질만큼 내게는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육아의 주무대인 가정을 직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이전에 했던 웬만한 노동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도가 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육아가 직장 생활보다 나았을 수 있겠으나 나에게는 아니었다.
아이가 하나만 있었을 때는 모든 게 수월했고 할 만했다. 심지어 행복했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기 시작하자 모든 게 바뀌었다. 아마도 내가 13개월 차이의 연년생 육아에 당첨되었기 때문에 더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서른여덟 살에 첫째를 낳고 바로 뒤이어 둘째를 낳았다. 마흔 전에는 출산을 끝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키울 때 조금 힘들어도 조금만 고생하면 금방 둘이 잘 놀기 시작하면서 손이 덜 갈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 고생은 두배, 세배로 늘어났고 잘 놀기는커녕.... '이 쪼끄만한 애들이 벌써부터 싸우기 시작한다고?' 싶을 만큼 자매는 피바람 부는 전쟁을 시작했다.
물론, 잘 놀 때도 있었다. 하루를 100으로 나눈다면 2쯤이 그에 해당했다. 나머지 98은 뺏고 뺏기고 그걸 또 뜯어말리고.... 엉망진창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진이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소파에 누워 핸드폰 하나를 손에 들 기력만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정말이지 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들이었다. 왜 육아를 하는데 '자괴감'까지 드는 것인지...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어느 날 미혼인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을 하는데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야, 육아가 나아, 직장생활이 나아?"
"당연히 직장생활이 낫지"
"왜? 그래도 집에는 회사에서 같은 미친놈들은 없잖아"
"응... 그래도 그 미친놈은 6시면 집에 가잖아...
그 미친놈은 그래도. 나한테 기저귀 갈아달라 놀아달라 재워달라 먹여달라 하지는 않잖아."
멀리서 보던 육아와 직접 해보는 육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집에서 보는 직장생활도 전과는 달라 보였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선인들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 당시의 감정을 살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출근하는 남편이 부럽다 못해 가끔은 얄미워 보이기까지 했다. 애와 단 둘이 남겨져 있는 적막강산 같은 이 집에서 나가 자유를 누리고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직장도 분명 호락호락할 리 없는 곳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느껴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