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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Oct 29. 2022

환희와 환장의 공존

멀리서 보던 육아와 직접 해보는 육아의 간극

누구에게나 갖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도 저런 집에 한 번 살아보고 싶어'와 같은, 이상향. 


나에게는 여의도가 그랬다. 학생 때고, 직장인일 때고 여의도를 지날 때면 여의도에서 회사를 다니는 저들이 부러웠었다. 내 책상도 저 건물 어딘가에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다니던 전 직장은 여의도에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면 되었는데,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그게 참 마음에 들었었다. 야근 후 금세 걸어가 여의도 아무 편의점 앞에 앉아 따는 맥주 한 캔이 단연 최고였다. 어떤 꿈 중 한 가지를 이룬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작은 메달 같은 기분은 사그라들었다. 약간의 감사함만을 남긴 채 크기가 줄어들었다. 예쁜 인형을 볼 때마다 사고 싶었지만 집에 들여놓는 순간 더 손이 안 가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결혼을 꿈꿨고, 삼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 꿈을 이루었다. 가끔 연차라도 내고 집에서 쉬는 날이면 한가로운 평일 낮에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여자들이 부러웠었다. 멀리서 보던 그녀들의 삶은 평온해 보였다. 연애와 결혼이라는 산 하나를 넘어 예쁜 아기까지 낳았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다. 


이제 나도 결혼과 출산이라는 봉우리 하나를 정복했으니, 반은 이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째를 임신하고 배가 불러오면서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러다 둘째를 출산 한 뒤에야 알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있어 '자괴감'은 필수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분명 임신 중에 공부한답시고 봤던 임신육아 대백과에는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고작 3년 좀 넘는 육아를 통해 나는 거의 매일 내 바닥을 마주했다. 어떤 날은 이렇게 부족하다 못해 모자란 인간에게 태어난 아이에게 미안해 눈물이 나기도 했다.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이를 낳은 후에 내 삶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왜 모두 함구했을까. 우습지만 어느 날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같이 죽자는 건가...? 그래서 아무도 말은 안 해준 걸까?'라는.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출산 반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아이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기쁨과 예쁨을 선물해주었다. 내 심장을 줘도 아깝지 않은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종일 본 게 애 얼굴밖에 없는데 아이가 잠들고 나면 낮에 찍어둔 아이 사진을 보다 실실거리며 잠이 들었다. 


행복, 사랑 등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단어에 형체가 생긴다면 그게 바로 내 아이다 싶을 정도였다.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만큼 정말 힘이 들었다. 육아는 출산처럼 몇 시간에서 며칠이면 끝나는 고통이 아니었다. 대략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멈출 수 없는 레이스이기 때문이었다. 내 몸에서 나와 탯줄이 분리됐다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과 육체적으로 자립시킬 수 있을 때까지 뼈를 갈아 넣는 헌신이 필요했다. 매일 매 순간 나의 본성을 꺾는 일이었다. 


나는 내가 변태 같았다. 그 변태스러움에 질려 웃다 울고를 반복하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이가 너무 예뻐 소리를 지르다가 제발 그만 좀 하라며 악을 쓰기도 했다. 엄마와 미친년의 중간쯤에 내가 있는 것 같았다(미친년 쪽에 더 확신을 두기는 했지만).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싶다가 더 못해줘서 미안하다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간절한데 막상 혼자 나가면 틈 날 때마다 사진첩 속 아이를 뒤적거렸다. 이게 변태가 아니고 뭐겠나. 나는 나라는 존재를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왜 인간의 인생은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사촌이 땅을 샀는데 내 배가 아플까. 멀리서 볼 때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고 따뜻해 보이던 육아의 모습이 나한테 오니 이렇게 허름해 보이는 걸까. 알 수 없다. 당연한 말 일수도 있다. 언제는 인생을 알겠고, 할만해서 살았던가? 장담컨대 아니었다. 


다만, 이제 둘째가 두 돌 좀 지나고 보니 알겠는 것 한두 가지 정도가 생겼을 뿐이다. 


그때는 끝이 안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선 이 터널에도 햇볕 드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마저도 고작 한두 개 정도밖에 발견하지 못했지만, 발견했다는 것이 어딘가. 암흑만으로 끝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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