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릴 때 가장 무서웠던 일 중 하나를 꼽으라면, 치과가 떠오른다. 엄마를 닮아 이가 약했던 탓에 나는 항상 치과를 자주 다녔다.
아마도 내 기억에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시골 큰집에 내려갔었는데, 엄청난 치통에 하루인가를 버티다 급한 대로 근처 가까운 치과에 갔다. 급한 대로 처치는 받았지만 다니던 큰 치과에 가 나머지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다음날 병원에 갈 때까지 거의 3~4일을 진통제 하나로 버텼다. 진통제를 먹어도 이가 너무 아파 발바닥이 찌릿찌릿할 정도의 통증이었던 것 같다. 많이 울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잇몸에 생긴 염증이 너무 심해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때부터 치과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원래도 달갑지는 않은 곳이었지만 '치과 is 고통'으로 굳혀진 계기가 되었다. 소리는 가장 크고 생생하게 다 들어야 하면서 마취를 해도 큰 위로가 되지 않는. 왜인지 치통은 항상 다른 통증보다 더 가깝고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두려운 공간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치과가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여자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치과만큼이나 두렵게 느껴지는 공간이 바로, '카센터'였다.
며칠 전부터 자동차에 타이어 공기압 경고등이 떴다. 신랑에게 이야기하니 그의 대답이 글쎄, "그래서, 카센터 다녀왔어?"였다. 나로서는 그의 답변이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신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카센터를?"
"... 으응"
"어하..?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네?"
"... 어.... 왜...?"
"아니, 카센터를 혼자 가볼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어."
그로서도 내 대답은 제법 신선하게 전달된 것 같았다. 마치 신랑이 처음 밥 짓는 법을 물어봤을 때 의아해하며 '쌀을 덜어서, 씻고, 앉히면. 끝-'이라고 했던 내 반응과 비슷했다. 신랑에게서 "그냥 가서 타이어 공기압 좀 봐주세요.라고만 말하면 되는데"라는 대답이 되돌아온 걸 보면.
그래서 나는 오늘. 비장하게 카센터를 다녀왔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터무니없이 비싸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안고. 신랑이 다니던 카센터에 들어가 타이어 공기압 좀 봐줄 수 있느냐 물었다. 한쪽에 차를 대라는 직원의 안내에 정차를 해놓고 차에서 내려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 지금 자기 지난번 왔던 카센터에 왔어."라는 부분의 통화 내용은 직원이 잘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이곳에 경험이 있고, 바가지를 씌울 경우 지난번에 여기에 왔던 내 남편과 다시 오겠다'는 마음의 염원을 가득 담은 통화였다. 부디 직원이 내 통화 내용을 귀담아 들어주길 바라면서.
전화를 끊고 카드를 꺼내며 나는 몸에 밴 듯 자연스럽게 물었다.
"얼마쯤 나와요~?"
나는 아마도 체감상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던 것 같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최대한 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다음에 또 올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벨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그 말은 마음에만 담아뒀다.
얼마냐는 내 질문에 직원분은 "서비스로 해드릴게요."라고 답해줬다.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혼자만의 오해와 경계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인생의 도장 깨기 하나를 해낸 느낌이었다. 약간의 뿌듯함과 성취감도 올라왔다.
막상 해보니 별 것도 아닌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치를 늘려 나가는 게 쉽지 않다고 느낀다. 늘 만나던 사람들만 만나고, 입에 맞는 것만 먹는다. 새로운 취미 생활 같은 건 늘 머리로만 도전한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은 다르기를 기대한다.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말했다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상이라고. 내가 딱 그런 것 같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 중 하나다. 이제 내가 또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을지. 없을 것 같아 슬픈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