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에서의 한 달 살기, 생각해볼만하다.
호주로 떠나는 것이 결정된 후, 나는 당시 내가 사용하고 있던 아이폰6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였기에 그간 내가 살면서 다녀본 나라들과는 정반대인 북반구에 위치한 곳으로 떠나게 됨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계절과 도로 방향이 반대인 나라, 커피 자부심이 강해 스타벅스가 힘을 못쓰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영연방 국가라 많은 것이 영국을 따라가는 나라,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캥거루와 코알라가 사는 나라. 내가 호주라는 막연하고도 넓은 땅덩어리에 관하여 알고 있던 것은 이게 전부였다.
부지런히 네이버와 구글을 오가며 호주를 대표하는 각 도시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조건은 한국인이 너무 많지 않을 것, 화려하고 복잡한 인프라보다는 적당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그러나 문화와 교육은 최대로 누릴 수 있을 것, 또 약간은 보수적인 서구 문화가 스며 있을 것. 이 조건들을 앞세운 검색을 하다 보니 시드니와 브리즈번은 1차적으로 제외되었고 가장 구미가 당기는 곳들은 멜번과 퍼스였다. 그러나 퍼스는 여름에 너무 덥다는 여러 후기들로 인해 며칠 뒤 탈락하였고 문화와 교육, 그리고 커피가 유명하다는 멜번을 선택하였다.
호주의 첫 수도였다는 사진 속 멜번에서는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했고 도심 속 공원 잔디밭 위에는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틀 런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듯 비가 자주 내려 레인코트가 있으면 유용하다는 정보도, 부슬비를 맞으며 유럽풍 건물 사이를 롱블랙 (아메리카노와 흡사한 블랙커피) 한 잔과 함께 누비는 기분은 특별하다는 후기도 모두 단박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그냥 낭만을 따라가자 싶어 나는 이렇게 별다른 특별한 이유 없이 느낌에 맡긴 채 멜번으로의 여정을 선택했다.
2016년 8월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나는 멜번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홍콩을 경유해 이 곳으로 오는 여정은 대기시간을 포함 총 15시간 정도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창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무렵이었던 서울과 휴가 막바지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던 홍콩 공항과는 달리 멜번은 매우 쌀쌀하고 또 여유로웠다. 공항에 내려 맞이한 차갑고도 청량했던 그 첫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훗날 멜번 근교 여행을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느꼈던 공기의 신선함 역시도 최대치가 아니었다는 것. 그래도 미세먼지로 인해 서울 한복판이 뿌옇게 되는 것을 느껴오던 터라 그마저도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만 보던 8월의 겨울, 눈까지 내렸으면 완벽했으련만 안타깝게도 멜번은 눈이 오는 날이 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대신 날이 추워지면 우박은 자주 내린다.)
도착 후 나는 시내로 나와 휴대폰 유심을 사기 위해 멜번의 중심가 CBD - Central Business District 내에 위치한 한 쇼핑센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래간만에 듣는 영어, 참 알아듣기 어렵다. 내가 긴 시간 접해오던 미국식 영어가 아닌 T가 살아있고 R이 사라진듯한 억양은 예상보다 더 생소했다. 그날 내 유심 구매를 도와준 매장 직원에게 참 미안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Pardon?을 여러 번 전달하며 겨우 마친 나의 첫 쇼핑이었지만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꼈다. 특히 유심을 갈아 끼우고 매장을 나서는 나에게 '너의 미국식 억양 참 세련됐다'라는 친절한 한마디는 위축된 나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호주로 오기 전 사전 조사를 할 때 연관 키워드 중 '호주 인종차별', '호주 백호주의' 등을 여러 번 보았다. 한국 언론에 가끔 등장하는 동양인 인종차별 기사 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한국 사람들의 뇌리에 '호주는 아직도 동양인을 비하하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도 한국인 여행객들과 대화를 나누면 열에 아홉은 인종차별에 관한 질문으로 대화가 시작된다. 물론 인종차별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들, 특히 호주 내 다른 도시에서 살다 멜번으로 이동해온 많은 사람들은 '멜번, 참 친절하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또 대다수의 여행객들 역시 막상 자유여행으로 시내를 돌아다녀보고 난 후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라는 피드백을 많이 주고 있다. 아직까지는 여행 중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 부분은 주관적인 것이니 여기까지만.
왜 하필 멜번이었을까. 글쎄, 아직까지 나도 참 궁금하다.
내가 20대 중반이었을 적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멜번에서 자라고 부모님의 역이민을 따라 한국으로 온 한 교포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는 언제나 멜번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였고 늘 새로운 도시에 대한 궁금함과 세계 여행을 꿈꾸던 나는 참 많은 질문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전해 들은 멜번은 나에게 가을 같은 도시로 기억된다. 커피가 참 맛있어 스타벅스와 커피빈은 입에 델 수 없다는 그 친구의 말이 그때는 허세인 줄만 알았지 내 입으로 같은 말을 하게 될 줄이야.
멜번은 나에게 그저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함께 우울함을 품은 도시로, 이제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샘 해밍턴의 고향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던 이 곳을 나는 왜 선택했을까?
이번 '멜번 한 달 살기' 시리즈를 연재하며 나도 그 이유를 선명하게 정의해봐야겠다.
햇수로 5년 차인 멜번살이. 정부의 엄청난 지원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개발 덕분에 길지 않은 이 시간 동안 멜번은 정말 많이 변했다. 많은 것들이 조금 더 현대화되었고 편리해진 덕에 처음에 느꼈던 답답함이 많이 줄어들었으며 반대로 비록 불편함은 수반했지만 내가 좋아했던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살짝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 있게 멜번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고 추천한다. 멜번만의 넘치는 감성, 앞으로 소개할 골목골목만을 다녀도 매일같이 볼거리가 넘쳐나는 디테일함, 그리고 과거에 머무른듯한 모습 속에 감춰진 현대적인 문화들이 굳이 손꼽으라면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가 아닐까? 앞으로 소개할 호주 속 작은 유럽이라 불리는, 리틀 런던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이곳 멜번.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멜번으로 입국하기 전 부랴부랴 예약을 진행했던 한 쉐어 하우스에 짐을 풀고는 바로 앞에 위치한 야라강을 따라 저녁 식사 할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밤 공기는 생각보다 더 차가워 롱 패딩을 꺼내 입고 수면 양말로 한껏 커진 발을 운동화에 구겨넣은 채 화려한 도시의 밤을 감상하던 그 때의 나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던것 같다.
'여기 좀 춥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곳이다. 내 스타일이야.'
# 안녕하세요, 브런치 작가 헤일리입니다. 호주 멜번에 관련된 글들을 연재하다가 어느 순간 제가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성이 자꾸 흐려져 잠시 쉬어간다는게 벌써 1년 가까이 되어버렸네요. 제가 기존에 운영하고 있는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꽤 많은 분들이 작년부터 멜버른 한 달 살기에 관한 질문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비록 저는 이 곳 멜번에 거주하고 있지만 멜번 한달살기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느끼는 멜번과 한 달간 살아보실 만한 매력적인 이유, 그리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어떤 것을 경험해보시면 좋을지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다시 한번 브런치 운영에 힘써보려고 합니다. 더 많은 독자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좋은 콘텐츠들로 자주 찾아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