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짤은 어떻게 반지성주의를 표상하였나
한때 SNS에 대해서 공론의 장 내지 헤게모니 구축을 위한 문화적 진지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길 주고받는 우리에겐 PC 통신에서 출발해 다음 카페에 이르는 사이버스페이스사(史) 초반의 중산층 인텔리 청년 집단들이 이뤄낸 어떤 성과가 주는 잔상이 있었다. 그런 기대를 구태여 풀어써본다면 그것은 집단지성이란 말이 드러내는 대중에 대한 신뢰, ICT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사이버 민주주의와 그에 따른 직접적인 참여와 공론, 정보의 공개와 유통을 통한 대의제와 관료제의 보완, 숙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였다.
지금의 SNS는 정말 초기의 기대에 부응하는 공간일까? 단언컨대 지금의 SNS는 먹짤과 있어벌리티의 공간이고 먹짤과 있어벌리티, 소비주의의 환상에 잡혀 있는 호모 먹짤리아누스와 호모 있어벌리투스의 세계다. 나날이 대중의 지성과 숙고에 대한 기대는 폭증하는 단편적인 죽은 정보의 증거와 전체 유통량의 다수를 차지하는 먹짤과 있어벌리티, 상업광고들에 잠식되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요컨대 개인적인 사건이 있었다. 오랜만에 경북대 동문에 있는 삼겹구이 정식을 먹고 나도 대세에 따라 그 사진을 페북에 올렸다. 그런데 삽시간에 좋아요와 댓글이 폭풍처럼 달렸다. 아마 내가 쓴 어떠한 기고나 장문의 글들도 그런 관심은 못 받아 본 것 같다.(오마이뉴스에서 안철수와 박근혜를 깠다가 항의 댓글과 항의 페메 온 게 가장 큰 반응이었다) 난 늘 글을 올리며 사람들의 비평과 피드백, 토론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은 ‘어렵다’라는 말 조차 안 할 정도로 무신경하다. 대개 보면 페북과 같은 공간에서 비교적 독해를 요구로 하는 글을 올리는 계층은 상당히 고정적이다. SNS의 대부분의 데이터는 사실상 어떤 정보 값이나 시각이 없는 먹짤과 여행사진, 소비에 대한 관심 등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모두가 맛있고 멋있고 행복해 보이고 풍요로워 보이는 이 공간이 주는 부담 때문에 이 공간을 떠나기도 한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자랑’과 ‘인정’의 욕망은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의 사이버 스페이스는 정념과 자랑의 공간이 된 것은 아닐까.
내 글에 별로 관심이 없는 건 내가 워낙 졸문이기도 하고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사실 그다지 인정받을 만한 문장과 시각이 아닌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먹짤에게 눌린 것은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이것은 단순히 내 글이 관심받고 조망받지 못하는데 대한 분노나 좌절과는 다르다. 난 누군가의 좋아요나 하트를 기대하지만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본질은 우리가 시간과 독해력을 요구하는 장문 보단 단문화 되고 짧은 정보 값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주 된 지식 획득의 경로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숙고와 독해, 논증을 요구로 하지 않고 마치 잘 정리된 학원 강의처럼 ‘팩트’만 딱딱 짧고 쉽게 정리된 단문을 읽는다는 것은 스스로가 하나의 주체로 그 맥락과 역사, 배경을 파악하려는 노력, 이 하나의 토픽을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상상하는 사고를 제약한다. 아마 이런 단문화는 세계를 단편적인 정보와 ‘팩트’로 가득 차게 만들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인간의 의미는 있어벌리티와 먹짤리티에 있다. 배고픔과 소비, 여행 등 비 지적 활동이 우리에게 의미가 된다.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지려는 시도보다는 당장 내가 먹으 메뉴와 내가 새로 산 옷, 내 주식의 가치 변동이 우리에게 더 본질적인 존재론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SNS는 새로운 인간, 먹는 것을 찍고 미감과 향 등 음식의 모든 맥락을 거세시킨 이미지만 소비하는 호모 먹짤리아누스와 소비주의적인 성향의 나열로 점철되는 호모 있어벌리투스를 탄생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적 헤게모니 진지? 숙고과 참여의 직접 민주주의? 엿이나 주라 해라. 정치는 그것의 고유성을 엿 바꿔 먹고 정파적 이해관계와 권력관계로 환원되고 현재의 All of Nothing의 구조 속에서 적대와 수사, 정념만 가득하다. 우리의 기대는 장렬히 패배한 것이다.
덧. 먹짤에 좋아요가 많이 달린 게 좋아서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어제 저녁에 느낀 묘한 위화감, 자괴감에 대한 정리에 가깝다.
덧. 모두에게 쓸 수 있는 세계를 주었지만 모두가 문학인이, 역사가가 되지 못했다. 모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세계지만 모두가 철학자가 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성경을 읽게 하였지만 모두가 사제는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린 만인과 대중에 대한 기대를 포기해선 안된다. 그것은 단순히 ‘자극과 선동에 노출되어 샌더스나 트럼프나 지지하는’ 대중에 대한 혐오나 계몽과는 다르다. 우리가 꿈꾸는 세계는 모두가 철학자일 수 있고, 모두가 문학자일 수 있고 모두가 예술가일 수 있는 세계다.
덧. 한편 이는 경제적 불황과 노동의 유연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인간이 인간됨을 얻고 행하는 시간이 양과 깊이에서 제약받고 철야와 특근에 몰리는데 숙고나 참여는 개뿔.
덧. 그리고 이 글을 쓴 그해(2016년 6월). 같은 학교에 있는 친한 강사 선배가 “학원식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강의 평가를 받았고 그 이듬해 우리 지도교수님은 사례를 통해 개념을 설명하는 선생님 특유의 수업 방식이 “다른 이야기 너무 많이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로 다 떨어진 사건 같지만 묘하게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는 징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