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서브 포스터에는 단테 신곡 지옥편의 이 섬뜩한 마지막 문장이 새겨져 있다. 문득 프리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단테의 지옥편을 암송하던 장면이 문득 생각난다. 프리모 레비에겐 단테의 신곡과 호머의 '오딧세이'가 어떤 귀환의 가능성으로 읽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영화의 시작은 강렬하다. 난 처음에 내 눈의 문제인지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로 진한 셀렉트 포커싱으로 흐려진 화면 속에 열차에서 갓 내린 아우슈비츠 입소자들의 행렬이 들어차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 신참 행렬과 구별되는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모자를 쓰고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이름은 사울, 존더코만도라고 불리는 수용자 중에서 선별된 특수 역할 수행 수용자다. 그들은 이 거대한 수용소 관리의 최 말단에서 독일인 간수와 SS요원, 민간인들이 수행하지 않는 온갖 궃은 일들을 수행하는 존재다. 그들은 보통의 수용자와 다른 아주 약간의 특혜를 받는 대신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인 분열적인 회색 인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수용자이지만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카포의 하수인일뿐이다. 사울이 속한 코만도의 역할은 가스실에서 대량으로 학살된 수용자들의 시신...극에서 도막이라 불리는 그것을 치우고 소각하며, 가스실을 청소, 소득하며 가스실에 들어간 수용자들의 옷을 뒤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 거대한 조직의 최 말단의 생쥐와 같다. 그들이 없으면 거대한 조직의 핵심적인 학살 체계가 마비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 그나마 비교적 몇몇 카포나 피콜로 정도가 이들을 동료로 대할뿐이다. 아우슈비츠가 지옥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살의 주변부에 맴도는 존더코만도의 삶은 그 지옥 가장 아래의 불지옥과 같은 곳일 것이다.
영화의 큰 줄기는 가스실에서 소각로로 도막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우연히 가스실에서 살아난 12,3살 남짓의 아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감독관은 그 아이를 보내고 부검실로 옮길것을 지시하는데 사울은 갑자기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하며 '묻어줘야 한다'고 주변에 이야기한다. 결국 이 아이의 장례를 치뤄주기 위한 사울의 고군분투는 겉으로 드러나는 영화의 얼개가 된다. 아이의 시신을 몰래 빼돌려 존더코만도의 숙소로 옮기고, 장례를 치뤄줄 랍비를 찾기 위해 사울은 온갖 수용소 내부를 돌아다닌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아이가 정말 사울의 아들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동료 존더코만도인 아브라함과의 대화에서 아브라함은 사울에게 아들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사울은 본처의 자식은 아니라 하지만 자세한 이야길 이어나가진 못한다. 사실 그 아이는 사울의 아들이 아닐것이다. 어디서 왔고,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이 아이를 사울은 왜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장례를 치루고자 하는 것일까?
존더코만도 더 나아가 수용소 수용자는 나치나 독일군, 수용소에 참여하는 민간인과 동등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을 상실했다. 공간을 빼았겼고, 이름을 빼았겼고,인격을 거세당했다. 이 수용조 체계는 이송단계부터 철저히 그들을 동물이나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들의 시신을 도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도 상징적인 표현이다. 죽음과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된 곳에서 장례라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장치는 역설적이게도 그곳이 얼마나 비인간화 된 곳인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사울은 그 아이의 시신을 장례 치뤄 줌으로써 자신의 인간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가 치뤄주는 장례 속에서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존더코만도는 몰래 숨겨온 무기와 손으로 만든 수류탄, 낫과 칼 등으로 폭동을 일으킨다. 바로 바르샤파 게토의 저항과 더불어 있었던 수용소 내부의 저항이었다. 자신의 코만도 안에 속한 이들을 누구보다 인간적으로 대하려 했던 비더만이 동료들을 죽이는 대신 죽은 것을 계기로 존더코만도는 저항에 나선다. 물론 결말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대로 처참한 학살로 마무리 된다. 역사에서 그들은 아우슈비츠의 그 유명한 소각로 중 하나를 파괴한다. 소각로를 파괴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상징적인 것인가? 인간을 태우는 그 회색 연기를 내뿜은 소각로는 수용자와 나치, 존더코만도 모두의 존재를 파괴하는 공간이었고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그곳을 파괴하고 SS를 죽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사울은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그 아들의 시신을 들고 탈출을 시도한다.
극 중에 존더코만도들이 저항을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몰래 반입한 카메라로 이 대학살의 현장을 촬영한다던가, 내부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를 땅에 묻는 행위들은 존더코만도라는 가장 파괴된 회색인간들의 몸부림이었고, 이 몸부림의 끝은 존더코만도의 반란이었다. 불가촉 천민과 같던 이들의 이 반란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20세기의 스파르타쿠스의 난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인간 존엄과 존재를 위한 몸부림이었던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 몸부림이 발화되고 진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마무리 된다.
사울의 아들은 매우 독특한 영화다. 대개 영화관에서 영사 시에 사용하는 1.85:1 내지 2.35:1의 영사 비율이 아닌 4:3의 영사 비율을 채택하여 폭이 극단적으로 좁고 스크린의 상하면을 모두 다 사용하는 직사각형 형태를 띈다. 그렇기에 레터박스가 양쪽에 생기며 극도로 화면이 좁다는 인상을 준다. 카메라 촬영도 마찬가지다. 아웃포커싱을 중요한 연출의 도구로 사용하고 카메라 시야 내에 늘 누군가의 어깨와 뒤통수가 보인다. 카메라는 마치 쉰들러 리스트의 그것이나 최근 귀향의 위안소 씬 처럼 이 거대한 비극의 총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드러냄은 너무나도 비극의 크기를 간단하게 만들어버린다. 이 초짜 감독은 그런 손쉬운 연츨을 택하지 않는다. 사울과 그 동료들의 어깨너머로 펼쳐지는 잔혹한 시체들의 행렬과 시체가 되어가는 수용자들의 행렬은 아웃포커스로 처리되어 그 형태를 뚜렷이 알아볼 수 없다. 단지 그들의 아우성..정확히 들리지 않는 그 절규와 울음만이 들릴뿐이다. 이 비극은 영화 속의 불길과 연기, 잿가루 속에 존재하지 안위적인 연출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극도로 폭이 좁고 심도가 낮은 연출은 철저히 사울과 사울의 동료들을 중심으로 보여주며, 특히 사울과 비더만, 아브라함 등의 심리를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다. 영화는 대단한 화면과 소리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고,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오만함을 경계하는 듯 하다. 이런 거대한 비극을 다루는 흔한 영화의 독법으로 읽어내기 힘들 정도로 영화는 지루하게 이 납득하기 힘든 사울의 몸부림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시퀸스에서 감독은 사울의 처음이나 마지막 '표정'을 보여준다. 사울은 아들(아들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과의 조우와 저항, 탈출 속에서 마지막 인간성을 맛본듯 한 얼굴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제 갓 아우슈비츠에 탈출한 반란자들이지만 자신들의 은신이 발각되었음에도 사울은 홀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마지막 표정은 영화의 마지막에 울리는 기관총 소리로 이어지며 그 비극성을 더 한다.
사울이 유대교의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 하는 노력은 결과적으로 존더코만도의 반란을 실패하게 한다. 아니 사실 원래 그것은 실패 할 운명이었지만 사울의 분투는 실패를 더욱 앞당겼다. 영화 말미 죽음을 앞둔 존더 코만도의 마지막 점호에서 누군가 사울에게 외친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다니" 사울의 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은 어쩌면 곧 죽을 이 산자들을 위한 노력은 아니었을까...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것 같다. 학살 당하거나 싸우다 죽거나 두 가지 선택에 강제되는 이들 사이에서, 생존을 위하여 인강성이 탈각 되고 최소화된 이 공간에서 마지막으로 아들의 장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런 의미 아니었을까
우리 시대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생존과 먹고사니즘의 이름 하에 우리 삶에서 인간의 조건은 탈각 되고 생략되어 간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존재로 살기 위해 요구되는 존재론적인 의례들은 경제주의적 논리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우린 점점 존엄한 인간보단 동물에 가깝게 수렴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리모 레비가 오딧세이였나 단테의 신곡인가를 동료 수용자들에게 암송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의 유지를 위한 몇 개의 장치를 느꼈다고 하듯이 사울은 장례라는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의례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와중에서도 누군가는 사울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온갖 멸시와 비합리, 비효율의 이름으로 지탄받지만 마지막 인간의 조건을 부여잡고 아둥바둥 거리는 그런 인간.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도구화하고 대상화 하며 인간됨을 거세해나가는 시대의 사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린 정녕 아우슈비츠로 부터 벗어난 것인가?
덧. 홀로코스트 생존 유태인으로 증언문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소설집인 『릴리트(돌베개,2017)』을 보면 체사레와 로렌초라는 두 인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문득 두 이야기가 삶과 생이라는 존재의 조건을 위한 이야기로 읽히던 때가 있다. 마치 성자와 같은 체사레의 모습에서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삶'이, 도둑놈이자 사기꾼 로렌초의 모습에서 '생명'의 지속을 보게 된다. 사실 레비는 이 둘은 다른 사람으로 적었지만 난 이것이 홀로코스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개별 인간들의 분열적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무리해가면서 아이의 시신을 장례 치뤄주려는 사울의 모습이 이 로렌초와 차사레 사이에 자리 놓여 있다. 『주기율표』나 『이것이 인간인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 된 자』 같은 레비의 저작들을 하이퍼텍스트로 연결해가며 봐도 좋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