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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훈 Jun 10. 2016

싱스트리트(2016)

나의 자존, 나의 자유, 나의 사랑

싱스트리트(2016)



  존 카니의 세 번째 음악 영화 <싱 스트리트>를 두 번이나 보고서야 이렇게 단문이나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엄두를 내보게 되었다. 영화는 여러 의미로 데뷔작인 <원스>와 두 번째 작품이자 동시에 가장 상업적 흥행을 이뤄낸 <비긴 어게인> 사이에서 존 카니 본인의 영화적 계보를 이으면서도 이전의 두 영화를 넘어서고 있어 보인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화려하고 대단하지 않다. 뭔가 요즘 영화들처럼 복잡하고 중층적 플롯을 가지지도 않았고, 인물들이 막 그렇게 입체적이고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오히려 10대 후반에 갓 들어선 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을 구원하고 변화 시키고 나아가는 성장드라마이자 동시에 1980년대 중반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분열적인 시기를 살아가는 소년들의 이야길 단순하지만 명쾌하고 간혹 무거워 질 수 있는 이야기들을 진중하지만 가볍지 않게 잘 풀어내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영화는 198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다. 아일랜드는 1970년대 북아일랜드 문제로 다시 격화된 IRA와 영국의 격렬한 대치와 경제적 불황 속에서 평화와 경제의 문제를 둘러싼 빈번한 내각 재신임과 의회 해산 등을 경험하는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동시에 오랜 시간 아일랜드의 의식과 문화 기저에서 작동해온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 가톨릭이 여전히 곳곳에서 그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에게 희망은 마치 요즘의 ‘탈조선’ 담론처럼 영국과 같이 비교적 아일랜드 보단 상황이 좋은 인접 국가로의 탈출뿐 이었다. 영화 초반 듀란 듀란(Duran Duran)의 노래 리오(Rio)가 나오는 것은 이런 시대적 맥락을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리오그란데 강을 뜻하는 노래인 리오를 선곡한 것은 아이리쉬 해의 세인트조지 해협과 같은 곳을 유비하게끔 하는 장치인 것이다.

  주인공인 코너네 가족 역시 이 경제적 불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는 실직했고, 어머니는 주 3일 근무로 근무 시수가 잘린다. 원래부터 서로 간에 큰 사랑 보단 어떤 의무감으로 가족을 이뤘던 가족은 이 급격한 경제적 기반의 붕괴에 너무나도 무력했다. 주인공인 코너는 자신이 원래 다니던 학교를 높은 수업료로 인해 포기하고 영화의 핵심 배경이 되는 크리스찬 브라더스 스쿨로 전학하게 된다. 학교를 관장하는 수사는 거의 꼴통, 사이코패스 수준의 보수주의와 권위주의, 폭력에 찌들어 있었고, 학교는 이미 그 사회 내에서 사실상 의미를 잃어버린 아이들로 가득하다. 폭력과 괴롭힘은 예사이고 수업에 대한 참여는 엿 바꿔 먹은 지 오래이다.

적어도 이전까지 비교적 안온하고 정제된 삶을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코너에게는 마치 거친 야생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게이라고 부르는 아이들, 묻지 마 폭력을 행사하는 급우, 악랄하게 권위적인 학교의 최고 책임자는 이미 충분히 지옥 같은 집 바깥의 세계로 학교조차 그의 삶에 어떤 자존과 탈출구가 되지 못함을 드러내준다.

  벡스터 수사의 무자비한 폭력과 인생이 망가진 급우의 폭력에 상처 입고 걸어가던 코너의 눈앞에 구원자, 천사가 나타난다. 학교 앞 여학생 기숙사에 살지만 학생은 아닌 그녀, 라피나다. 코너 보다 한 살이 많은 이 위험한 눈의 소유자에게 코너는 한 방에 넘어가버렸다. 그녀와 말을 섞기 위하여 밴드를 하고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거짓말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물론 결과적으로 이건 거짓말은 아니다. 코너는 곧장 ‘세상의 모든 악기를 다루는 친구’ 에이먼과 여러 동료들의 도움으로 자칭 미래파 밴드 싱스트리트를 만든다. 이후 영화는 밴드 싱스트리트가 학기 말 디스코 파티에서 라이브 공연을 준비하며 생기는 여러 이야기들, 뮤직비디오 촬영과 작곡, 연습 그리고 코너와 라피나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사실 여기 까지 보면 영화는 틴에이지 영화와 음악 영화가 결부된 흔해 빠진 영화 같아 보인다. 하지만 <싱스트리트>는 단순히 꼬마가 음악과 사랑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그 이상을 다룬다. 영화는 이제 십대 후반에 접어든 소년들이 경제적 불황과 낡고 억압된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벌이는 사랑과 자존의 투쟁이며 탈주의 이야기다.

  우선 영화는 온 가족이 모여 이야길 할 때 듀란듀란의 리오 뮤직비디오를 보며 코너의 형이자 사실상 이 영화를 이끄는 역할인 브렌든과 아버지의 대화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그들이 뮤직비디오로 나오는 것이 뭔가 숨길 것이 있어서라 이야기하고 비틀즈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한편 라피나의 남자친구와 조우하고 돌아온 코너와 브렌든의 대화를 복기 해보자, 브렌든은 ‘제네시스’의 음악이나 듣는 것들이라 폄훼한다. 코너의 아버지와 라피나의 남자 친구는 말 그대로 어른이다. 구시대의 인물이며, 그들은 오래된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벡스터 수사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최근에 세상을 떠난 보위를 연상케 하는 화장과 염색을 한 코너에게 화장을 지울 것을 요구하고 사실상 물고문에 가까운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코너의 화장을 빼앗는다. 실직자 아버지와 마약상인 라피나의 친구,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벡스터는 코너와 친구들이 그리고 과거의 브렌든이 단절하고자 했던 혼란하고 가난하며 불우한 당대의 아일랜드를 보여준다. 미래파는 과거 자신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폭력과 방임에 내던진 아일랜드에 대한 탈주다. 리오는 영국으로의 탈주인 동시에 이 시궁창과 같은 현실에서 자기 삶의 구원이다. 만약 코너와 라피나, 에이먼과 여러 친구들에게 밴드 싱스트리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 길은 고된 길이다. 그들은 지지해줄 부모가 없다. 부모들은 죄다 이혼하거나 별거하며, 실직자 내지 파트타이머이며 심지어 알콜과 약물에 중독되고 조울증에 미쳐가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스스로만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내던져 진 것이다. 그들의 세계를 만드는 과정은 일견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바닷가 방파제에서 진짜로 바다에 뛰어든 그때 라피나의 말처럼 녹록치 않다. 대충 해서는 그들은 그들의 삶을 구원할 수 없다. 더욱 치열하게 구시대와 단절하며 스스로의 자존과 쓸모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그들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이고, 알콜과 약물에 찌들고 포트폴리오나 평생 만드는 모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브렌든과 코너가 말하는 행복한 슬픔은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치열함이 주는 어떤 카타르시스이며 동시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단절하기 위한 아리고 아픈 투쟁의 감정이다. 영화를 대표하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drive it like you stole it'의 뮤직비디오 촬영 장면을 생각해보자. 노래를 부르기 전에 코너는 라피나가 오길 기다리며(그녀는 런던으로 먼저 떠났다.) 자신이 그린 뮤직비디오의 영상을 상상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엔 라피나만 아니라 그의 부모도 등장한다. 이미 파국을 맞은 부부가 옷을 차려 입고 파티장에 나타나 함께 춤을 추며 코너를 지지해주는 장면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짧은 상상씬 안에는 형에 대한 코너의 의지와 라피나에 대한 마음 그리고 부모에 대한 감정이 담겨 있다. 아직 부모가 필요한 어린 소년이기에 부모의 재회를 기대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상상이란 점, 그리고 그와 그의 형제들이 이미 이 파국을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의 등장은 더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보여주는 것 아닐까? 행복한 슬픔은 이 과정이 가진 복잡한 심리...아마 고대의 오이디푸스가 느꼈을 법한 그런 감정들의 총체를 지시하지 않을까?


위험한 눈!!!! 한국이었다면 선한 아들 망친 요망한 년이라고 머리가 뜯길텐데 ㅜ


  코너와 라피나는 코너의 할아버지가 물려준 작은 보트로 아일랜드를 떠난다. 과거 그들이 이 보트로 야유를 나가며 바라본 아이리시 해를 건너는 정기 여객선의 길, 당대 수많은 아일랜드 청년들이 갔을 그 단절과 탈출의 길을 그들도 따라간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그들에겐 사랑과 자존, 단절과 미래의 역사가 존재한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이전 라피나의 런던행이나 브렌든의 물음처럼 영국의 지인이나 배경, 그들이 가진 돈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연고와 배경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이 역사로 살아갈 것이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존 카니가 화면에 띄우는 그 언명을 기억하라.     



덧 0. 존 카니는 1972년생이다. 아마 1985년의 그는 이제 우리 나이로 14살 정도 된 학생이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코너는 카니의 분신일지 모른다. 카니는 자신의 경험 내지 자신의 아쉬움, 자신의 꿈, 자신의 현실을 코너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존 카니는 1991년 데뷔한 밴드 더 프레임스의 멤버였다. 그리고 이 더 프레임스의 보컬이 바로 <원스>의 주인공이었던 글렌 한샤드다. <싱스트리트>가 존 카니의 어릴 적과 이어진다는 설명 그럴 듯하지 않나? 그렇기에 그는 이 세상의 모든 형제들에게 영화를 헌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덧 1. 이번 <싱스트리트>는 이전의 <원스>나 <비긴어게인>과 시공간을 활용하는 전략이 전혀 다르다. <원스>에서 아일랜드는 굳이 아일랜드일 필요가 없었고, <비긴 어게인>에서의 뉴욕은 뭔가 음악과 예술, 자유와 사랑, 낭만, 상업주의 등을 표상한다면 이번 영화에서 1985년 더블린은 영화를 추동하고 영화의 이야기를 가능케 한다. 즉 1985년 더블린 없는 싱스트리트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영화의 그럴듯한 배경, 물리적 공간으로 영화를 넘어서 당대의 다양한 맥락들과 영화의 이야기를 접합 시키고 이런 맥락들이 영화를 끄는데 역할을 하는 이런 방법이 너무 좋다.


덧 2. 인간은 가능성과 잠재성의 동물이다. 노력과 기회, 선택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덧 3. 이런 영화를 이제 겨우 50만 명이 봤다니...비긴 어게인의 그 저렴한 위로 보다.


덧 4. 난 drive it like you stole it 보단 the Riddle of the model이나 up이 더 좋다. 사랑스러운 것들..


덧 5. 영화의 세번째 주인공은 브렌든이다. 그는 이 가정에서 자유와 꿈을 위해 먼저 투쟁한 '미래파'이며 동시에 이 가정과 사회의 현실에 좌절한 청년이다. 그는 동생을 지지하고 가르치며 동생의 고민과 번민을 들어주는 존재다. 어떤 의미에서 브렌든이야 말로 영화에서 몇 없는 코너와 친구들을 지지해주는 어른이다. 하지만 단순히 단방향적 관계는 아니다. 코너의 변화와 실천은 브렌든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자신이 이뤄내지 못했던 자유와 자존, 음악과 사랑 그리고 '탈 아일랜드!!'를 이뤄낸 동생을 보는 그의 시선은 그 역시 또 다른 위험한 눈이 되어 감을 보여준다. 위험한 눈은 라피나만 아니라 코너와 브렌든 모두에게 존재한다.


http://seehun.tistory.com/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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