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거절 메일
중심으로 가라 적을 만들더라도
메일의 제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박이서 선생님께.
갑자기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읽을까? 아니. 읽을까? 기다려. 읽을까? 지금. 지금이야. 나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메일을 클릭한다.
박이서 선생님, 안녕하세요? 편집부입니다. 먼저 저희 잡지에 관심을 가져주시고 선생님의 귀한 원고를 투고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늘 보아왔던 비슷한 문장이다. 나는 감사드린다는 말 다음에 한 달간 그리고 글을 쓰는 내내 기대하던 상황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다. 스크롤을 내린다. 그러나 메일의 내용은 이전에 받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소 아쉬운 말씀 전하고자 메일을 드립니다.
답변도 주지 않는 여타 출판사들에 비하면 이곳은 작가들에게 상당히 친화적인 곳이다. 출판사에서 네 편의 거절 메일을 받는 동안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시도했고 무엇을 이루었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처음에 글을 쓸 때는 겁이 없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다 썼다. 욕먹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자기 검열을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실수. 그로 인해 매장당한다면 다시 내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된다면. 그게 가장 두려웠다. 합평을 같이 하는 문우들이 혹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신경이 쓰이냐고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이 맹숭맹숭해진 일. 가장 솔직할 수 있었던 글에서까지 눈치를 보게 된 일. 내 글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강렬한 메시지가 흩어지고 점차 사라지게 된 일.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합정역에 위치한 말과활아카데미의 수업을 신청했다. 합평 수업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서이제 작가의 수업이었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소설>. 작가님은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문학과 사회>에서 중편으로 등단한 이력이 있다. 총 8회 차의 수업 동안 두 번은 영화를 공부했다. 두 번째 수업에서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한 페이지 안에서 글로 묘사하는 작업을 했다. 수강생들은 총 20명이었다. 한 장면을 두고 서로 다른 스무 가지의 표현 방식을 경험했다.
작가님은 단점을 지적하는 방식이 아닌 글쓴이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합평을 진행했다. 왜 그 소재를 썼는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고서 의도한 부분인지. 글쓴이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지만 독자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 그녀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메타인지를 유도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질문에는 아예 대답을 못했다. 질문 없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있었던 종강 수업에서 작가님은 글에 있어서 장단점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사람마다 호불호란 그저 맘에 안 들고 들고의 문제인데, 과연 장점과 단점이 다른 문제인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님이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을 극단으로 밀고 가세요.
이제껏 많은 작가들의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느낀 점은 그 수업의 수강생들도 작가가 쓴 글의 특성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어떤 수업에는 다정한 사람들이, 어떤 수업에는 강렬한 분노를 지닌 사람들이, 어떤 수업에는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번 수업에는 서이제 작가님처럼 단단하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 모인 것 같았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계속 생각해왔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초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글을 쓰고 합평을 하면서 이론적인 부분을 배웠고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참고 삼아 내 글에서 모가 난 부분을 다듬어왔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소설이 반듯해질수록 글을 쓰는 일이 점점 재미없어졌다. 예전에는 소설 한 편을 끝낼 때마다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살 지 정말 궁금했다. 상상을 거듭하면서 어쩌면 그걸 대충은 알 것 같았고, 결국에는 그들을 내 친구처럼 여기게 되는 일이 생겼다. 가상의 인물이 아닌 내 주변의 인물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소중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현재는 소설을 다 써도 주인공의 미래가 궁금하지도 않고 나는 그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좋은 이야기만 좋은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이야기도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